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39화 (39/112)

#제39화. 관능의 신, 에로스

여왕은 속으로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일레인 크라몬드의 그림은 붓 터치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에로스 신이 입고 있는 울트라 마린 튜닉은 최고급 라피스 라줄리 가루로 만든 안료를 써서인지 정말로 고급스러운 색으로 아름답게 주름져 있었다.

그리고 배경은 꾸덕꾸덕한 깊이감으로 에로스 신이 프시케를 만나 느끼게 된 사랑의 고뇌를 실감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놀란 건 그림 속 인물의 과감한 구도였다.

이제까지 빼어난 그림 속의 관능은 오로지 여인들의 몫이었다. 아프로디테나 여러 여신의 나신을 통해 화가들은 인체가 가지는 관능적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사내를 모델로 그릴 때 관능이 주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똑같이 최소한의 의상을 걸친 그리스 신을 그릴 때조차 기존 화가들이 강조한 것은 신적인 위엄과 장엄한 미였다.

그런데 일레인 크라몬드가 그린 에로스 신은 관능 그 자체였다.

짙푸른 코발트 빛 의상 아래로 드러난 강건한 허벅지와, 보기 좋게 근육이 잡힌 복부가 훤히 보이는 아슬아슬한 포즈.

무엇보다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프시케, 당신을 지키고야 말겠어.’란 굳은 결심이 녹아 있는 눈동자가 유혹적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손을 뻗어 스윽, 저 관능적인 사내의 가슴을 쓸어 보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었다.

여왕은 손톱 장식 호갑투의 뾰쪽한 끝으로 사내의 멋진 가슴 근육을 콕콕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지그시 누르며 다시 물었다.

“여기 청색은 라피스 라줄리 가루로 만든 것인가? 금보다도 더 비싸다는?”

“예, 차이나 위쪽 사막 지대에서 캐낸 청금석 가루에 린시드와 달걀 등 몇 가지 재료를 더 첨가하여 만든 안료입니다.”

“오호, 그래. 참으로 멋진 발색이로고. 으흠, 이 청년의 이름이 펠릭스 페일른이라고?”

여왕이 지나가듯 자연스럽게 에로스 신의 이름을 물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일레인은 말없이 긴장했다.

“예, 제 스승이신 스탠픽셔 님의 아들인지라, 모델을 해 주었습니다.”

“아! 스탠픽셔! 엘렌 해싱턴을 말하는 거겠지?”

“……그것까지는.”

“다 알아. 엘렌 해싱턴이 서신을 보냈거든. 엘렌과는 어릴 적에 꽤 어울려 놀던 친구이기도 했어.”

그렇게 친하게 지내 놓고 네 어미 바이올렛을 위해서 나를 배신했지.

일순 여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해싱턴 공작가의 외손주의 인물이 이리 잘 생겼으니, 산샤가 탐을 내는 것도 당연하구나.”

“?”

여왕이 뜻 모를 소리를 혼잣말처럼 하며 욕망이 담긴 눈으로 핥듯이 펠릭스의 초상화를 보았다.

그때 육중한 마호가니 문이 다시 끼이익 열리며 짙은 장미 향이 훅, 먼저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윽고 화려하게 성장한 여인들이 무더기로 들어왔다.

맨 앞에서 걸어오는 이는 일레인도 궁중 연회에서 몇 번 먼발치로 본 적 있는 엘리자베스 공주였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초록색 나무 이파리가 정교하게 수놓인 암적색 벨벳 드레스를 입은 엘리자베스 공주는 못마땅한 눈으로 일레인을 훑었다.

그 뒤에 들어온 여인은 검은 상복을 입고 머리엔 검은 새털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핏 보면 슬픔에 휩싸인 미망인의 옷이었다.

그러나 아주 얇은 은사와 금사를 검은 비단실에 섞어 짠 다마스크 산 비단 드레스는 움직일 때마다 별빛을 뿌린 것처럼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게다가 목과 가슴을 가리는 용도의 검은 비단 숄은 너무 얇아서 스터커머 위로 풍만하게 도드라진 가슴골을 오히려 훤하게 부각시켰다.

한 마디로 대단히 생동감 넘치는 미인이었다.

그 뒤론 마치 후작 부인과 더비스 남작 부인이 들어왔다.

일행은 모두 드레스 자락을 잡고 무릎을 굽혀 여왕에게 예를 표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고 나서도 일레인은 본체만체였다.

일레인도 무표정하게 여왕 옆에 서 있었다.

‘나이도 많은 것들이 다 유치한 작당이로군.’

예상했던 일이기에 새삼 기분이 나쁠 것도 없었다.

저들이 일레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저희끼리 씹어 대든 일레인은 크라몬드 백작가의 여식이었고, 여왕도 감탄하는 그림 실력을 가진 화가였다.

게다가 며칠 후엔 아메리카 인의 이름을 내세운 차명 회사를 통해 저 여인들 재산을 다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의 재산을 이전받게 된다.

막대한 부와 화가로서의 명성, 그리고 펠릭스의 사랑까지 다 가지게 된 나, 일레인 크라몬드가 쫄 이유가 뭐가 있다고.

일레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어깨를 쭉 폈다.

한편으론 새삼 온통 적의와 멸시를 담은 시선 속에 덩그러니 홀로 서 있었을 엄마 생각에 일레인은 가슴이 찔린 듯 아팠다.

“산샤, 어릴 적에 펠릭스를 보았었다지?”

여왕이 검은 드레스의 미인에게 물었다.

‘산샤라. 소국 몬토바 공국의 공녀로군. 이웃 나라 왕과 혼인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 삼 년 전이었는데, 벌써 과부가 되었나? 여왕과는 무슨 관계지?’

일레인이 머릿속으로 유럽 왕실의 복잡한 혼맥을 따져 보는 사이, 여왕의 물음을 받은 산샤 공녀는 흰 대리석처럼 매끈한 피부를 붉게 물들이며 꿈꾸듯 눈빛을 빛냈다.

“예, 전하. 여덟 살 때 스탠픽셔 님이 아버님과 어머님, 우리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려 우리 상드베 궁에 머물렀어요. 그때 그의 여동생 엘리노어와 펠릭스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무척 친하게 지냈습니다.”

‘엘리노어’란 이름에 일레인은 산샤 공녀를 바라보았다. 펠릭스가 지금까지도 몹시 죽은 누이를 그리워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레인이 바라보자 산샤 공녀도 일레인과 시선을 맞추며 수줍게 웃었다.

“스탠픽셔 님이 일레인 영애 칭찬을 많이 하셨어요. 모델이 가진 아름다움의 특질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아주 빼어난 색채로 멋지게 그리는 분이시라고요.”

산샤가 스승 페일른 부인의 칭찬을 전했다.

일레인은 뭔가가 마음에 걸리면서도 일단 기뻤다. 그림으로 인정받는 것이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였기에.

그러나 다음 말에 일레인의 기쁨은 와장창,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스탠픽셔 님이 그래서 저의 초상화를 그릴 화가로 일레인 영애를 추천하시더라고요. 펠릭스와 아주 잘 어울릴 장차의 배우자니, 그림도 기왕이면 같은 화가가 그리면 좋겠다고요.”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되지도 않는 말을 들을 때면 그러하듯 일레인은 일단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마치 부인이 기회를 놓칠세라 화다닥 끼어들었다.

“그렇지요, 산샤 공녀님. 펠릭스 님과 참으로 잘 어울리는 미모를 지니셨으니, 초상화가도 같은 이를 쓰는 것이 좋겠지요.”

마치 후작 부인은 지난 날 필론 하우스에서 펠릭스를 걸고넘어졌다가 당한 혹독한 수모를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듯 일레인을 계속 힐끔거리며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저 부인을 손봐준다는 걸 잊고 있었네.’

왕궁에 가지고 입궐할 그림을 마무리하느라 마치 후작 가문을 손보는 걸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일레인은 싸늘하게 후작 부인을 훑었다.

‘너는 짖어라. 같잖아서 상대도 하기 싫으니.’

이렇게 말하는 듯한 일레인의 태도에 마치 후작 부인은 속이 바짝 타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왕의 불독’이란 별명에 걸맞게 일레인을 갈가리 물어뜯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사무쳤다.

“어쩌지요? 겨울 성탄 연회와 신년맞이 연회용 드레스 주문이 꽉 차 있어 올해 말까지 주문을 받을 수가 없답니다.”

열흘 전, 새 드레스를 맞추러 갔더니 의상실의 주인 발렌시아가 한 말이었다.

다른 최고급 의상실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급을 낮춰 맞췄더니 옷 마름질이 엉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식탁에 오르는 고기 요리에서 냄새가 심하게 났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집사를 족쳤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요새 루덴에 물자가 부족하다면서 식재료 상에서 이런 것밖에 내놓질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루덴의 도매상에 은밀하게 말이 돌고 있다고 한다.

“마치 후작가에 물품을 공급하는 자는 크라몬드 상사의 수입품을 받아갈 수 없다!”

“마치 후작가에 물품을 공급하거나 돈을 대부해 주는 업체는 골든우즈 투자회사의 자문을 받을 수 없다.”

마치 후작 부인이 함부로 입을 놀린 것에 격노한 크라몬드 백작이 금권을 동원해 마치 후작 가에 본때를 보여 주기로 작정했다는 말이었다.

마치 부인은 속이 탔다.

‘백작 부인이 무시당할 때는 가만히 있던 백작가에서 새삼스럽게, 왜?’

왜 그 어린 것 하나 무시했다고 백작이 이렇게 나온다더냐.

일각에서 이 일은 백작 부부의 의지라기보단 당사자인 일레인 영애가 직접 지시한 일이라고도 수군거렸다. 그러면서 크라몬드 가문의 노여움을 살까 봐 마치 후작과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마치 후작은 대체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래 새파랗게 어린 것한테 이런 개망신을 당하냐고 또 주석 잔을 집어던졌다.

그러니 마치 후작 부인은 오늘 입궐하면서 분노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두렵기도 했다.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지만, 섣불리 나섰다간 지난번처럼 된통 망신만 당하고, 또 경제적 불이익이 커질까도 두려웠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레인 영애의 표정은 여왕 앞에서도 초연하게 무표정했다.

“일레인 영애의 그림을 보니, 짐이 우리 엘리자베스 공주와 조카 산샤 공녀의 초상화를 부탁하고 싶어졌는데. 둘을 탐내는 각국의 왕실에서 초상화를 보내 달라고 성화여서.”

산샤 공녀나 마치 후작 부인이 한 말은 듣지 못한 양 마틸다 여왕이 일레인에게 명했다.

“…….”

일레인은 공손한 표정은 지었으나 대답을 올리진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붓질도 꿈틀거리듯 힘이 넘치더니, 배짱이 보통이 아니군.’

여왕은 새삼 흥미로운 눈으로 일레인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 일레인이 공손하게 물었다.

“왕명이십니까, 아니면 부탁이십니까?”

공손하되 결코 숙이지 않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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