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40화 (40/112)

#제40화. 초상화를 그리라는 왕명

정성스럽게 손질한 여왕의 눈썹이 스윽 치켜 올라갔다.

“너는 백작 부인과는 참으로 다르구나.”

여왕이 감탄하듯 말했다.

무표정하던 일레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표 나게 날카로워졌다.

‘감히 그 입에 내 엄마를 담다니.’

엄마가 평생 그리 우울하게 발작하듯 살게 된 것이 다 누구 때문인데.

왕이 말하는데도 얼굴까지 굳히며 초상화를 그리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는 일레인을 엘리자베스 공주가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맨날 저 남쪽 궁벽한 바닷가 석성에서 그림만 그려서 그런가, 왜 이렇게 궁중 예법에 어두운 거지?”

혼잣말하듯 일레인을 비난한 공주가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노골적으로 일레인을 꾸짖었다.

고작 다이앤과 같은 나이인 어린 공주가.

“우리 브리티나의 군주이신 전하께서 그리라고 하면 그릴 일이지, 감히 왕명이나 부탁이냐를 논해? 백작 부인이 두더지처럼 숨어 사느라 딸 교육을 엉망으로 시켰군.”

여왕에 이어 또 크라몬드 백작 부인, 내 엄마를 비하했겠다!

일레인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공주께서도 귀족을 대할 때의 예법에 대해서 어두우시군요. 고귀한 왕족이라고 해도 귀족 가문의 자제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실 수 없다는 교육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껏 단 한 번도 이렇게 무례한 타박을 들어본 적 없는 엘리자베스 공주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일레인은 여전히 침착하고 태연하였다. 브리티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크기의 영지를 가졌고, 부로서는 첫 손가락에 꼽히는 상사를 가진 가문의 영애니까.

“아무리 공주시라 해도 왕실에서 봉록을 받는 궁중 화가도 아닌 제게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내리실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부당한 명령을 공주께서 내리신 것이 흘러나가면, 다른 귀족 가문에서 어찌 대응할지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이, 이게!”

엘리자베스 공주의 눈동자에 분노가 확 피어올랐다.

그러나 화가 나 씩씩거리는 거 외에 달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일레인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영지를 가진 귀족들은 정해진 세금을 바치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주를 지키기 위해 출정해야 할 의무만을 지녔을 뿐이다.

그럼에도 귀족들이 왕과 왕족에게 예를 갖추어 떠받드는 건 서로 나눠 가진 경제적 이권을 지키고, 사교계를 통해 인맥을 더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좋은 평판으로 서로 이득이 되는 혼맥을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러나 일레인에겐 사교계에서의 좋은 평판이 필요하지 않았다.

‘펠릭스가 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처신하든 저들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왕국 최고의 부를 가진 크라몬드 백작 부인을 조롱했던 자들이다. 그러니 상속권도 없는 백작가 영애를 저들이 어찌 대할지 일레인은 잘 알았다.

고분고분하면 바이올렛 템슨의 여식이라 자격지심에 먼저 숙이고 들어온다고 비웃을 것이고, 오만하게 굴면 역적 템슨 가의 피가 흘러 저렇게 불손하다고 욕을 하겠지.

어떻게 처신해도 좋은 대접을 못 받을 거라면, 마음대로 하고 미움을 받는 게 나았다.

‘그렇다고 죽이진 못할 테니까.’

정당한 명분이 없이 죽이진 못한다.

사교계에서 소외를 시킬 순 있어도 브리티나 해외 무역의 삼 할을 담당하는 크라몬드 가문의 영애를 함부로 죽일 순 없다.

예상한 것과 다른 일레인의 당당한 모습에 싸늘하고 불편한 침묵이 알현실에 내려앉았다.

여왕은 힐끗, 일레인을 싸늘하게 훑은 후 팽 몸을 돌려 왕좌로 향했다.

찬란한 황금빛 드레스 뒤로 군주의 노여움이 길게 따라붙었다.

왕좌에 앉은 여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레인 영애. 나는 그대의 그림이 기특하여 공주와 공녀의 초상화를 그릴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나의 호의를 불온하게 받아들이는군.”

일레인은 여왕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저의 그림을 높게 평가해 주신 점, 깊게 감사드립니다. 하나 저 일레인은 전하의 호의를 받기에는 아직 부족한지라, 돌아가 깊게 반성하며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겠다는 청이자, 앞으로 그림을 그리라는 왕명은 삼가란 청이었다.

그러나 마틸다 여왕은 일레인을 그냥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유럽 최고의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저 그림 속 청년은 잠자리에서도 제우스 신처럼 대단하다지. 제노바의 선대 대공비 율리아가 다시 한번 만나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하다가 급기야 거대한 수도원을 짓고 꼭 한 번만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다던가.

그래서 여왕은 저 초상화를 구실로 펠릭스 페일른을 왕궁으로 불러들일 작정이었다.

그것 외에 또한 더 큰 이유도 있었다.

인질!

윌슨 크라몬드 백작이 해적을 소탕한다는 구실로 제멋대로 일을 벌일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일레인 크라몬드를 왕궁 안에 인질로 잡고 있을 계산이었다.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다, 일레인 영애. 영애는 앞으로 매일 릴리 별궁에 들어 엘리자베스 공주와 산샤 공녀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왕명이다!”

더 이상의 반박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여왕이 주먹만 한 홍옥이 박힌 황금 왕홀을 들어 쿵, 바닥을 내리쳤다.

더 이상 거절하는 건 무리다.

일레인은 깊게 고개를 숙여 왕명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전하. 초상화 그리기에 필요한 안료 등 그림 도구의 목록을 왕실 시종장께 제출해 두겠습니다. 또한 초상화 한 점당 가격으로 오백 파운드를 받겠습니다.”

하!

명을 하니 그리긴 그리겠으니 왕실에서 필요한 안료와 재료를 모두 준비하라는 요구에, 브리티나 최고 화가의 그림값만큼 지불하라는 요구였다.

둘 중 하나라도 거절하면 초상화 그리기로 한 것도 없는 일로 하겠다는 태도였다.

‘누가 최고 상사를 가진 가문의 여식 아니랄까 봐 정말로 계산도 철저하지.’

물끄러미 일레인을 바라보던 여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아버님이 떠나시는 것을 배웅하고 급한 집안일을 처리한 후 사흘 후부터 별궁에 들겠습니다. 공주와 공녀께선 어떤 초상화를 그리고 싶으신지 구상해 두시기 부탁드립니다.”

일레인은 고개를 깊게 숙인 후 알현실을 나왔다.

“일레인 영애, 일레인 영애!”

여러 개의 왕실 건물을 지나 마차가 있는 서궁 쪽 출입문으로 향하는데 마치 후작 부인이 뒤쫓아 왔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건지.

일레인은 돌아서서 어디 한 번 읊어 보란 태도로 마치 후작 부인을 응시했다.

‘한참 어린 게 거만하기 짝이 없군.’

마치 부인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먼저 입을 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후작이 엎드려 빌어서라도 루덴의 상점에 내려진 판매 금지령을 철회한다는 약조를 받아 오라고 단단히 일렀기 때문이다.

“영애. 지난번에 우리 시종이 말을 잘못 전해서 큰 결례를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그 시종은 큰 벌을 받았답니다.”

“무슨 말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일레인은 입궁할 때 펠릭스도 함께 입궁해 달라고 애원하던 마치 후작가 시종의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를 창부 취급한 그 모욕스러운 말을 제 입으로 되풀이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일레인이 싸늘한 표정으로 모른 체하자, 마치 후작 부인은 마음이 급해졌다. 아까 여왕 앞에서도 시종일관 당당한 영애였는데, 자신에게 새삼 아량을 베풀 리도 없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기도 했다.

“영애, 제발!”

후작 부인은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버리고 두 손을 모아 애원했다.

“다, 다 말씀드릴게요. 다!”

“무얼요?”

마치 후작 부인이 좌우를 살폈다. 그러더니 일레인에게 바싹 다가서 빠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여왕께선 펠릭스란 분께 다른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몬토바 공국의 산샤 공녀께선 펠릭스 씨를 연모하고 계십니다.”

“…….”

이미 다 짐작한 내용이었다.

일레인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싸늘하게 서 있자 후작 부인은 정말로 몸이 달았다.

“몬토바 공국에서 펠릭스 씨께 정식으로 청혼을 넣을 생각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펠릭스 씨에게는 미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 합니다.”

“!”

이건 모르던 사실이었다.

펠릭스가 보통의 사내가 아니라는 건 페일른 선생님의 태도에서 짐작하긴 했지만, 대공국의 공녀가 정식으로 청혼할 만큼 대단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펠릭스는 왜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궁금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일레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응시할 뿐 대꾸가 없는 일레인에게 마치 후작 부인은 안달이 났다.

그래서 제풀에 먼저 굴욕적인 제안을 하고 말았다.

“영애. 그림을 그리러 오실 때마다 제가 알아낸 사안들을 넌지시 말씀드릴게요. 제발, 제발 판매 금지령을 거둬 주세요.”

울상을 지으며 얼굴을 찌푸리자 짙은 화장으로도 채 가리지 못한 관자놀이의 멍이 보였다. 마치 후작의 손버릇이 개차반이라더니, 맞고 사는 모양이었다.

‘누가 나보다 앞서 마치 후작 가문을 손보고 있는 거지?’

설마 펠릭스인가.

좀 전에 신분을 밝히지 않아 서운했던 마음이 몽글몽글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펠릭스가 했든 아빠가 움직였든 일레인은 마치 후작 부인을 용서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밟을 땐 확실하게 짓밟아야 한다. 섣부르게 관용을 베풀면 감사하기보단 만만하게 보고 또 덤벼들 테니까.

크라몬드 백작 가문과 펠릭스 페일른을 욕보였다가 노여움을 산 마치 후작 가문이 파산하고 말았다더라!

이런 소문이 나야 왕족과 다른 귀족들이 함부로 대하질 못한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후작 부인. 저는 아버님의 출정을 배웅해야 해서, 이만.”

일레인이 몸을 돌렸다.

“거짓말!”

후작 부인이 분노해 소리쳤다.

“영애의 지시가 아니라면 왜 갑자기 온 루덴의 상점들이 우리 마치 가문에 적대적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영애.”

절망해서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일레인은 무장한 궁궐 수비병을 지나 안나가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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