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37화 (37/112)

#제37화. 크라몬드 백작의 사랑

“선생님, 꼭 모셔 가고 싶었는데…….”

여왕의 명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가르침이 정말 필요하다고 일레인은 거듭 요청했었다.

그러나 페일른 부인은 해싱턴 가로 돌아가 건강을 살피기로 했다며 일레인의 동행 청을 완강하게 거절했었다.

일레인의 포옹에 함께 힘주어 껴안으면서 페일른 부인이 조언을 건넸다.

“일레인. 눈과 손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네 눈은 인물의 특성을 잘 잡아내니까. 네 자신을 믿어.”

말은 안 했지만 엘렌 페일른은 이것이 스승과 제자로서 일레인과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해싱턴 가로 돌아가는 이유가 이제 펠릭스가 정체를 드러내도 안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렌은 당당하게 해싱턴 공작가로 돌아가 공작과 함께 펠릭스와 몬토바 산샤 공녀와의 혼인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레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엘렌은 위기감을 느낀 일레인이 펠릭스와 더욱 적극적으로 가까워질까 두려움에 말을 하지 않았다.

온통 일레인으로 몸과 마음이 꽉 찬 펠릭스는 산샤 따위를 떠올리지도 못했다.

또한 크라몬드 백작 부부는 다이앤의 혼사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데다,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일레인이 벌써 혼사를 정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라 입을 다물었다.

“예, 선생님. 제가 멋진 인물화를 그리고 있을 터이니 루덴으로 오셔서 꼭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건강하셔야 해요!”

엘렌의 속을 모르는 일레인은 변함없이 페일른 부인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했다.

‘일레인, 너의 이 다정함이 나를 참…….’

마음 아프게도, 곤란하게도 하는구나.

“일레인, 나중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되건 이거 하나는 반드시 기억하렴. 너의 재능은 흔치 않은 것이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림을 포기하지 말거라.”

이것이 엘렌 페일른이 제자 일레인에게 마음을 담아 해 준 마지막 조언이었다.

“일레인, 어머니 모셔다 드리고 곧 따라갈게.”

펠릭스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거센 눈보라가 치는 틈을 이용해 재빨리 일레인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추운 날, 열정을 담은 입술은 유난히 더 뜨겁고 자극적이었다.

“내가 뒤에서 지키고 있을 테니까 당당해야 해, 일레인.”

속삭인 펠릭스가 페일른 부인과 함께 먼저 마차로 해싱턴 가문으로 출발했다.

일레인은 스승과 펠릭스를 태운 마차가 거센 눈속의 세상으로 마법처럼 빨려 들어가는 걸 오래 바라보았다.

이윽고 일레인도 아빠 윌슨 크라몬드와 마차에 올랐다.

마차에 오르기 직전 일레인은 필론 하우스 본채의 3층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다이앤의 얼굴을 보았다.

표정 없는 창백한 얼굴이 눈 속에서 유령처럼 떠올라 있었다.

이윽고 마차는 눈을 헤치며 느릿느릿 나갔다.

심한 바람에 굵은 눈송이가 시야를 가려 건장한 말들도 불만스러운 듯 히잉잉 울며 힘겨워했다.

“일레인, 엄마에게도 말해 두었는데 말이다.”

백작이 일레인의 발에 커위 털로 속을 채운 담요를 꼼꼼히 감아 주다 문득 말했다.

“11월이 가기 전에 루덴으로 아라구완 왕자가 올 것이다. 다이앤과 잘 마음을 통할 수 있도록 신경을 좀 써 주련?”

“아! 다이앤의 혼사가 드디어 정해진 것인가요?”

“다이앤만 좋다면, 내년 봄에 혼인을 하게 하려고 그런다.”

무거운 짐을 벗은 것처럼 윌슨히 홀가분하게 웃었다.

이 혼사를 성립하게 하기 위해서 이번에 되찾은 무역선 다섯 척 중 두 척의 배를 아라구완 왕국에 먼저 선금으로 넘기기로 했단 말은 하지 않았다.

다이앤이 원하는 혼사를 이뤄줄 수만 있다면 윌슨 크라몬드에게 재산의 한 귀퉁이를 헐어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레인, 내가 네게 넘길 채권과 주식, 금궤 중 삼 할은 다이앤의 지참금이다. 그러니 펠릭스에게서 차명 거래에 대해 잘 익혀 두어야 한다.”

“예…….”

일레인은 그러나 백작만큼 낙관적이지 않았다.

다이앤이 아라구완처럼 작고 가난한 나라의 왕자, 그것도 왕위 계승권이 없는 셋째 왕자와의 혼인을 달가워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 인연은 모르는 것이니. 나도 평민 펠릭스를 장차의 배우자로 받아들이겠다 마음먹지 않았는가.

소문에 그 셋째 왕자 짐머 전하는 사람이 참 친절하고 따스하다고 들었다. 그러니 아름다운 얼굴로 온갖 관심을 다 독차지하면서도 이따금 배고픈 개처럼 애정에 허기진 표정으로 표독스럽게 날을 세워 대는 다이앤을 포근하게 감싸 줄 수도 있으리라.

미울 때가 많아도 결국 피를 나눈 자매.

일레인은 다이앤이 어서 행복을 찾아 자신만의 따스한 가정을 꾸릴 수 있길 펑펑 시야를 가득 채운 눈에 빌었다.

마차 밖은 온통 순백의 세상이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눈송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새 또 무릎 높이로 쌓인 눈 때문에 마차는 느리게 느리게 앞으로 나갔다.

펑펑 쏟아지는 눈에 자칫 길을 잃을까 걱정이라고 두런거리며 어깨와 머리에 내려앉은 눈을 탁탁 털어내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최근 들어 적이 많아진 크라몬드 백작을 지키기 위해 마차는 칼과 총신이 짧은 머스켓 등으로 무장한 서른 명의 기사에 둘러싸인 채 달려가고 있었다.

“일레인, 춥다. 물주머니 더 줄까?”

여우 털로 꽁꽁 감싸 오히려 약간 땀이 날 지경인데도 백작은 여전히 일레인이 추울까 안절부절 못했다.

이렇게나 다정한 아빠가 어떻게 엄마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일레인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빠, 아빠는 엄마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셨어요?”

엄마는 아빠야말로 생의 구원자였다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노라고 지난 번 말씀하셨다.

만신창이로 삶이 망가진 엄마에게 아빠의 손길은 정말로 구원의 밧줄과 같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는.

엄마로 인해 가문과 가업이 위험에 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엄마와 함께 하기로 한 결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펠릭스의 구애를 받아들여도 되는가 고민하는 동안 일레인은 그 점이 정말 궁금했었다.

가문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샬럿 고모가 권유하신 대로 윌리엄 오라버니나 다른 유력 가문의 영식과 혼인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일레인의 물음에 백작은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바이올렛은 어릴 적부터, 정혼하기 전부터도 가진 것 중에서 최고로 좋은 걸 늘 날 주려고 했어. 내가 쓸 수 없는 것인데도 최고의 것은 늘 날 주었지. 그래서 아빠 방의 금고에는 늘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이며 블루 사파이어 목걸이가 가득이었지.”

창밖의 눈을 바라보는 백작의 목소리에 뿌듯한 애정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소녀가 남몰래 건네는 선물에 가슴 설레던 감동의 십 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자기에게 가장 값진 걸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람을 내가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지금도 너의 엄마는 내게 늘 좋은 것만 주려고 애쓰잖니.”

아빠가 먼저 엄마에게 믿음을 주셨겠지. 내가 가진 최고의 것을 주면 천 배, 백 배 더 좋은 것으로 보답해 주리라는 믿음.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베푼 것보다 남이 베풀어 준 걸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하지만 그 말은 뿌듯해하는 아빠의 얼굴 앞에서는 할 수 없었다.

“너는 왜 펠릭스의 구애를 받아들인 것이냐?”

갑자기 백작이 일레인에게 질문을 돌렸다. 일레인은 뜨끔하여 볼을 붉혔다.

“아, 알고 계셨어요?”

“사랑은 숨기지 못한단다, 일레인.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설렘과 애정이 깃들어 있거든.”

그러니까 일레인의 눈빛에서 표시가 났다는 말씀이었다.

“…….”

아무리 친밀한 부녀 사이라고 해도 애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건 왠지 부끄러웠다.

일레인은 한참 입술만 벙싯거리며 얼굴을 붉히다가 마차 바퀴 소음에 묻힐 정도로 작게 말했다.

“잘생겨서요. 평생 펠릭스만 그려도 그릴 소재가 무궁무진 할 거 같아요.”

“으하하핫!”

백작은 어깨까지 들썩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일레인의 코를 툭 건드리며 놀렸다.

“누가 아빠 딸 아니랄까 봐 인물을 꽤 밝히는구나!”

그러고는 일레인의 어깨를 끌어안고 창밖의 눈을 함께 바라보았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부녀 관계 외에도, 함께 크라몬드 가문을 책임지고 있다는 동지 의식이 부드럽게 두 사람을 감쌌다.

한참의 침묵 후, 백작이 문득 말했다.

“리스본에서 펠릭스가 너를 마음에 담았다고 말하더구나. 그때 나는 반대했었단다, 일레인.”

“!”

뜻밖의 말에 일레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펠릭스를 아끼시잖아요.”

모두에게 친절한 아빠지만, 펠릭스를 바라보는 눈빛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같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 아빠가 펠릭스를 거절했다니. 의아함이 앞섰다.

“아들처럼 생각하는 건 사실이야, 일레인. 그러나 펠릭스는 지나치게 뛰어나고, 복잡한 신분을 가지고 있어. 원치 않아도 자꾸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밖에 없지.”

“…….”

“그렇지만 너도, 또 펠릭스도 주변에서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들이냐? 그래서 아빠는 그저, 우리 딸이 원하는 대로 응원할 거란다.”

자식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 주는 것.

이것이 크라몬드 백작의 사랑이었다.

“일레인, 네게만 무거운 짐을 지워 미안하지만, 아빠가 없을 때 엄마와 다이앤을 잘 보살펴다오.”

얼마 전부터 무언가 큰일이 다가오고 있단 예감에 사로잡혀 있는 백작은 이날 일레인에게 바이올렛과 다이앤을 거듭거듭 부탁했다.

이날의 마차 여행은 일레인에게 아주 오랫동안 그립고 따스한 기억으로 남았다.

커튼을 들추면 사각의 창밖으로 하얀 세상이 몽환적으로 펼쳐졌다. 밖은 윙윙, 매섭게 울부짖는 바람 소리로 가득했지만, 마차 안은 아빠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따뜻하고 훈훈했다.

일레인은 나중에 이날의 풍광을 거듭거듭 그렸다.

때론 온통 새하얀 눈길에, 짙은 밤색으로 빛을 내는 호화로운 마차가 달려가는 풍광이기도 했고.

때론 창밖으로 흰 눈이 펑펑 내리는데, 마차 안에선 중년의 아비가 앞에 앉은 딸의 어깨에 흰 여우털 망토를 단단히 여며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보통 루덴까지 네 시간 걸리는 길이, 이날은 눈 때문에 거의 열 시간 가까이 걸렸다.

일레인과 크라몬드 백작이 루덴 외곽 포르투나 하우스에 들었을 땐 이미 깊은 한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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