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33화 (33/112)

#제33화. 아들의 발목을 잡아서라도

“흥, 마치 후작 부인이 보는 눈은 있구나. 펠릭스를 여왕의 침실로 들여보내 총애를 더욱 얻고 싶은 모양이지?”

함께 티 룸으로 향할 때 샬럿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일레인은 대꾸 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감히 나의 펠릭스를 그리 취급하다니!

여왕이야 당장 손볼 수 없지만, 마치 후작 가문쯤이야.

크라몬드 가문의 힘으로 아예 뭉개 버리리라.

일레인이 마치 가문을 파산시키기로 결심할 때, 펠릭스는 이미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찰스, 마치 후작을 탈탈 털어 뇌물받은 것, 구린 짓한 거 알아내 모두 증권가 소식지에 쫙 뿌리게.”

“예, 공자님. 정치계에도 제보할까요?”

“소문이 떠들썩하면 그 기회를 이용해 마치 후작을 제거하고 대신 여왕의 총애를 얻으려는 자들이 알아서 물어뜯을 걸세.”

“예,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루덴의 최고급 의상실을 누가 가지고 있지? 거기 주인에게 우리 골든우즈 사의 투자 정보를 줄 터이니 마치 후작 가에 천 쪼가리 하나 팔지 않도록 조처하게.”

펠릭스는 마치 후작 부인을 먼저 사교계에서 제거할 작정이었다.

여왕을 알현할 때, 그리고 연회에 참석할 때 고위 귀족들은 새 옷을 맞춰 입음으로써 부와 권력을 과시한다.

몇 번 같은 드레스와 셔츠, 코트와 가발을 착용하면 의구심과 멸시 가득한 시선을 받게 마련이고, 곧 파산할 거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귀족 사회에서 도태가 되게 마련이고.

“마치 후작가의 영지에서 주로 나오는 생산물이 청어던가? 도매상들이 그쪽 청어랑 대구, 그리고 곡물까지 모두 매입하지 못하도록 손을 써 두고.”

돈줄까지 모두 틀어막아, 세상에게 똑똑히 보여 줄 작정이었다.

‘일레인 크라몬드 영애의 그림과 그림의 모델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여왕은 걱정이 없었다. 개처럼 부려먹던 마치 후작이 파산 지경에 처한다 해도 눈 하나 껌뻑하지 않을 여왕이었다.

털 빠진 개 따위는 도살업자에게 넘겨 버리고 보기 좋고 혈통 좋은 개를 새로 들이듯 마치 후작을 내치고 새로운 신하를 들일 것이다.

이 방식이 브리티나 여왕의 용인술이란 걸 펠릭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여왕과 마치 후작가의 시종이 돌아간 직후 다시 또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의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여왕에게 보이기 위해 에로스 신의 모습을 한 펠릭스의 초상화를 손보고 있던 일레인이 부모님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내려갔다.

펠릭스도 어머니 페일른 부인을 맞이하기 위해 벌써 내려와 있었다.

“어머니,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약은 제대로 드시고 계시는 거지요?”

긴 마차 여행에 지쳐 파리한 얼굴로 마차에서 내리는 엘렌을 부축하며 펠릭스가 근심스레 물었다.

“괜찮아. 이깟 건강 따위.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침실로 가자.”

작게 속삭인 엘렌은 마중 나온 샬럿에게 말했다.

“샬럿, 오랜만에 아들을 봐서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요. 저녁은 우리 거처에서 따로 들겠습니다.”

“그래요, 엘렌. 집사에게 일러 별채로 가져다 드리게 할게요.”

양해를 구한 엘렌이 펠릭스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떼는데, 마침 일레인이 살롱 문을 통해 마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레인은 크라몬드 백작 부부와 눈인사를 나눈 후, 엘렌을 향해 반갑게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급하게 달려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주방에 피로 회복에 좋은 요리들로 신경 써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엘렌의 건강을 걱정하는 일레인의 눈동자는 따스한 애정과 존경으로 가득했다.

“고맙다, 일레인. 펠릭스와 따로 식사를 하기로 했으니 내일 아침에 보자.”

다정하게 인사를 건넨 페일른 부인은 거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서 일레인이 펠릭스를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응시하는 걸 보지 못했다.

“일레인, 내일 또 일찍 작업실에서 보자.”

엘렌을 부축하고 걸음을 옮기며 펠릭스가 일레인에게 인사했다.

첼로의 현처럼 짙은 애정과 갈망을 담고 진동하는 펠릭스의 목소리는 엘렌이 일찍이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일레인이 가문을 먼저 생각하는 아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지 않고는 저리 노골적인 구애를 담뿍 담고 있는 목소리를 거절하기 어려웠으리라.

엘렌은 무거운 마음으로 펠릭스의 부축을 받아 별채로 왔다.

펠릭스가 건넨 따스한 허브차를 마신 후, 침대에 기대앉은 엘렌은 마침내 해야 할 말을 꺼냈다.

“네가 마침내 신분을 되찾기로 결심했단 소식을 듣고 리처드 삼촌이 무척 기뻐하셨단다. 너의 일이라면 친자식 일처럼 신경 쓰시잖니.”

“네, 삼촌 못 뵌 지도 벌써 삼 년 가까이 되었네요. 건강하시지요?”

해싱턴 공작과 엘렌 페일른과의 관계가 드러나면 펠릭스의 신분도 드러나기에, 세 사람은 극도로 조심하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펠릭스가 투자 회사를 차려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에도 해싱턴 공작과 동업자 자격으로 만나는 사람은 조나단 골든우즈 행세를 하고 있는 늙은 아메리칸 헨리 아셔였다.

“펠릭스, 우리가 나폴리에 머물 때 휴양차 와 머물렀던 몬토바 공녀를 기억하느냐? 너를 그린 헤르메스 신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 속 왕자와 결혼하고 싶다던?”

“산샤 말인가요? 어머니가 그 일가족 초상화를 그릴 때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래, 그 공녀! 그 공녀가 말이다.”

“어머니.”

펠릭스는 ‘몬토바’란 이름이 나올 때 이미 엘렌이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 간파했다.

각 나라의 국채와 회사채를 투자할 때 해당 나라의 정세는 무척 중요한 투자 기준이 된다.

그래서 펠릭스는 세계 각국 정세와 왕실과 공국 주요 인사의 동정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었다.

“저는 일레인 크라몬드와 결혼할 것입니다.”

펠릭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엘렌은 아들의 눈을 보며 가엾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일레인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 아이는 백작이 정해 주는 가문 좋은 사내와 혼인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어.”

펠릭스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일레인은 제가 귀족이 아니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이미 저의 구애를 받아 주었습니다, 어머니.”

“뭐라고!?”

엘렌은 귀를 의심했다.

“지금의 저로도 충분하다고 일레인이 받아 준 것이에요. 그러니 제가 일레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아.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일레인은 그림의 소재를 선택한 다음에 막상 붓을 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기로 한 대상을 꼼꼼하게 관찰한 후, 그 인물을 특징을 가장 강렬하게 표현해 낼 수 있는 색채 구성, 어떤 색들을 얼마나 겹쳐 올려 색을 올릴지까지 여러 번 종이 위에 시뮬레이션 해본 다음에야 비로소 붓을 들었다.

그러나 일단 붓을 들면 완성까지 거침이 없었다.

그런 일레인이 마침내 펠릭스의 애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그 사이 가문과 자신의 현재, 부유하나 신분이 낮은 펠릭스와의 혼인이 가문과 크라몬드 백작 부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꼼꼼하게 다 재어 보고 따져 보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을 좀처럼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일레인은.

엘렌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 빼어난 제자 때문에 펠릭스를 대공의 후계자로 만들 목표를 포기할 수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펠릭스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

엘렌은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펠, 펠릭스, 제발 이 어미를 생각해서……. 하악!”

흥분된 어조로 소리치던 엘렌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통증이, 통증이 일었다.

결코 심하지 않은 통증이었다.

그러나 엘렌은 이제껏 어머니를 위해 살아온 아들의 심장을 움켜쥐어서라도 아들의 발목을 잡을 작정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제발 이 어미의 소원을 이뤄 줘! 그래야 내가 죽어서 엘리노어를 만났을 때 떳떳하게…….”

‘엘리노어’란 이름이 나오자 펠릭스의 얼굴이 대번에 차가워졌다.

“어머니가 어떻게 엘리노어를 입에 담으며 저를 설득할 생각을 하실 수 있어요, 어떻게! 엘레노어를!”

저를 마트비아 후계로 만들겠다는 어머니의 그 야망 때문에 치료도 못 받고 죽은 그 가여운 엘리노어를!

엘렌의 야윈 얼굴이 날카롭게 돌변했다.

검푸른 눈이 짙어져 거의 검은색으로 번득거리는 눈동자가 분노를 품고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엘리노어가 죽은 게 왜 어미 탓이라는 거냐? 네가 공자로 인정받기만 했어도! 아니, 네 아비가 너를 제 자식으로 인정만 했어도, 내 새끼가 온 유럽을 떠돌다 죽었을 리가 없어!”

또! 또! 또, 그 소리!

싸질러 놓고 버린 아비도 개새끼지만, 그 개새끼한테 인정받게 한다고 온 유럽을 떠돌며 얼굴 팔아먹게 하신 건 또 누구인데요.

어머니 인생에 나를 대공으로 만들고 싶은 야망과 그 야망을 그림에 녹여내고 싶다는 욕망을 제외하고 대체 다른 무엇이 있으셨던가요.

그 야망 때문에 결국 나도, 엘리노어도, 어머니의 일생을 건 그림조차도 제대로 명작으로 자리잡을 수 없었던 것 아닙니까!

펠릭스는 터져 나오는 원망과 분노를 삼키기 위해 눈을 꽉 감고 입술을 씹었다.

입 안으로 찝찔한 핏물이 번져 나갔다.

통증을 불러내 분노를 가라앉힌 펠릭스가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마트비아에 가 제가 대공의 아들이란 신분을 인정받겠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만이에요, 어머니. 그게 제가 어머니께 드리는 마지막 효도입니다. 저는 대공의 후계자가 될 생각,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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