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36화 (36/112)

#제36화. 사생아 펠릭스가 아비에게

여기서 애송이 펠릭스의 이름이 왜 나오는가.

리브 공작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그러자 골든우즈가 손뼉을 짝 치며 여유롭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된 거, 뭐, 그냥 밝히겠습니다. 대공 전하, 대공비 전하께서 그리 죽여 없애시고 싶어 하신 펠릭스 페일른 씨가 바로 진짜 조나단 골든우즈십니다.”

“?”

“??”

“???”

너무나 뜻밖의 말을 들으면 뇌가 제대로 정보를 처리하지 못하는 법이다.

대공과 대신 둘은 방금 들은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멍하니 늙은 아메리카 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마트비아에서 줄곧 실력도 없는 거지같은 것들을 보내 죽이려 들었던 대공의 사생아, 펠릭스 페일른이 골든우즈 사의 실질 소유주란 말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그게 어떻게 가능하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오토 폰 바덴니히가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혹시 그 아이를 위해 거짓을 말하는 거라면, 골든우즈 씨!”

“아니, 아닙니다. 제 이름은 조나단 골든우즈가 아니라 보스톤 소극장에서 일하던 헨리 아셔입니다. 워낙 바쁘신 데다가 신변의 위협 때문에 별로 위험하지 않아도 혹시나 해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셔야 했던 펠릭스 님을 위해 골든우즈 투자사 대표를 연기해 온 것뿐이지요.”

덕분에 참으로 화려하게, 어딜 가나 왕과 왕비, 대공에게 국빈 대접을 받으면서 어여쁜 귀족 여인들을 끼고 잘 살아왔는데.

이제 이 생활도 끝이 나는가.

헨리 아셔가 아쉬운 손길로 대공이 입고 있는 예복보다 더 비싼 자신의 벨벳 코트를 쓰다듬을 때.

바덴니히 대공은 멍한 머리를 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고작 스무 살짜리 아이가, 제대로 된 신분도 없이 해싱턴 공작의 은밀한 지원만 받고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큰 철광석 광산 하나와 석탄 광산 두 개, 프로이센 국채 상당량에 또…….

낳았다는 말만 듣고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던, 아니 그냥 살려 두려고 하지 않았던 사생아가 가진 재산을 헤아려 보다가 대공은 포기하고 말았다. 굴욕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철광석 광산 하나만으로도 자신보다 펠릭스가 훨씬 부유했다.

씨만 주었을 뿐 돌보지도 않은 아들이 홀로 일군 재산이 공국 재산의 몇 배나 된다니.

다른 두 대신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투자 수완이 남달리 빼어난 투자가 정도로 알고 있던 펠릭스 페일른이 마음만 먹으면 마트비아 같은 소국의 재정을 마구 휘저을 수 있는 대부호라니.

“자자! 사실을 밝혔으니, 펠릭스 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펠릭스 님께선 조만간, 음, 루덴에서 급한 일을 마무리 짓고 친히 마트비아에 납시실 것입니다.”

“펠, 펠릭스가 온다고?”

“예, 직접 오셔서 국채 투자 여부를 의논하실 것이에요. 그러니 어떤 조건으로 투자를 유치하실지 미리미리 계획을 잘 짜놓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프로이센에서 오는 길이 아닙니까? 참고로 프로이센 대공께서는 향후 3년간 분기별 4 퍼센트의 이자를 약속하셨습니다.”

분기별 사 퍼센트면 년 십육 퍼센트의 이자다.

보통 국채 이자율이 연 십 퍼센트에서 십이 퍼센트인데!

마트비아의 재정으로는 그런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설마 아비의 나라에까지 저 고리대 같은 이자를 물리진 않겠지요. 허허헛.”

아들로 인정한 적도 없고 오히려 죽여 없애려고 했으면서 마트비아의 대공은 제멋대로 벌써 흐뭇한 마음으로 아비된 덕을 누리고자 했다.

“!”

돈 많고 마음씨 좋은 노인네 같이 웃음 짓고 있던 헨리 아셔의 눈이 일순 경멸의 빛을 띠고 대공을 훑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하는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리브 공작에게 말했다.

“거기 서신을 보시면 대공비께서는 앞으로 우리 펠릭스 님께 암살자를 보낼 생각을 꿈에서라도 하지 않으실 것이라 믿습니다. 만일 단 한 명의 암살자라도 추후 발견된다면!”

헨리 아셔의 얼굴이 노여움에 떠는 늙은 왕처럼 엄숙해졌다.

“마트비아가 어찌 될지는 잘 아시겠지요?”

리브 공작의 얼굴이 벌게졌다. 어찌 될지 너무 잘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골든우즈 사의 투자가 절실한 나라들이 마트비아에게서 등을 돌리겠지. 신대륙에서 들여오는 물품의 수급도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대공비께 잘 전달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리브 대공은 일단 허리까지 머리를 깊게 숙이며 약속했다.

“그 서신, 이리 줘 보게!”

바덴니히 대공이 리브 공작의 손에서 펠릭스의 서신을 낚아챘다.

붉은 비단 천을 벗기니 차이나에서 수입해 온 것이 분명한 미색의 고급 종이봉투가 나왔다.

앞면에는 펠릭스 페일른이란 이름이 아름답게 필기체로 적혀 있고, 뒷면에는 P.F란 직인이 찍힌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대공비께서 먼저 보셔야…….”

“어허! 대공비가 상의도 없이 내 아들을 죽이려 들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 믿고 내가!”

하!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어떤 때는 일급 암살단을 넌지시 알려주기도 했으면서.

리브 공작은 대공의 얄팍함에 욕지기가 났지만, 지금은 배신감을 표시할 때가 아니었다. 칼 대공자를 지켜서 대공직에 올리려면 사소한 풍파는 무시하고 넘어가야 했다.

“내가 봐도 괜찮지, 경?”

바덴니히 대공이 헨리 아셔에게 물었다.

헨리 아셔는 어깨만 들썩거려 보였다.

집안싸움이야 뭐, 당사자들끼리 알아서 정리하시지요. 그런 뜻이었다.

대공은 밀납 봉인을 뜯어내고 서신을 펼쳤다.

우아한 필체로 쓰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공의 후계가 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니, 제게 암살자를 더 보내지 마십시오. 어릴 적에도 성공하지 못한 시도가 이제 와서 성공하겠습니까.

한 번만 더 암살자를 보내면 대공비께서 아들 칼 공자의 비자금을 만들어 줄 목적으로 투자한 겔루 철강 회사, 아인샤 상선 등의 주식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공비와 후계 칼 대공자를 알거지로 만들겠다는 협박이었다.

오호라.

깜찍하게도 대공비가 내 등 뒤에서 이런 수작질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편지를 도로 리브 공작에게 건네며 대공이 기분 좋게 웃었다.

늘 소국의 대공이라 주변국 왕과 대공에게, 그리고 마누라한테까지 무시당해 왔는데.

“아, 아! 내 아들 펠릭스가! 내 아들이, 나의 장자가!”

내 아들이 신대륙에 석탄과 철광석 광산을 세 개 소유하고 있는 광산 거부에, 유럽 최고의 투자 회사의 대표란 말이다, 이놈들아!

바덴니히 대공의 어깨가 절로 치솟았다.

‘얄팍하군. 펠릭스 님이 왜 대공의 후계 따위, 되고 싶지 않다고 하셨는지 알 것 같아.’

저런 게 아비라면 자신이라도 굳이 연을 맺고 싶지 않을 터였다.

헨리 아셔는 입을 쩝쩝 다시곤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 어릿광대는 이만 물러갑니다. 저는 펠릭스 님의 이름으로 또 투자를 유치하고자 하는 나라들을 방문해야 해서!”

모자를 벗어 허리에 대고 인사를 한 헨리 아셔가 늙은이 같지 않은 경쾌한 걸음으로 춤을 추듯 입구를 향해 나갔다.

“잠깐! 내 물어볼 것이 있네.”

바덴니히 대공이 아셔를 불러 세웠다.

“내 아들 펠릭스는 이런 재주가 있는데 왜 지금에서야 서신을 보낸 것인가?”

그거야 당신이랑 얽히기 싫어서지.

그런 말을 할 수 없어서 헨리 아셔는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건 펠릭스 페일른 님께 직접 들으시지요. 저 같은 대리 나부랭이가 그분의 심오한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

헨리 아셔는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굽을 대고 빙글, 우아하게 돌아 시종이 열어 준 문을 당당히 걸어 나갔다.

* * *

다이앤에게 생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근심하다 잠깐 눈을 붙였다 떴더니 때 이른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10월 중순인데 벌써 눈보라라니!

“아가씨, 마차에서 좀 주무세요. 얼굴이 너무 창백하세요.”

안나가 흰여우 털로 만든 망토와 모자를 씌워 주며 눈 아래가 시커멓게 물든 일레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수잔한테 다이앤을 각별하게 모시라고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해 둬. 혹시나 조지 그 개놈이 다시 연락하는 일이 있게 두어선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른 일레인은 먼저 마차로 향했다.

눈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백작과 일레인은 침대에서 빵과 차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출발하는 참이었다.

담비 털로 만든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바이올렛이 뒤따라 나오며 코맹맹이 소리로 외쳤다.

“일레인, 엄마도 곧 갈 거니까 여왕 앞이라고 너무 긴장하지 말아.”

“네, 엄마. 걱정 마세요.”

일레인에게 인사를 한 바이올렛은 새벽에 수없이 나눈 키스를 다시 또 크라몬드 백작과 나누며, 또 수없이 되풀이한 인사를 다정하게 속삭였다.

“여보. 곧 따라갈게요.”

아빠도 엄마를 힘껏 끌어안고 무어라 한참 다정하게 말했다.

지난 사흘간 밤낮으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도 여전히 애틋한 백작 부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샬럿 고모도 손을 흔들었다.

“일레인, 곧 보자!”

음흉한 꿍꿍이를 품고 조카를 불러들이는 여왕을 견제하기 위해 샬럿 후작 부인도 바이올렛과 함께 루덴의 포르투나 저택으로 올 예정이었다.

일레인은 엄마와 고모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펠릭스 옆에 서 있는 페일른 부인을 힘껏 포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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