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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42화 (42/112)

#제42화. 당신을 가지고 싶어

펠릭스가 일레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어둠 속에서 펠릭스의 두 눈동자는 열정적으로 빛을 내었다.

“내가 이제 와서 신분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건, 모두 일레인 너를 위해서야. 나 때문에 일레인, 네가 무시당할까 봐, 너의 빼어난 그림이 폄하될까 봐. 그 이유뿐이야. 그리고.”

펠릭스가 화급하게 해명을 이어 갔다. 일레인이 화를 내고 어렵게 허락한 마음을 거둬들이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가엽게도.

그래도 일레인은 확인해야 할 사안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럼, 몬토바의 산샤 공녀는?”

“산샤 공녀는 나와 관련이 없어.”

펠릭스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마음에 조금도 담아 본 적 없기에 아예 언급할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은 거야, 일레인.”

“…….”

일레인은 펠릭스의 두 손에 얼굴이 잡힌 채 생각에 잠겼다.

대단한 미인인 샨사 공녀가 펠릭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렇지만 펠릭스는?

그에 대한 대답이 바로 나왔다.

“아까 꽃다발과 함께 주고 싶던 거였어.”

펠릭스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은으로 만든 아름다운 상자 하나를 꺼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막 떠오른 달빛을 끌어들인 상자가 은은하게 빛을 내었다.

펠릭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상자를 열어 일레인 앞으로 들어 올렸다.

“약혼하자, 일레인.”

상자에 든 것은 다이아몬드를 세공한 백금 반지였다.

펠릭스는 늘 이렇게 한 발 앞서 일레인의 의심을 거둬내 주었다.

살아온 동안 받았던 무수한 상처에서, 자신이 사랑하게 된 여인에겐 상처 주지 않는 법을 깨우친 사람처럼, 단호하게 펠릭스는 제 마음과 결단을 오롯하게 내보였다.

은빛 달빛을 머금은 백금 위에 커다랗게 박힌 다이아몬드가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일레인 크라몬드,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아아, 펠릭스!”

일레인은 갑작스러운 청혼에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커다란 감동이 파도처럼 밀어닥쳐 심장을 흔드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마구 ‘네, 우리 당장 결혼해요!’ 아우성을 쳐 댔다.

펠릭스가 제 전부를 보이며 다가오는 것처럼 일레인도 펠릭스에게 아낌없이 다가서고 싶었다.

그러나 일레인 크라몬드는 복잡한 일에 휘말려 있는 백작가의 영애,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일레인의 마음을 헤아린 펠릭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마음 같아선 내일 당장 결혼하고 싶지만 여러 복잡한 일이 많아서 불가능하단 거, 알아. 그러니 우리 빠른 시일 내에 약혼하자.”

펠릭스는 제 근심도 내보였다.

“내년 데뷔탕트 치르면 여러 놈들이 네게 청혼할 거야. 그 생각만 하면 불안해서 뭘 집중할 수가 없어, 일레인.”

그러니 어서 이 반지와 청혼을 받아 줘.

펠릭스는 일레인의 왼손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댄 후, 고개를 들었다.

일레인을 올려다보며 펠릭스가 다시 물었다.

“나 펠릭스 페일른의 일생 유일한 반려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일레인 영애?”

코가 맵싸해지더니,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벅찬 감격과 설렘이었다.

일레인은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가 무릎을 일으켜 일레인 앞에 섰다. 그리고 왼손 중지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다이아몬드가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났다.

반지에서 눈을 뗀 일레인이 펠릭스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리고 먼저 입술을 펠릭스의 아름다운 입술에 붙이고 뜨겁게 속삭였다.

“사랑해, 펠릭스.”

하아.

이제야 긴장이 풀린 듯 펠릭스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고 일레인을 꽉 껴안았다.

“나 펠릭스 페일른은 일레인 크라몬드의 사람이야. 그러니까 아끼고, 사랑해 줘. 버리지 말아줘.”

얼굴에 맞닿은 펠릭스의 가슴에서 쿵쿵, 심장 소리가 요란하였다.

“버리지 않을게, 펠릭스. 사랑해, 펠릭스. 날 사랑해 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의 입술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펠릭스는 거리낌 없이 일레인의 입 안을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어느새 일레인의 목을 쓰다듬고, 쇄골을 더듬었다.

“아하, 일레인!”

널 가지고 싶어.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강렬한 욕망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온 힘을 다해 자꾸 일레인의 드레스 자락 속을 파고드는 손을 제어했다.

“펠릭스, 우리 약혼은 내년 봄에, 데뷔탕트 직후에 공표하자.”

숨을 쉬기 위해 입술을 떼었을 때 일레인이 속삭였다.

“다이앤의 혼사가 먼저 결정되어야 해. 그래야 해.”

일레인이 먼저 약혼하게 되면 다이앤의 처지가 더 궁색해 보인다. 그건 백작 부부도 일레인도 원하지 않는 바였다.

펠릭스가 괴로운 듯 일레인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헉헉거리는 뜨거운 숨결이 일레인의 얼굴에 쏟아졌다.

“하아, 펠릭스. 당신을 가지고 싶어.”

일레인이 펠릭스의 얼굴을 감싸며 속삭였다.

“당신을 가지고 싶어, 펠릭스!”

가지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레인 크라몬드는 펠릭스를 가지고 싶은 욕망에 숨을 헐떡이며 매달렸다.

펠릭스는 달콤한 괴로움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일레인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로 응답했다.

* * *

그날 밤.

샬럿 고모님의 남편인 해밀턴 후작이 백작가를 찾았다.

바로 다음 날 출정해야 하는 크라몬드 백작을 전송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은 백작에게 충고와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해군의 전열함을 공격하는 일이 있어선 아니 되네, 윌슨.”

만찬이 끝난 후 서재에서 해밀턴 후작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왕이 조지 크라몬드를 책임 장교로 임명해 지원 업무를 맡긴 건 누가 봐도 속셈이 뻔한 계약이네. 크라몬드 가를 길들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 그러니 자넨 이번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줘.”

“으흠.”

크라몬드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반대하고 나선 건 오히려 펠릭스였다.

“여왕은 그렇다 쳐도 조지 크라몬드가 술수를 부리면요? 공교롭게도 눈먼 불발탄이 백작께서 타고 계신 배를 향해 날아갔다고 하면 어쩌시려고요? 조지 크라몬드를 제거해야 합니다.”

젊은 혈기 가득한 펠릭스는 일단 지저분한 수를 쓸 것이 확실한 조지에게 먼저 손을 쓰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윌슨 크라몬드 백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브리티나의 해군 장교네. 그를 해치는 건 반역이야.”

크라몬드 가문이 여왕의 세력과 거리를 둔다고 해서 함부로 조지를 해치진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해밀턴 후작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시선으로 윌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윌슨 말이 옳네. 지금 조지를 죽이면 윌슨은 오히려 여왕이 파놓은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거네, 펠릭스 군.”

해밀턴 후작이 펠릭스를 타일렀다.

펠릭스는 조지를 제거하지 않고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했다.

백작이 잘못되면 펠릭스가 삼십 퍼센트의 지분을 가진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과 채권 가격이 크게 떨어질 것도 문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레인이, 나의 일레인이 무척 슬퍼할 것이기에 백작의 안위는 반드시 지켜내야 했다.

“그럼 백작께선 아예 이 국면을 반대로 뒤집으시지요. 내일 출정하는 크라몬드 상선마다 돛대 위에 브리티나 국기를 달고 여왕께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번 해적 정벌은 여왕과 브리티나를 위한 것이니, 되찾은 선박과 무역품 모두 여왕께 바치겠다고 말입니다.”

오호라.

해밀턴 후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단기적으로 손해는 보겠지만, 백작께서 건재하시니 곧 만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왕도 자신에게 이토록 충성을 바치는 신하를 탄압한다는 비판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구요.”

그렇지만 크라몬드 백작은 그리 얼굴이 밝지 않았다.

“자네가 이번 전투 비용을 다 대는데, 무역품을 다 바치면 무엇으로 자네는 그 비용을 회수한단 말인가?”

그러자 펠릭스가 아찔하게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눈에 눈물을 고이게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깟 비용 따윈 아무 것도 아닙니다!”

“허허 참.”

저렇게 은근슬쩍 사위 행세를 하는군.

백작은 기가 막힌 듯 기분 좋게 웃었다.

다음날 새벽.

백작은 펠리스와 함께 루덴을 떠나 리스본으로 향했다.

펠릭스는 용병 알베르토에게 크라몬드 백작이 탄 배에 새똥 하나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준비해 놓으라는 서신을 앞서 보내 놓았다.

* * *

혹독한 추위가 몰아닥친 11월 중순, 일레인은 여왕의 명에 따라 두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릴리 별궁에 들었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캐시어 남작 부인이 뻣뻣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일레인을 반겼다.

“저기 안쪽 건물이에요, 일레인 영애. 말씀하신 물품은 모두 구비해 놓았습니다.”

“엘리자베스 공주님부터 그리게 되나요?”

일레인이 묻자, 캐시어 남작 부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산샤 공녀님부터 그리기로 되어 있답니다. 공녀께선 곧 재혼하셔야 하니까요.”

왕실 여인들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여기저기와 동맹을 맺는 매개체가 된다.

과부가 된 공주나 공녀는 상을 당한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왕이나 유력 제후의 가문과 혼인을 약속하게 된다는 걸 지적한 말이었다.

그런데 ‘재혼’이란 말을 하면서 캐시어 남작 부인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벌써 구체적으로 이야기가 되는 왕실도 있는가 보아요, 영애.”

캐시어 남작 부인은 일레인이 동요하기를 기대하며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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