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밤새 사랑을, 나눌 거야
“해 주실 것이 있어요, 게인즈 씨.”
펠릭스가 ‘어서 메모할 준비 안 하시고 뭐 하십니까.’ 하는 눈빛으로 게인즈를 바라보았다.
바로 냉철한 사업가도 돌아간 펠릭스에게 당황한 게인즈 씨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맞은편에 앉아 종이를 앞에 두고 펜을 들었다.
“먼저 게인즈 씨. 크라몬드 백작께서 소유하신 채권과 주식 중 여기 증기 기관을 발명하고 있는 스팀 회사의 주식, 오스트리아의 국채, 프로이센 국채를 우선적으로 일레인에게 이관해 주세요. 그 세 종목이 상사의 공식 재산으로 등기되지 않은 백작님의 개인 자산입니다. 작정하고 알아내려고 해도 추적이 어렵습니다.”
게인즈 씨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그리고 제가 며칠 후에 헨리 아셔 씨를 보낼 터이니, 그와 함께 뉴월드 인베스트먼트 회사를 등록하시면 됩니다. 해리스 브라운 행세를 할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 젊은이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셔 씨 비서를 오래 해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헨리 아셔 씨라면 자네의 그 골든우즈 투자회사의 대표?”
“예, 아메리카 인이니 일레인을 도와 차명 회사를 통해 재산을 은닉하는 걸 아주 잘 도울 것입니다. 게인즈 씨는 당장 루덴으로 가서 회사 설립 공증을 받고 필요한 작업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백작께서 출정하시기 전에 서류 작업이 끝나야 합니다.”
일사천리로 지시한 펠릭스는 게인즈 씨에게 눈치를 주었다.
‘어서 가시지 않고 뭐 하고 계십니까? 저 일레인과 보낼 시간이 겨우 사흘, 아니 이제 이틀 반이에요.’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는 펠릭스에 게인즈 씨가 하하, 크게 웃고 작업실을 나갔다.
이제 다시 두 사람뿐이었다.
펠릭스가 긴 손가락으로 은근하게 일레인의 팔을 쓸었다.
“최고의 투자자를 연인으로 두니 좋지? 골치 아픈 일도 끝났으니, 우리 말을 타고 좀 나가 볼까? 해밀턴 후작가의 영지가 그렇게 풍광이 좋다던데.”
말을 타러 가자는 말에 또 그날이 생각나 버렸다.
아침 햇살 속에서 조각상처럼 빛이 나던 그의 벗은 상체와, 등에 단단히 밀착해 오던 그의 가슴과, 우연인 듯 가슴을 스치던 그의 팔뚝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냥 말을 타자고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얼굴을 붉히지? 응?”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던 펠릭스가 일레인을 놀렸다.
“정식으로 약혼한 게 아니니까 아직 함께 말을 타면 안 돼, 펠릭스.”
“당연하지. 이 어여쁜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레인.”
펠릭스가 일레인을 또 짓궂게 놀렸다.
“펠릭스!”
“사랑해, 일레인!”
화를 내는 일레인을 끌어안고 펠릭스가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게인즈 씨가 오기 전에도 입술이 부어오를 정도로 키스를 했는데.
이러다간 입술이 터 사람들이 다 알아챌 거야.
일레인은 펠릭스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펠릭스의 단단한 가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이를 두드리며 잇몸을 훑는 펠릭스의 몸짓에 일레인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다시 격정적인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키스에 서툴러 숨이 막힐 지경에야 일레인을 놓아준 펠릭스가 귓불을 핥으며 속삭였다.
“그런데 승마 코스는 저 북쪽의 숲으로 하자, 일레인. 오면서 보니까 그쪽엔 인가도 없이 숲과 평원이 바다까지 펼쳐져 있어 말을 타고 달리기에 최적이던걸.”
숲 너머 인적 없는 곳에서 날 안고 달릴 거란 말을 저렇게도 하는구나.
“으흥, 그래, 그쪽이 늦가을까지 목초지로 양들을 방목하는 데라서 말 달리기에 아주 좋아.”
일레인도 못 알아들은 척 장단을 맞췄다.
마음이 간질간질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오르고, 발은 허공을 딛는 듯 붕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일레인은 대체 어떻게 방으로 돌아와 승마복으로 갈아입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두꺼운 모직 승마용 드레스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승마 부츠를 신고, 폭신한 여우 털로 안감을 댄 망토를 단단히 여며 입고 브라운의 등에 앉아 있었다.
펠릭스는 가죽 승마 바지에 검정색 승마용 코트를 멋지게 차려입고, 커다란 검정색 말에 올라 있었다.
두 사람을 태우고도 지치지 않고 두 시간은 너끈히 달릴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말이었다.
“자, 갈까?”
펠릭스가 먼저 출발하라는 듯 일레인에게 팔을 들어 보였다.
일레인은 브라운의 배를 살짝 차고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뺨에 와 닿는 차가운 초겨울 바람마저 펠릭스의 손길처럼 자극적이었다. 심장이 두두두 땅을 박차는 브라운의 말발굽 소리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뭇잎을 떨군 초겨울 숲은 오후의 늦은 햇살 속에 을씨년스러웠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일레인과 펠릭스의 눈에는 잿빛의 초원마저 새봄의 초원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러브 매직.
사랑의 설렘에 들떠 어떻게 달리는지도 모르는 새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다다랐다.
일레인은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췄다.
곧바로 따라온 펠릭스가 브라운의 머리에 검은 말의 머리를 대었다. 그리고 긴 상체를 기울여 추위에 새파랗게 얼은 일레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고삐를 쥔 일레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쉬지 않고 달리느라 가빠졌던 숨은 더욱 가팔라지고, 심장은 둥둥, 북처럼 울려 대었다.
펠릭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마음 놓고 일레인의 입술을 탐하고 싶었던 소박한 욕망은 어느새 그 부피를 무섭게 늘렸다.
“하아, 일레인.”
거칠게 속삭이며 펠릭스는 아예 말을 나란히 딱 붙이고, 브라운 위의 일레인을 번쩍 들어 제 안장 위에 올렸다.
“꺄아.”
비명을 지르며 일레인이 웃었다.
깔깔거리는 밝은 웃음이 잿빛의 초원 위를 온통 푸르게 물들이며 저 바다까지 굴러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도 웃을 줄 아는구나, 나의 일레인이. 그 옛날의 엘리노어처럼.
엄마와 가문을 돌보느라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고작 입꼬리를 조금 올려 웃는 둥 마는 둥 하던 나의 일레인이.
불현듯 치미는 연민에 펠릭스는 가녀린 일레인의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검은 말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의 걸음에 맞춰 흔들리며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오랫동안 외로웠던 마음을 가득 채웠다. 오랜 허기가 다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마침내 바다 앞에 섰을 때 펠릭스가 속삭였다.
“내년 여름에, 결혼하자 일레인. 우리 결혼해서 멋진 그림과 조각과 대성당이 있는 유럽의 도시들을 차례로 순례하자.”
펠릭스의 청혼에 일레인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대륙 여행이 머리를 스쳤다.
원래는 유럽 대륙 전체를 돌아보며 스케치를 하고 명화들을 모사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뾰족뾰족 첨탑이 신성을 품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두오모 성당을 보았을 때, 엄마는 극심한 우울증 발작을 일으켰다. 그래서 나머지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바로 배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매일 아침마다 나는 커피를 내려 너를 깨울 거야. 하녀가 막 사 온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너는 그림을 그리겠지. 나는 그 옆에서 일을 하거나 너의 모델이 되어 줄 것이고.”
은근하게 속삭이며 펠릭스의 오른손이 차츰차츰 일레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때로 너는 일레인, 인체를 정확하게 모사하기 위해 부랑아들의 시체를 해부한 미켈란젤로처럼 나의 벌거벗은 몸을 만질 거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나의 몸을 만지며, 살 밑의 근육과, 뼈를 느끼고…….”
“으흥.”
언젠가 일레인이 그러할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펠릭스의 손이 일레인의 쇄골을 쓸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은 쇄골 밑 가슴의 봉긋한 부분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우린 또 늦은 점심을 먹고 외출을 할 거야. 손을 꼭 잡고 성당과 박물관과 궁과, 푸르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도 가겠지.”
점점 더 깊게 가슴을 파고들며, 펠릭스가 일레인의 귀에 속삭였다.
열기를 더해가는 펠릭스의 입김 속에서 일레인은 저도 모르게, 으흐흥, 다시 한번 신음을 흘렸다.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자잘한 꽃무늬가 수놓인 양산을 쓴 자신과, 그런 자신의 허리를 더운 줄도 모르고 꽉 껴안은 채 걷는 펠릭스의 모습이 그림처럼 생생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꿈을 꾸듯 몽환적인 환영 속에서 일레인은 펠릭스의 가슴에 몸 전체를 맡겼다.
더욱 단단히 배를 죄어오는 펠릭스의 팔과, 마침내 목과 가슴으로 늘어진 숄을 제치고 맨 가슴 전체를 감싸는 펠릭스의 차가운 손가락이 일레인의 욕망을 일깨웠다.
빈틈없이 맞닿은 허리 아래로 점점 더 부피를 키워오는 그의 하체가, 일레인의 몸을 뜨겁게 달궜다.
“펠릭스, 아아, 펠릭스.”
일레인의 부름에 펠릭스의 입술이 목덜미를 파고 들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말 위에서 펠릭스의 입술이 뜨거운 숨결과 함께 일레인의 목을 파고들었다.
“멋진 예술품으로 포식한 우리는 지친 발걸음으로 돌아와 보르도 와인을 곁들인 저녁 만찬을 즐길 거야. 그리고 나는 더운 물을 받아 와 오래 걸어서 피로해진 너의 발가락을 하나하나 씻겨 줄 거야.”
부츠 속 양털 양말에 쌓인 일레인의 발가락이 동그랗게 오그라들었다.
아아, 일레인은 입술을 동그랗게 벌려 점점 가빠지는 숨을 내보냈다.
거칠어지는 숨결에 따라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하는 일레인의 가슴을 온 손바닥으로 느끼며, 펠릭스는 또 한층 뜨거워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의 손가락이 너의 발가락을 스쳐 발등으로, 종아리로, 무릎으로, 그리고 더 위로, 너의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면, 일레인.”
펠릭스의 목울대가 마른침을 삼키며 크게 움직였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말의 근육이 마치 펠릭스의 손가락인 것처럼 일레인의 다리를 자극했다.
“하아, 하아.”
일레인은 더 참을 수 없었다.
몸을 뒤로 한껏 제끼며 일레인은 팔을 뒤로 올려 펠릭스의 얼굴을 앞으로 당겼다.
펠릭스의 짙어진 눈동자가 사랑과 욕망에 떨고 있는 일레인의 눈동자를 포착했다. 펠릭스는 살짝 벌어진 채 더운 숨을 내뿜는 일레인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영혼을 나누듯 격렬한 키스가 이어졌다.
펠릭스의 손은 거침없이 일레인의 가슴을 파고들고, 고비를 쥔 다른 손은 치마 위 일레인의 아랫배를 자극했다.
“발의 물기를 닦아 준 나는 너를 안고 침대로 가겠지. 그리고 우린 밤새, 밤새, 일레인, 응?”
펠릭스가 대답을 재촉했다.
이 달콤한 상상이 자신만의 망상이 아니라는 걸, 혀를 얽고 몸을 겹쳐 서로를 탐하는 우리가 함께 꾸는 꿈이라는 걸 확인해 달라는 듯 펠릭스는 거듭 거듭 일레인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는, 펠릭스, 하읏, 밤새, 사랑을, 사랑을 나눌 거야.”
검은 말은 어느새 멈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