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46화 (46/112)

#제46화. 화가로서 일레인은

일레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펠릭스 정도의 미모라면 저렇게 홀로 사랑을 꿈꾸며 몸이 달아 있을 여인들이 여기 이 릴리 별궁을 채우고도 남으리라는 데 금가루보다 더 비싼 제 귀한 안료 모두를 걸 수 있었다.

“공녀는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제자가 그린 그림의 마무리를 스승께서 하시고 싶다고 하시니, 이 제자 스승님과 따로 의논을 해야겠습니다.”

곧 죽어도 스승이래.

공녀가 입술을 뾰로통 내밀며 뭐라 반박하려 했다.

그러자 일레인은 물감 덩이를 덜어 내거나 혼합할 때 쓰는 뭉툭한 날의 실버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저 그림이 제 손에 찢기길 바라십니까, 공녀? 제가 공녀의 그림을 그릴 땐 일레인 크라몬드라는 화가로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판에 사적인 애정과 권력 놀음을 끌어들이시다니요.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용인할 만큼 제가 그리 관대해 보였습니까?”

얼핏 들으면 산샤 공녀를 비난하는 말이었으나 실은 엘렌 페일른의 뺨을 후려치는 것과 다름없는 비난이었다.

페일른 부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림의 세계를 먼저 걸어온 화가로서 느끼는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 전부터 화가로서 그림을 대하는 성실함보다 펠릭스를 마트비아의 후계자로 세우겠다는 욕망을 추구해 온 엘렌이었다.

엊그제 해싱턴 가에 온 마트비아 대공의 사자도 말했다.

“펠릭스 님께서 몬토바 공녀와의 혼인으로 탕구르 지방의 항구만 얻을 수 있다면 대공국 공자로 신분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또한 칼 대공자 님과 같은 선상에서 후계자 지명을 재고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펠릭스가 산샤 공녀와 혼인만 하면 후계자 자리까지 줄 의향이 있다는 소리였다.

엘렌은 마트비아 사자의 전언을 듣자마자 몬토바 공녀에게 초상화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산샤 공녀도 펠릭스와 이미 혼인이 확정된 것처럼 엘렌과 해싱턴 공작을 살갑게 대했다.

그런데 일레인은, 고작 스무 살의 풋내기 화가이면서도 일레인은! 화가로서의 자신과 펠릭스의 연인으로서의 자신을 분리해 대처하고 있었다!

엘렌은 말할 수 없이 창피하면서도, 그래서 더욱 평생 가져온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일레인 못지않은 재능을 가졌지만, 끝내 권력욕에 타락하고야 만 화가에게 남은 것이란 욕망의 실현뿐이기에, 일레인의 발치에 몸을 던져서라도 꿈을 이뤄야 했다.

“공녀, 잠시만 자리를 비워 주겠습니까? 제자와 그림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다.”

엘렌까지 나서자 산샤 공녀는 모욕을 당했다는 듯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드레스 자락을 펄럭거리며 나가버렸다.

나머지 귀족가 영애들은 이 무슨 흥미진진한 사랑과 권력 싸움이라냐 싶은 표정으로 정말로 나가기 싫은 발걸음으로 천천히 발을 끌며 나갔다.

이제 작업실엔 일레인과 페일른 부인, 그리고 뒤의 티 테이블 구석에 긴장한 채 차를 내리고 있는 안나뿐이었다.

“일레인, 펠릭스가 너를…….”

“선생님. 차부터 마시세요. 목, 마르시잖아요.”

아까부터 입 안이 타는 듯 마른침을 삼키는 페일른 부인을 눈여겨 본 일레인이 홍차를 권유했다.

“그래, 고맙다.”

페일른 부인은 티 테이블에 앉았다.

복잡한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홍차만 홀짝거렸다.

‘나는 펠릭스를 믿는다.’

입 안에 꽃향을 가득 퍼트리는 홍차를 마시며, 일레인은 펠릭스에 대한 신뢰를 다시금 곱씹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펠릭스, 당신을 위해서. 어머니에게조차 욕망의 실현 도구로만 쓰이는 가여운 당신을 위해 펠릭스, 나는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믿어. 그게 나 일레인 크라몬드의 사랑이야.’

일레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는 자신의 삶에 자식을 함부로 끼워 넣지 않아야 한다.

사랑에 버림받은 상처든 세상의 지독한 풍파든, 엄마는 자신의 삶에 새겨진 아픔의 상처가 자식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일레인과 펠릭스는 그런 어머니를 가지지 못했다.

지독한 상처에 홀로 우는 엄마 때문에 아주 어릴 적부터 억지로 어른이 되어야 했던 일레인처럼, 펠릭스도 줄곧 어머니에 의해 이리저리 전시되면서 귀족들의 손길과 눈길에 노출된 삶을 살아야 했다.

가장 안전하고 따스해야 할 울타리가 오히려 세상 속으로 내모는 모진 회초리가 된 시간을 견디고 견뎌 펠릭스는 드디어 어른이 되었지.

눈길만 주면 그 어떤 여자라도 왕비의 자리마저도 박차고 나올 정도로 잘난 사내가 되었으면서도, 펠릭스는 늘 버릇처럼 일레인에게 애원한다.

“날 버리지 마, 일레인!”

어릴 적 내 손을 놓았던 어머니처럼 그렇게, 내 손을 놓지 말아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고스란히 담긴 펠릭스의 애원을 들을 때마다 일레인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의 결핍이, 그리고 자신의 결핍이 아파서.

‘그래서 나는 무엇에게서든 펠릭스를 지킬 거야. 그게 모친의 욕망이든, 세상의 욕심이든!’

눈 안에 일렁이는 사랑을 담고 고요하게 차를 마시는 일레인을 지켜보던 페일른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레인, 펠릭스는 대공이 되어야 해. 그래야 지난날의 서러움이 사라지지 않겠니?”

“대공이 된다고 어릴 적의 서러움이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선생님.”

일레인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엘렌은 제 배 불러 낳은 아들을 놓아줄 수 없었다.

“귀족의 사생아란 오명을 쓰고 펠릭스가 겪은 아픔을 네가 알 턱이 있나. 그 아이는 대공이 되어 저를 무시했던 인간들에게 보란 듯이…….”

“아니요, 선생님. 펠릭스는 대공이 되지 않아도 이미 보란 듯 삶을 내보일 수 있는 성인이 되었어요. 그냥 성인이 아니고 유럽 최고의 투자 자산을 운용하는 자문사의 수장이에요. 아무 것도 없는 맨 밑바닥에서 스스로 삶을 여기까지 올려놓은 그 장한 아드님의 삶을, 선생님은 왜 아직도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시는 거지요?”

“너! 너!”

정곡을 찌르는 일레인의 말에 페일른 부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말았다.

그러나 일레인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세상에서 펠릭스를 아프게 하려는 자들에게 자비는 없다!

설사 그게 펠릭스의 모친일지라도.

“펠릭스가 저를 사랑하는 한 제가 먼저 펠릭스를 포기하는 일은 없어요, 선생님. 저의 사랑을 지킬 만큼의 재력과 권력은 제게도 있으니까요.”

너무도 당당한 일레인의 말에 엘렌은 왈칵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가슴이 빠개질 듯 아픈지.

일레인의 사랑이 이렇게 단단해서 부러웠다. 이렇게 단단한 여인의 사랑을 내 아들이 받고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 이 아름답고도 당당한 사랑을 지지하지 못하는 엄마여서, 죄스럽게 가슴이 미어졌다.

“일레인, 일레인. 너는 아직 세상을 몰라.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너와 펠릭스는 몰라! 그러니, 제발!”

그녀는 격해진 숨을 겨우 고르고 차분함을 가장해 말했다.

“제발 나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지 말아 주렴, 일레인. 부탁이야.”

페일른 부인이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일레인을 향해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일레인은 무모하도록 강한 열정과 확신을 가진, 이제 막 세상 속에 발을 내딛은 청년이었다. 세상에 굽히기보단 세상 전체를 바꾸고야 말겠다는 열정에 가득 찬 청년.

“선생님, 오늘은 스승으로 오셨으니 그림 이야기만 하시지요. 산샤 공녀를 그린 제 초상화가 선생님의 마음에 차시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따로 그리셔도 좋아요. 제가 저 초상화를 그리는 것은 우리 가문을 위한 것이지, 산샤 공녀를 그리고 싶어서가 아니니까요.”

페일른 부인은 일레인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똑똑히 깨달았다.

페일른 부인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작업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그림에만 집중했다.

“언더페인팅은 테르베르로 한 것이니? 루벤스처럼?”

“예, 선생님. 깊이감을 주기 좋다고 말씀하신 거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페일른 부인은 만지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구겨질 듯한 흰색 실크 드레스의 질감을 잘 살린 제자의 그림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글레이징 기법으로 얼굴을 가린 흰색 베일을 투명하게 잘 살린 솜씨는 아직 다 여물지 않은 서투름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서 더 젊음의 아름다움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었다.

“일레인, 산샤 공녀는 펠릭스를 마음에 품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녀를 이리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이냐?”

연인을 빼앗아가고자 하는 연적의 가장 큰 특징인 대담하게 빛나는 새카만 눈동자와 풍만한 가슴골을 어찌 이리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더냐.

물으면서도 엘렌 페일른은 이미 그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화가로서 가진 성실함.’

누구를 그리든 일단 그리기 시작하면 그 인물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을 치열하게 표현해 내는 화가의 집념.

엘렌 자신은 아들 펠릭스를 장차의 대공답게 실제보다 더 과장해서 총명하고 위엄 있게 그렸었다.

그리고 그 그림 속의 펠릭스는 진정한 펠릭스가 아니라는 걸, 스케치 할 때부터 엘렌 자신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그 그림은 눈길은 끌지만 진정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레인의 펠릭스는 여인을 향한 집념과 열정이 관능적으로 빛을 내는, 아찔한 미모의 사내였다.

남들에게 쏘아 대었던 황금빛 화살에 제가 찔려 저도 모르게 사랑에 빠져든 에로스 신의 숙명적 열정과, 어미 아프로디테의 횡포에 맞서 제 여인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단이 녹아 있는 관능적인 눈빛 앞에서.

펠릭스를 보는 여인들은 그 고백이 자신을 향한 양 가슴을 떨며 사랑에 빠졌다.

“그림은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신 분은 선생님이셨어요. 저는 선생님께 배운 대로 산샤 공녀의 아름다움을 찾아 화폭에 옮겼을 뿐이에요.”

도도하고도 확신에 찬 일레인의 대답 앞에서 페일른 부인은 다시 한번 슬픈 굴욕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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