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해싱턴 공작
도착해 보니 작업실엔 인기척이 없이 텅 비어 있었고, 구석의 벽난로만 따스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머, 너무 예쁘게 그린 것 아니니?”
샬럿 고모는 일레인이 그린 산샤 공녀의 초상화를 아주 뿌듯한 눈으로 보면서도 입술을 비죽이셨다.
“내 기억에 공녀의 미모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일레인. 속도 좋지. 펠릭스 초상화를 가져갔다고 물감통을 집어 던지려 했다는 그 주제 모르는 싹퉁바가지를 뭘 이렇게 정성스럽게 그린다니.”
그래도 해밀턴 후작 부인은 일레인의 초상화에 감동한 듯 가슴에 손을 대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웨딩 베일에 비치는 얼굴이 정말 신비롭도록 아름답게 표현되었구나. 드레스 자락의 흰색 실크의 질감도 생생해. 우리 일레인의 그림이 정말 경지에 이르렀구나.”
한참 후에, 감동의 눈물을 닦으며 샬럿 고모님이 코맹맹이 소리로 칭찬을 할 때였다.
감동을 깨듯 작업실 문이 열리고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왔다.
맨 앞에는 늘 그러했듯 산샤 공녀가 한껏 턱을 치켜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요새 산샤 공녀는 일레인이 그린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미모에 대한 자신감이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화려하게 성장한 귀족 부인과, 마찬가지로 은발의 멋진 가발을 자랑하는 초로의 신사와, 화려하게 성장한 낯익은 귀족 부인이 있었다.
“페일른 선생님!”
일레인은 추위에 곱은 손가락을 풀기 위해 감싸 쥐었던 찻잔을 내려놓고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부인에게로 달려갔다.
펠릭스의 어머니, 엘렌 페일른 부인이 산샤 공녀 일행과 함께 작업실에 온 거였다.
“선생님, 안색이 좋아지셨어요. 아!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으셔서 많이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에요.”
두 손을 꼭 잡은 채 열렬하게 반가움을 표하는 일레인과 달리, 엘렌 페일른 부인의 얼굴은 반가움과 죄책감 속에 반쯤 얼어붙은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해싱턴 부인께선 제 초상화의 마무리를 조언해 주시기 위해 친히 오셨답니다, 일레인 영애.”
산샤 공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
다 완성된 그림에 다른 화가가 무슨 조언을 준단 말인가.
당황한 일레인은 페일른 부인을 바라보았다.
페일른 부인이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한때 스승이셨으니, 부족한 부분에 대해 해싱턴 부인께서 조언을 해 주시는 것이 기분 나쁘진 않겠지요, 일레인 영애?”
산샤 공녀가 또 톡 끼어들었다.
대체 선생님은 왜 이런 상황을 만드는 걸까.
어떻게 답을 해야 선생님 입장도 난처하지 않게 하면서 화가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나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까.
일레인이 입을 달싹이며 궁리할 때였다.
“엘렌! 이게 무슨 경우지요?”
샬럿 해밀턴 후작 부인의 목소리가 일레인을 대신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지켜야 할 예의란 게 있지요. 스승으로서 일레인의 그림을 보러 오셨다면 미리 연통을 주셨어야 맞는 예의 아닌가요?”
샬럿 고모의 갈색 눈이 위협적으로 번쩍였다.
“그리고 산샤 공녀, 저 아름다운 초상화가 공녀의 마음에는 안 차나 봅니다. 그럼 다른 화가를 구하세요. 저 그림은 제가 필론 하우스로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델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림만큼은 명작이니까요. 일레인, 가자!”
정말로 불같은 성정의 후작 부인이었다.
해밀턴 후작 부인이 이렇게 나오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산샤 공녀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에요, 해밀턴 후작 부인. 스탠픽셔 화가님은 펠릭스 님의 모친이셔서 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샬럿의 화를 더욱 돋웠다.
“펠릭스의 모친이라서라니! 엘렌, 정말로 그런 이유로 여기에 온 것입니까? 이것이 해싱턴 공작가의 공식 입장입니까, 해싱턴 공작?”
샬럿이 살벌한 어조로 추궁하자, 이제까지 뒷짐을 진 채 뒤에 서 있던 초로의 귀족이 앞으로 나왔다.
일레인은 해싱턴 공작이라 불린 이를 바라보았다.
펠릭스의 외삼촌. 펠릭스가 페일른 부인과 함께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가여운 처지가 되었을 때 손을 내밀어 준 혈족이자 은인.
보수파의 수장으로 불리면서도 좀처럼 정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의 귀족. 그리고 은둔의 이유가 오랫동안 함께한 집사장과 붙어먹는 남색가여서란 고약한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보기 좋은 은발 가발 아래 사내치고는 선이 고운 얼굴의 신사가 샬럿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천천히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일레인 영애, 해싱턴 공작이오.”
보기 좋게 주름진 이마 아래 펠릭스와 똑같은 검푸른 눈이 일레인을 향해 웃음을 지었을 때.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확 기어올라 일레인은 예의도 잊고 한 걸음 물러섰다.
혐오감은 아니었다. 그런데 해싱턴 공작과 시선을 마주쳤을 때 일레인은 손끝조차 마주치기 싫은 기묘한 거부감을 느꼈다.
일종의 예감이었을까.
“영애의 그림은 우리 누이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구려. 진정한 재능이란 것이 무엇인지 영애의 그림을 보며 실감한다오.”
보통의 칭찬을 넘어서는 극찬인데도, 일레인은 공작에 대해 손톱만큼의 호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레인은 아주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온 백작가의 영애. 온몸을 휩싸고 도는 거부감을 억누르며 일레인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해싱턴 공작님.”
샬럿 해밀턴 후작 부인이 엄격한 목소리로 다시 추궁했다.
“해싱턴 공작님. 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샬럿, 어째 그리 빡빡하게 구는 게요? 우린 어릴 적부터 여름을 함께 보낸 친구이자 또 가까운 친족이 아니오?”
말을 마친 해싱턴 공작이 사람 좋게 너털 웃으며 샬럿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리저리 얽힌 귀족가의 혼맥은 해싱턴 공작과 해밀턴 후작을 같은 외증조 할머니를 가지도록 엮어 놓고 있었다.
“자, 우리는 따로 좀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림 이야기는 엘렌과 일레인 영애, 당사자 산샤 공녀끼리 편하게 하도록 하고요.”
해싱턴 공작이 샬럿 고모님에게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 하는 팔에 손을 올리기 전 샬럿이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윌슨 백작의 눈과 똑같은, 그래서 일레인과도 똑 닮은 갈색 눈이 묻고 있었다.
‘일레인, 내가 잠시 해싱턴 공작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 저들은 너와 펠릭스가 혼인을 약속했다는 걸 모르는 듯한데.’
조카를 지극히 아끼는 샬럿 고모 옆으로, 냉정한 해싱턴 공작이 보였다.
공작은 흥미 가득한 눈으로 일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레인은 본능적으로 등을 쭉 펴고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그리고 샬럿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샬럿이 해싱턴 공작의 팔에 손을 얹었다. 두 사람은 공작의 에스코트 하에 작업실을 나섰다.
아마 공작이 궁 내에 마련한 적당한 장소에서 차를 나누며 대체 펠릭스의 혼사를 어찌할 셈인지 이야기를 나누겠지.
일레인은 펠릭스의 마음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집착하는 쪽은 펠릭스이지 내가 아니야. 그는…….’
펠릭스에게 필요한 건 변함없는 사랑과 지지였다.
돈과 권력이 아닌 순수한 지지와 사랑.
이미 넘치도록 많은 부를 가지고 있고, 원한다면 마트비아의 권력까지 손에 넣을 수 있는 펠릭스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권력의 비정함에 넌덜머리가 나 아예 아무도 없는 신대륙의 새 땅으로 이주까지 꿈꿔 왔던 펠릭스에게 조그만 항구가 딸린 지참금 따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일레인은 알고 있었다.
“페일른 선생님, 어때요?”
일레인은 상냥하게 선생님께 여쭸다.
다른 이들이 다 펠릭스와 자신과의 관계를 시기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펠릭스의 모친이자 자신의 스승인 페일른 부인께만은 두 사람의 관계를 축복받고 싶었다.
“색감을 아주 잘 살렸다, 일레인. 그리고 웨딩 베일의 표현도 아주 좋아. 베일 아래로 보이는 얼굴도 아주 잘 표현했구나.”
극찬이었다.
일레인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페일른 선생님의 손을 다시 꽉 쥐었다.
“그런데 일레인. 그림 마무리는 내가 하게 해 다오.”
이게, 무슨!
영문을 몰라 일레인이 눈만 껌뻑거릴 때 산샤 공녀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차의 어머니께서 며느리의 초상화를 손수 그려 주고 싶으신 거지요? 저도 좋습니다, 해싱턴 부인.”
“!”
이게 다 무슨 소리람.
일레인은 샨사 공녀가 아닌 페일른 부인의 눈을 응시하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펠릭스와 이야기를 나누셨나요, 선생님?”
대체 왜 펠릭스 당사자의 의견도 듣지 않고 이리 일을 벌이시는 것인가요.
뒤의 말은 꾹 삼켰다.
“펠릭스가 마트비아에서 대공자의 신분을 인정받으려면 공녀와의 혼인이 필요하단다, 일레인.”
페일른 부인이 일레인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빠르게 속삭였다.
“일레인, 나는 펠릭스가 사생아로 남아 있는 것을 더 이상은 못 본다. 제발, 나를 이해해 다오.”
“……!”
이분이 정말 내가 알던 페이른 선생님이 맞긴 한 걸까.
그릇된 모정과 탐욕스러운 욕망에 번득거리는 페일른 부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일레인은 천천히 손을 빼냈다.
“일레인!”
페일른 부인이 이해해 달라는 듯 다시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일레인은 한 발 물러서 산샤 공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펠릭스의 초상화를 옮기지 말라고 말렸던 거잖아요, 일레인 영애.”
내 초상화는 결국 그의 초상화 곁에 걸리게 될 것이니까요!
산샤 공녀의 아름다운 입술이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