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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48화 (48/112)

#제48화. 쓰디쓴 배신감

벌써 옷을 다 차려입고 나타난 다이앤은 커다란 레이스와 리본이 무수히 달린 화려한 살구빛 로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대륙에서 왕의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로 이름 높은 퐁디 부인이 입었던 최신 유행 스타일이었다.

일레인은 한숨이 나왔다.

“다이앤, 오늘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공주야. 언니가 이렇게 화려하게 차려입고 가는 건…….”

“며칠 내로 아라이곤의 짐머 왕자가 저택을 방문한다지? 영지에서 나는 한 해 수입을 다 합쳐도 이 드레스 값에도 못 미친다는 짐머 왕자 말이야.”

“다이앤!”

재산을 가지고 그렇게 사람을 폄하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름을 불렀지만, 일레인의 마음은 벌써 약해졌다.

그걸 모를 다이앤이 아니었다.

“짐머 왕자가 오면 내가 이렇게 화려한 차림을 할 수 있겠니? 마지막이야, 일레인. 응?”

“언니, 걱정하지 마. 아빠가 마련해 두신 지참금이…….”

“아니, 아니야. 돈 문제가 아니야. 다들 가난할 텐데 어떻게 나 혼자 화려하게 지낼 수 있겠니. 사치하는 외국 계집이라고 욕만 듣겠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라이곤 왕국은 가난한 왕국이다.

그러니 다이앤이 금고에 금덩이를 산처럼 쌓아 놓는다고 해도 이렇게 비싸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기엔 눈치가 보이리라.

일레인이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다이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애원했다.

“일레인, 오늘 하루만. 제발.”

“…그래, 다이앤. 다만 공주나 다른 귀족 영애들이 시비 건다고 대거리는 하지 마. 언니 평판만 나빠지니까.”

일레인은 허락하고 말았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레인은 수수한 모직 드레스를 입고 장미꽃이 아름답게 수놓인 옥양목 흰색 앞치마를 준비했다.

그러나 작업실 앞에 도착한 순간, 일레인은 다이앤이 다른 꿍꿍이가 있었다는 걸 즉시 알아챘다.

산샤 공녀를 그릴 때와 달리 작업실 입구에 붉은색 군복에 황금색 견장을 단 근위병이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공주가 있으니 근위병이 호위를 설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옆에 짙은 청색 제복을 입은 근위병 여섯 명도 함께 서 있는 점이었다.

뚝 걸음을 멈춘 일레인은 몸을 돌려 다이앤을 노려보았다.

연한 핑크빛 드레스 위에 온통 흰색인 북극 여우털 망토를 입은 다이앤은 눈의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다이앤, 당장 돌아가.”

일레인은 이를 악물고 잇새로 명했다.

“왜, 일레인? 왜 안 들어가고?”

다이앤은 무해하고 순진한 얼굴로 긴 속눈썹을 아름답게 떨었다. 정말로 같은 여인으로서도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무지막지한 아름다움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다이앤이 하필 왕국에서 제일 화려할 드레스를 빈틈없이 차려입고, 하필 오늘 별궁에 들었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또한 문제는 저 청색 군복이 브라바트 공국 근위병이 입는 제복이란 점에도 있었다.

두 나라의 근위병이 함께 작업실 앞에 호위를 선다는 건 두 나라의 주요 인사가 지금 작업실 안에 있다는 의미이고.

최근 브라바트 공국의 후계자인 빌헬름 대공자와 브리티나의 엘리자베스 공주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국혼이 확정되었는지 엘리자베스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빌헬름 대공자도 함께 행차한 모양이었다.

다이앤이 그토록 사모하던 빌헬름 대공자가 행차한 작업실에, 다이앤이 하필 최고로 아름답게 차려입고 온 것이 우연일 리가.

이 시국에 다이앤 너는 어쩌자고!

다이앤의 멱살을 잡고 목을 짤짤 흔들지 않기 위해 일레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빠가 타신 배가 언제 여왕의 해군이 쏜 눈 먼 대포알에 맞을지 모르는데.

크라몬드 백작가의 후계를 품었을지 모를 엄마의 임신 사실이 새어 나가면 가문의 부를 탐내는 자들에게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는데.

어쩌자고 너는 공주의 약혼자 앞에 이리 꾸미고 나타나려는 거야, 다이앤!

목구멍에서 쓰디쓴 배신감과 환멸이 신물처럼 넘어왔다.

“안나, 수잔. 다이앤 아가씨를 마차로 뫼셔라.”

일레인이 차갑게 명령했다.

공주님 알현한다고 좋아하며 따라온 수잔이 울상이 된 얼굴로 주춤주춤 다이앤에게 다가섰다.

“아가씨…….”

그러나 다이앤은 한겨울 날카로운 고드름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수잔을 노려보았다.

“가시지요, 아가씨.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일레인의 시녀 안나가 성큼 다이앤의 팔짱을 끼려 다가섰다.

그러나 다이앤은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치켜들더니, 손 쓸 새도 없이 작업실 문으로 돌진했다.

“아!”

일레인은 벌써 문에 다다른 다이앤을 보며 탄식했다.

“크라몬드 가문의 영애들 듭십니다!”

일레인이 다이앤의 뒤를 따라 작업실 입구에 섰을 때 공주의 시종이 큰 소리로 안에 아뢰었다.

처참한 기분으로 뒷모습을 노려보는데, 다이앤이 우아하게 돌아섰다.

“너무 원망하지 마, 일레인. 그 거렁뱅이 왕자랑 혼인하기 전에, 나도 기회란 걸 가져야 하지 않겠니?”

다이앤의 웃는 얼굴은 한없이 천진해 보였다.

“체면 세워 준답시고 거렁뱅이 왕자를 들이밀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예상했어야지.”

일레인은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그럼 처음부터 거절했으면 되잖아. 왜 이제 와서!”

“빌헬름이 왔으니까.”

기회를 잡아야지.

다이앤의 태도는 당당하기만 했다.

문이 열렸다.

작업실 안에는 화려하게 성장한 젊은이가 가득했다.

일레인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다이앤의 손을 꽉 잡았다.

아무리 미운 언니라도 크라몬드였다. 저 여우들이 날카롭게 갈아세운 발톱에 내 가족이, 크라몬드 가문의 사람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건 막아야 했다.

다이앤도 일레인이 잡아온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크라몬드 가의 두 자매는 손을 꽉 잡은 채 우아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 이게 무슨 실례지?”

“미쳤나 봐, 정말.”

들어서자마자 적의로 찐득거리는 수군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일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썰물처럼 갈라진 사이로 엘리자베스 공주와 빌헬름 대공자가 보였다.

“……!”

일레인은 말없이 절망했다.

엘리자베스 공주가 입은 드레스는 다이앤이 입은 드레스와 완벽하게 똑같았다!

공주와 같은 색의 드레스조차 입지 않는 것이 사교계의 불문율이거늘. 이건 정말 수습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결례였다.

‘사죄해, 다이앤. 어서!’

아득해지는 정신을 여미며 일레인은 온 힘을 다해 다이앤의 손을 쥐어짰다.

그러나 다이앤은 일레인의 손을 뿌리치고 우아하게, 봄의 나비처럼 사뿐하게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다.

“크라몬드 가문의 다이앤,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

“…….”

“…….”

온통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여기저기서 흥미와 경멸이 가득 찬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소리만 들렸다.

일레인은 용기를 짜내 시선을 들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이앤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빌헬름 대공자는 입까지 살짝 벌린 채 노골적으로 다이앤의 자태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개잡노무 새끼!

다이앤에게 무수히 많은 꽃과 연서를 보내 놓고 끝내 약혼은 엘리자베스 공주와 하려는 뻔뻔한 개새끼.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해 놓고도 또 다이앤을 넋이 빠진 듯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다니.

저 눈알을 파버리고 싶다!

치미는 욕지기를 참으며 일레인도 무릎을 굽혀 일단 예를 표했다.

“크라몬드 가문의 일레인, 공주 전하를 뵈옵니다.”

“……!”

“…….”

일어나도 좋다는 공주의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크라몬드 가의 두 자매는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있어야 했다.

일레인은 다이앤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드레스 색에 맞춰 자잘한 핑크 사파이어로 촘촘하게 머리를 땋아 올린 다이앤의 입매가 미세하게 치켜 올라 있다.

같은 드레스를 입고 공주보다 훨씬 화려한 미모로 공주 약혼자의 시선을 빼앗은 것에 대한 승리의 미소였다.

어리석게도!

일레인은 요사이 다이앤을 챙기지 못한 걸 사무치게 후회했다.

지난번 조지와의 일 이후 다이앤은 사정을 수습하고 함구한 일레인에게 줄곧 친절했다.

게다가 일레인은 채권과 국채를 해리스 브라운 명의로 바꿔 다이앤의 지참금을 마련하랴, 엄마의 임신을 돌보랴, 산샤 공녀의 초상화를 완성하랴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분주하기도 했다.

그래서 짐머 왕자와 혼인하기로 마음을 굳힌 줄 믿었는데.

일레인은 자신의 부주의를 뼈저리게 탓하며,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공주 전하! 크라몬드 가문의 일레인, 대죄를 청하옵니다. 오늘 공주 전하를 뵙는 영광된 자리에 미처 드레스를 챙기지 못했습니다.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

“그게 어째서 너의 불찰이라는 거지? 드레스를 잘못 입은 건 네 언니가 아니냐?”

목이라도 벨 듯 날카로운 공주의 질책이었다.

‘제발, 엎드려 사죄해. 다이앤!’

일레인은 속으로 간절하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다이앤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고개를 숙인 자세를 유지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레인이 강제로 무릎을 꿇려 사죄하게 하는 추태라도 저질러야 하는가 심각하게 고민할 때였다.

“어, 엘리자베스 전하. 실례지만 저 드레스는 제가 다이앤 영애에게 선물했습니다.”

갑자기 공주의 뒤에서 서글서글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빌헬름 대공자와 함께 서 있던 청년 중 하나였다.

최고급 비단이나 벨벳에 화려하게 금빛 자수를 놓은 베스트와 코트를 차려입은 다른 청년들과 달리, 정다운 눈으로 다이앤을 바라보는 청년의 코발트 빛 코트와 베이지 색 베스트는 좋게 표현하면 소박한 정도였다.

“대륙에서 워낙 유행하는 스타일의 드레스라서 제가 몸에 맞춰 가봉만 하면 되는 상태로 다이앤 영애께 선물했지요. 잘 어울리는 걸 보니 참 기쁩니다, 다이앤 영애.”

가지런한 치아를 하얗게 드러내고 있는 청년은 아라이곤 왕국의 셋째 아들 짐머 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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