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신분을 숨겼던 이유는
“여기 작업실로 오라고 하지 그랬니?”
매일 왕실 별궁에 들어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백작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림이 필요한 이들이 왔다 갔다 해야지. 누구 더러 오라 가라야.”
여기 포르투나 하우스에서 왕궁까지 마차로 한 시간 걸린다.
보통 귀족들이야 왕복 두 시간이 아니라 그 두 배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여식이 왕족과 어울릴 기회를 마다하지 않겠지만, 크라몬드 백작은 달랐다.
딸 일레인을 지극히 아끼는 백작은 고작 초상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딸을 매일 오가라는 왕명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일레인이 배시시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로 공주가 오면 또 그 수행인들도 다 와야 하고, 의상도 갈아입어야 하고 하니 거처를 제공해야 할 것이에요. 그럼 엄마께서 또 만찬도 준비하고 하셔야 하는데, 번거롭기만 하고 좋은 소리도 못 들을 텐데요.”
“아, 그건 또 그렇구나. 그럼 일레인. 무리하지 말고, 힘들면 대충 적당히 그려서 안겨 주고 끝내거라.”
말을 마친 백작이 허리춤에 달린 은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펠릭스가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했는데.”
“펠릭스가요?”
“펠릭스가 차명 회사 대표로 내세울 아메리카 인을 데리고 온다고 했어. 곧 도착할 게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크 소리와 함께 서재의 문이 열리고 뷰컴 씨가 들어왔다.
“펠릭스 씨가 신사분과 함께 왔습니다. 서재로 모실까요?”
백작이 일레인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왔다.’
차마 보고 싶다는 말을 못 해 대신 붓을 들어 매일 그려보던 그이가 왔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훤칠한 몸에 광택이 나는 검은 벨벳 코트를 딱 떨어지게 입은 청년이 들어섰다.
목 위까지 깃을 세운 흰색 모슬린 셔츠에 코트와 색을 맞춘 크라바트를 멋지게 맨 펠릭스였다.
“일레인.”
보이고 들리는 것은 오로지 일레인뿐이라는 듯 펠릭스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일레인에게 직진했다.
“이거, 내 마음이야.”
등 뒤에서 내민 건 연분홍 꽃잎이 겹겹으로 수줍게 오므린 작약꽃 한 다발이었다.
아빠 앞에서 펠릭스에게 꽃다발을 받다니.
어쩐지 수줍고 부끄러운 마음에 일레인은 펠리스를 보고 배시시 웃고는 서둘러 꽃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풀 내음 섞인 달콤한 꽃 향이 코끝에 부드럽게 감겨왔다.
“여어, ‘수줍은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꽃다발로 고백하는 사내치고는 너무 저돌적인데, 펠릭스.”
백작이 껄껄 웃고 나서야 펠릭스는 비로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의자를 들고 일레인의 의자 곁에 붙이고 옆에 앉았다.
“보고 싶었어.”
펠릭스의 속삭임이 일레인의 귀에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일레인은 꽃다발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는, 꽃다발로 가려진 손가락으로 슬그머니 펠릭스의 검지 하나를 잡았다. 추운 날씨에 차갑게 얼었던 펠릭스의 손가락이 일레인의 온기에 서서히 따스해졌다.
펠릭스의 엄지가 일레인의 엄지를 천천히 쓸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지나가는 곳마다 사랑의 열기가 꼬물꼬물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펠릭스의 뒤로 온통 금사와 은사로 수를 놓은 붉은색 벨벳 코트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노신사가 들어왔다.
“헨리 아셔입니다, 각하. 얼마 전까진 골든우즈 사의 대표인 조나단 골든우즈를 대리했는데, 이제 그 이름은 원래 주인인 펠릭스 님께 돌려드렸습니다.”
“그냥 윌슨이라고 불러요, 헨리. 그럼 헨리가 우리 일레인이 세울 회사 대표로 행세한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윌슨. 오랫동안 제 비서 노릇을 한 젊은 친구가 할 것입니다. 물론 실무는 주로 펠릭스 님이, 그리고 펠릭스 님 부재 시엔 제가 보좌할 것이구요.”
펠릭스가 꽃다발 아래 숨겼던 손을 빼고 일어섰다.
“자, 그럼 서류들을 보실까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이관할지 여기서 확정지으면 저와 헨리가 다 처리하고 후에 일레인의 재가를 받을 것입니다.”
회사 등록 서류과 주식과 채권 이관에 필요한 서류가 주욱, 서재의 책상에 놓였다. 일레인도 앉았던 의자에 꽃다발을 내려놓고 책상 한쪽에 섰다.
곧 뷰컴 씨가 차와 간단한 다과가 담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한 시간 가량 치열하게 계획을 수립하고, 약점을 보완하고 나니 늦은 오후가 되었다.
일레인은 안나를 불러 펠릭스가 준 꽃다발을 거처에 꽃아 놓으라 한 뒤 펠릭스에게 말했다.
“우리 잠깐 산책할까, 펠릭스? 나 물어볼 말이 있어.”
“그래, 일레인. 나도 네게 줄 것이 있어.”
어쩐지 들뜬 얼굴로 바지의 호주머니를 살핀 펠릭스가 팔을 내밀었다.
일레인은 펠릭스의 팔을 잡고 마른 잔디가 넓게 펼쳐진 정원으로 나왔다.
두 사람이 저택을 등지고 작은 숲 쪽으로 난 오솔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펠릭스가 왼팔에 올려진 일레인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보물을 만지듯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일레인은 힐끗 펠릭스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응, 일레인?”
따스한 눈으로 되묻는 것으로 보아 손가락을 어루만지는 것도, 그 손가락이 점점 열기와 힘을 더해가며 살금살금 손등으로 그리고 그 위 손목으로 파고드는 것도 그저 무의식적인 행위인 것 같았다.
일레인은 다시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봄이 되면 온통 초록으로 물드는 드넓은 크라몬드 가문의 영지가 초겨울의 추위 아래 색을 잃고 잠들어 있었다.
겉으로는 풀만이 자리한 벌판 같지만 삽으로 떠보면 풀뿌리 아래 흙엔 개미도, 굼벵이도 자리잡고 있다.
일레인은 숨을 내쉬며, 펠릭스의 손을 끌어다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 욕망이 진하게 담긴 숨으로 자잘하게 키스를 했다.
“일레인!”
놀란 듯 즐거운 듯 이름을 불러오는 펠릭스에게, 일레인은 손등에 입술을 댄 채 속삭였다.
“여왕을 알현할 때,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 펠릭스.”
“으흥?”
그가 손가락으로 은밀하게 욕망을 표했듯, 이제 일레인이 입술로 펠릭스의 손등을 궁그리며 또 물었다.
“펠릭스, 말해줘. 몬토바의 산샤 공녀가 정혼녀인지, 그리고 공국의 공녀가 탐을 내는 당신의 진짜 신분은 무엇인지.”
“엇!”
입술 아래 펠릭스의 손등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일레인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부유한 상인의 사생아로 알고 있을 때에도 펠릭스를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그 이상의 그 무엇이든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로지 단 한 가지. 그가 다른 여인의 남자만 아니라면.
펠릭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입술 아래 펠릭스의 두려움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신분을 숨겼던 것은, 일레인.”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투자 자문을 하면서 많은 귀족들을 만났다.
대개는 능수능란하게 여러 개의 가면을 돌려쓰면서, 때로 자신도 속여 가며 욕망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일레인은 달랐다.
그림을 그리면서 키운 날카로운 안목 때문인지, 아니면 아주 어릴 때부터 백작 부인을 대신해 큰살림을 책임져 와서인지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알았다.
‘그리고 또 엄격하지.’
일레인은 자신에게 엄격하기에, 타인에게도 그만큼의 엄격함을 요구했다.
그래서 만약 펠릭스가 부러 신분을 속였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면, 펠릭스를 버리고 말 것이었다.
“일레인, 나는 사생아야. 대공의 사생아.”
그래서 펠릭스는 왜 말할 수 없었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공씩이나 되는 아비에게 존재를 부정당한 비참한 사생아라는 걸, 네게 말하기가 두려웠어.”
“…….”
“그리고 대공 아비를 둔 덕에 나를 죽이려 드는 이들과, 나를 지켜 기어코 후계로 세우려는 이들 사이에서 번잡한 권력 다툼에 휘말려 있다는 건 더더욱 말하기 어려웠어.”
이미 크라몬드 가문이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있으니까. 나까지 무게를 더하게 될 것 같으면 일레인 너는 날 더 꺼려했겠지.
긴 하루가 저물며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찬란하고 쓸쓸한 늦가을의 황혼.
일레인은 태양의 절규 같은 핏빛 노을이 펠릭스가 보이지 못한 아픔인 것처럼 느껴졌다.
자존심이 강한 사내니까, 펠릭스는.
어릴 적부터 그 잘난 외모로 그림 속에 박제되면서 이리저리 음험한 손을 탔던 가여운 아이.
“뭐라고 말을 해 줘, 일레인.”
펠릭스가 긴장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고귀한 백작가의 영애가 이리저리 비참하게 내돌려진 비천한 자신을 용납하지 않을까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페일른 선생님께서 해싱턴 공작가로 돌아가신 걸 보니, 이제 신분을 인정받게 된 것인가?”
어느새 펠릭스의 손을 놓은 일레인이 차분하게 짐작한 사실을 확인했다.
늘 다정하게 격려하던 페일른 선생님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그리고 마틸다 여왕의 알현실에서 산샤 공녀는 페일른 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보란 듯 과시했지.
그러니까 숨어 살아야 했던 펠릭스와 페일른 부인의 처지가 이전과 달라진 일이 생긴 거라고 일레인은 예리하게 유추해냈다.
“마트비아의 바덴니히 대공에게 사자를 보냈었어. 내가 신분을 인정받기 원한다는 메시지를 들려 보냈지. 곧 내가 직접 가서 그 대답을 확인할 것이야. 그런데 일레인.”
펠리스는 일레인의 손을 잡고,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로 들어갔다.
커튼처럼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속은 한밤중처럼 어둡고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