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34화 (34/112)

#제34화. 사랑만 받은 것들의 한계

“펠릭스, 아악, 펠릭스! 그래선 안 된다!”

냉정한 펠릭스의 말에 엘렌이 악을 썼다.

“어머니, 마트비아 같은 소국의 대공은 국내 귀족의 눈치를 봐야 하고, 강대국 사이에서 늘 치이기만 하는 골치 아픈 자리예요. 권력은 작고 의무만 주렁주렁 어깨에 짊어졌다고요.”

모두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죽음을 앞둔 엘렌에겐 지난 평생의 삶을 부정하라는 잔인한 요구나 다름없었다.

“일레인은 네 초상화를 그려준 화가야. 네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하게 컸는지 네 아비에게 보여 줄 빼어난 솜씨의 초상화가. 그 이상도, 그 이하여서도 안 된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엘렌이 소리쳤다.

“어머니!”

“안 돼, 펠릭스! 내가 죽기 전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일레인과는, 안 된다!”

그럼 차라리 죽으시든가요!

왜 어머니는 끝까지 자식들의 삶을 손에 쥐고 흔들려고만 하십니까.

“크라몬드 백작께선 나를 사위로 맞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시면서 무어라 하셨는지 아십니까?”

분노와 허탈과 죄책감과 연민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펠릭스가 외쳤다.

“일레인의 그림이 대담하고 자유로워서, 감히 일레인의 그림 세계를 헐뜯지 못하게 해 줄 배경의 남자가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백작은!”

“그야, 윌슨은 가문이고 뭐고 제 사랑만 찾던 칠푼이니까 그렇지!”

“그 사랑이, 그 배려가 일레인 같은 여인을 키워냈다고요, 어머니. 야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만 자식을 이용해 온 어머니와 달리요!”

“내가 뭘 너를 이용했다고! 내 그림 덕에 네게 많은 귀족 여인들이 투자를 결정한 것이 아니냐? 내 그림 덕에!”

“그게 어머니로서 하실 말씀입니까? 하아, 삶은 살아온 대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라지요. 어머니도 이제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에 따라 이렇게 커버린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거침없이 통보한 펠릭스가 휙, 절망에 빠진 엘렌을 남겨 두고 방을 나갔다.

* * *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 보세요.”

한밤중, 안나가 조심스레 일레인을 흔들어 깨웠다.

“으응? 무슨 일이야?”

날이 밝으면 아빠와 함께 루덴으로 떠나기로 한 터라 늦게까지 짐을 챙기다 겨우 잠든 참이었다.

그래도 일레인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오랫동안 크라몬드 가문의 안살림을 책임져 오며 몸에 붙은 습관 덕분이었다.

“다이앤 일이야?”

“…예, 아가씨.”

일레인은 곧바로 일어나 슈미즈 위에 목에서 발목까지 끌리는 담비털 망토를 걸쳤다.

“가서 이야기하자.”

안나가 먼저 작은 응접실을 지나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고 인기척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 안나가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내린 깜깜한 복도를 천으로 가린 등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 소리 없이 재게 발을 놀렸다.

다이앤의 거처는 일레인의 침실 바로 위인 삼 층에 있었다. 일레인의 거처와 같이 침실과 작은 응접실, 옷을 입고 꾸밈을 받는 뚜왈레트 실이 있는 꽤 넓은 처소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다이앤의 처소가 난장판으로 흐트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장식용 도자기란 도자기는 죄다 산산조각이 나 있고, 연지 통과 분 통도 내용물을 쏟은 채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조지 크라몬드 님과 몸싸움을 벌였다고 해요.”

안나가 재빠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조지는?”

“마구간에서 말 훔쳐 내 도망갈 준비 다 해 놓고 여기로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일레인은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뷰컴 씨한테 일러 조지를…….”

‘죽여 버리라고 해. 죽여서 아무 데나 파묻어 버리라고 해.’ 본심을 말하고 싶어 움찔거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 크게 후흡 거칠게 숨을 뱉어 낸 일레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지한테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정말로 죽을 줄 알라고 이르고, 사람 붙여 놓으라고 해. 허튼소리 꺼내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건 목을 분질러 버릴 수 있는 건장한 사람으로. 돈은 아끼지 말라고 하고.”

단순한 몸싸움이었든 그 이상의 일이었든 한밤중에 건장한 사내,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삼촌과 이 난리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어 나가면 다이앤은 끝장이었다.

“수잔!”

일레인은 다이앤의 수석 하녀 수잔을 불렀다.

입술이 터지고 여기저기 검푸르게 멍든 얼굴로 수잔이 벌벌 떨며 일레인 앞에 엎드렸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저, 저는 모릅니다. 잠에 취해 있었는데 다, 다이앤 아가씨께서…….”

그러니까 심하게 맞은 얼굴은 조지가 그런 게 아니라 다이앤이 해 놓은 짓이라는 뜻이었다.

또한 저렇게 심하게 온 얼굴을 쥐어뜯을 정도라면 다이앤에게 별일은 없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휴우.

어쩔 수 없이 안도감이 들었다.

다이앤에게 배정된 하녀는 지근거리에서 언제나 수발을 드는 수잔 외에도 청소 담당, 드레스 담당, 장신구 담당 셋이 더 있었다.

그들은 다행히 다이앤과 한 공간에 머물지 않고 하녀들 처소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오늘 일은 수잔과 일레인, 그리고 안나만 입을 다물면 그럭저럭 숨기고 넘어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오늘밤 일이 새어 나가면 너도 죽은 목숨이야. 알지?”

“예, 예! 아가씨! 알아요.”

수잔이 흐느끼며 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일레인은 망토 안에 달린 작은 비단 주머니에서 십 파운드 금화 다섯 개를 꺼냈다.

“이걸로 얼굴 치료하고. 이따 안나가 돌아오면 둘이서 치우거라. 잔해는 눈에 안 띄게 잘 처리하고.”

수습을 명해 놓고서야 일레인은 다이앤이 있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

다이앤은 불도 안 켠 채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거위 털로 속을 채운 두꺼운 이불을 덮은 채 창밖으로 새어든 달빛에 얼굴을 내놓은 다이앤은 동화 속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았다.

“안 자는 거 알아. 일어나.”

일레인의 말에도 다이앤은 미동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아야 수습을 하지.”

“푸흡.”

비웃음이 핏기 잃은 다이앤의 입술에서 비져나왔다.

“네가 펠릭스와 안고 비비는 건 괜찮고 내가 하는 짓은 수습해야 할 일이니?”

“다이앤! 조지는, 삼촌이야!”

죽여 마땅한 망나니 같은 놈이지만, 삼촌은 삼촌이라고!

일레인의 말에 다이앤이 몸을 일으키며 팽, 화를 냈다.

“제때 말리지 않은 수잔 년을 족쳐야지, 왜 나한테 시비야.”

아무도 모르게 문을 열어 준 것은 자신이면서도 다이앤은 또 수잔 탓을 했다.

일레인의 시선이 다이앤의 목과 어깨를 훑었다.

울긋불긋 흔적이 가득한 목 아래 잠옷은 우악스럽게 찢겨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일레인은 다이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겁탈당한 거야?’

물어보고 싶지만 그렇다고 할까봐 일레인은 감히 확인하지 못했다.

순결을 잃은 여인은 가문의 수치가 된다. 그러니 설사 그 죽여 버려야 할 놈이 다이앤을 겁탈했다고 해도 대놓고 추궁할 수 없다.

일레인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종류의 일에 나서야 할 엄마 바이올렛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발작적인 울음으로 문제만 더 키우겠지.

아빠는…….

조지를 죽이려 드실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추문은 퍼지고 말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없는 일로 만들 수 없다.

일레인은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길게 음영진 긴 속눈썹이 가련하게 떨리고 있었다.

같은 여자로서, 이런 개 같은 일은 벌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비난받을 개놈은 조지고, 다이앤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

“다이앤, 내가 수습할게. 걱정 말고 쉬고 있어. 히비스커스에 꿀을 좀 넣어 가져올게. 놀랐을 테니, 쉬고 있어.”

일레인의 위로가 뜻밖이었는지 날카롭게 번득거리던 눈동자가 스르르 풀렸다.

뜻 모를 의미를 담고 일레인을 바라보는 다이앤의 푸른 눈동자에 불현듯 말간 눈물이 차올랐다.

입술을 떨던 다이앤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 일까지는 없었어. 목 주위를 빨았을 뿐이야.”

순결까진 잃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다행이다!

안도감에 다리에서 힘이 빠진 일레인이 순간 휘청거렸다.

침대 머리를 잡고 몸을 일으키며 일레인은 연민 가득한 눈으로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차 가져올게, 언니.”

“아니야, 그냥 잘래. 지쳤어.”

“…그럼 쉬어, 언니. 수잔한테 새 잠옷 가져오라고 말해 둘게.”

문을 향해 걸음을 떼던 일레인이 다시 몸을 돌렸다.

“다이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걱정하지 말고 푹 자.”

다이앤은 친절하게 위로한 후 돌아서는 일레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사랑만 받고 자란 것들이란!’

사랑 받고 귀하게 대접 받아온 것들은 때로 없는 피해를 거짓으로 지어내는 사람이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함부로 연민하고 쉽사리 속아 넘어가지.

다이앤은 일레인을 비웃으며 눈을 감고 다리 사이에 손가락을 대었다.

아흐.

조지의 손길에 흥분했을 때의 감각이 일시에 되살아나 몸을 후끈 달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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