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저는 일레인의 사내입니다
오호라.
주름 하나 없이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여왕이 마침내 후작 부인과 시선을 맞췄다.
“크라몬드 여식의 그림 솜씨가 빼어나다니, 어디 그 초상화를 보고 싶구나. 여인이, 그것도 명문 귀족 가문의 여인이 빼어난 화가가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무니 내가 직접 격려해야 하지 않겠느냐.”
여왕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마치 후작 부인이 재빨리 말했다.
“백성을 생각하시는 전하의 그 광대한 은혜는 하나님의 은총과도 같습니다. 예, 제가 당장 사람을 보내 크라몬드가의 여식들을…….”
여왕이 마치 부인의 말을 싹뚝 잘랐다.
“그림을 그리는 게 둘째 여식이라고?”
아차, 여왕은 바이올렛 백작 부인과, 바이올렛을 빼닮은 다이앤을 엄청나게 증오하지.
마치 후작 부인은 또 머리를 휘릭 굴렸다.
“예, 둘째 여식 일레인 크라몬드만 불러들이겠습니다. 아예 모델이 된 펠릭스란 자도 데리고 올 수 있으면 함께 오고, 그림 도구도 갖춰 오라고 명하겠습니다.”
마치 후작 부인이 서둘러 여왕의 뜻을 받들며, 눈썹을 칠하는 검은 눈썹연필과, 작은 눈썹 빛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온 영혼을 다하여 여왕의 눈썹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왕이 바이올렛 크라몬드 백작 부인과 그녀의 큰 딸 다이앤을 극도로 꺼리는 것은 질투 때문이었다.
여왕의 남편인 국서 캠벌리 공작은 어릴 적부터 바이올렛 템슨을 열렬하게 좋아했다.
여왕과 혼인해야 하는 가문의 의무만 없었더라면 킴벌리 공작이 진작 바이올렛 템슨에게 청혼했을 거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것들이 감히 속닥거렸다.
그런 연유로 여왕은 크라몬드 백작 부부와, 바이올렛을 쏙 빼닮은 큰딸이 이가 갈리게 싫었다.
‘하지만 그 가문도 곧 치워 버릴 것이니.’
치우기 전에 백작이 아낀다는 그 둘째를 불러다 천한 화가 부리듯 해 보는 것도, 그 둘째가 필시 마음에 두었기에 그리 걸작이 나올 수 있었을 거란 그 잘생긴 사내를 빼앗아 놀아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유흥거리가 되리라.
여왕은 마음을 굳히고 마치 후작 부인에게 명했다.
“오늘 점은 이마에 찍겠네.”
이마에 애교점을 찍는다는 건 위엄을 보인다는 뜻.
브리티나 군주로서 감히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들은 죄다 손보겠다는 권력의지의 표명이었다.
여왕의 사자가 왕명을 가지고 배런의 필론 하우스로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말을 세 번이나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려간 윌슨 크라몬드 백작은 마침내 바이올렛과 엘렌을 태우고 돌아오는 크라몬드 가문의 사륜마차를 발견했다.
“바이올렛!”
말에서 내린 윌슨이 소리쳤다.
그러자 크라몬드 가문의 문장이 호화롭게 금박으로 새겨진 사륜마차의 문이 열리고, 바이올렛이 창백한 얼굴을 드러냈다.
“윌슨! 오, 윌슨!”
다섯 달만에 보는 그리운 남편이었다.
시간이 지체될까 봐 물 이외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달려온 바이올렛은 서둘러 내리려다 휘청거린 바람에 마차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바이올렛! 내리지 마, 내리지 마!”
윌슨이 비명처럼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바이올렛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밀었다.
마차에 오른 윌슨은 바이올렛을 꽉 껴안고 열렬하게 입맞춤을 나눴다.
“아유, 참 평생 홀로 산 사람을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짓이랍니까? 나, 내릴까요? 두 분이서만 가시겠습니까?”
맞은편에 홀로 앉아 있던 엘렌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적당히 좀 하라고 타박했다.
그제야 백작 부부는 입술을 떼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윌슨 백작이 쑥스러운 듯 목을 큼큼 가다듬고 묵례를 했다.
“다섯 달만이라서요, 엘렌. 잘 지냈지요?”
“예, 덕분에 잘 지냈어요, 윌슨.”
웃으며 대답한 엘린이 바이올렛을 바라보았다.
엘렌 페일른은 십대 때부터 변함없이 다정한 친구 부부를 응시하다 창밖 푸르른 초원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저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었더라면.’
그러면 나도 펠릭스를 그리 고생시키지 않아도 되었으련만.
오토에게 버림받고 복수를 다짐하며 칼을 휘두르듯 붓으로 울분을 풀어온 지난날이 휙휙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이제 그 세월도 끝이다.
펠릭스가 마트비아의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될 것이니까.
상념에 빠진 엘렌을 크라몬드 백작이 깨웠다.
“엘렌, 물어볼 것이 있어요. 솔직하게 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크라몬드 백작이 물어볼 질문이 무엇일지, 엘렌은 얼추 확신했다.
‘펠릭스는 일레인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다.’
그 어떤 화려한 귀부인을 만나도 무심함만 내비치던 펠릭스였다.
죽은 엘리노어를 제외하고 펠릭스는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들이 처음으로 사람에게, 여인에게, 일레인에게 재물에게만 보이던 집착 어린 눈빛을 보낸다.
처음엔 그런 아들의 변화가 반가웠다.
감정이 거세된 채 오로지 돈만을 쫓는 괴물 같았던 아들이 일레인을 만나 비로소 사람다운 눈빛이 되어 가니, 일레인이 고맙기까지 했다.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일레인 때문이었다.
일레인은 크라몬드 가문의 안위에 도움이 될 자와 혼인하려 한다고 말했었다.
한번 결정한 사안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아이니, 펠릭스가 열렬하게 구애한다 해도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그래서 엘렌 페일른은 백작이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고개부터 흔들었다.
“펠릭스에 대해선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윌슨.”
“…내가, 뭘 물을지 이미 알고서 하는 대답입니까?”
“알아요. 알아요, 윌슨.”
펠릭스가 일레인을 마음에 둔 걸 아느냐고,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겠지.
“펠릭스는 따로 혼인할 여인이 있습니다, 윌슨.”
엘렌 페일른이 잘라 말했다.
엘렌 해싱턴과 리차드 해싱턴은 펠릭스가 태어날 때부터 마트비아 공국의 대공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제 그 오랜 바람을 실현할 날이 가시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레인은 안 된다.
일레인은 펠릭스를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온 대륙에 선보일 초상 화가이지, 펠릭스의 짝이 되어선 아니 된다.
이것이 그간 숨겨 온 엘렌 페일른, 아니 엘렌 해싱턴의 솔직한 입장이었다.
크라몬드 백작과 백작 부인은 뒤통수를 맞은 듯 얼떨떨해졌다.
이후로 세 시간 동안 마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달각거리는 바퀴 소리와 흔들리는 진동 속에서 백작 부부는 손을 꽉 잡은 채 일레인과 다이앤,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펠릭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엘렌은 일레인이 그린 에로스 초상화를 생각했다.
과감하고도 아름다운 붓 터치를 통해 보기 드문 재능을 피워 낸 제자 일레인과.
일레인을 바라보며 너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말겠다 다짐했을 아들 펠릭스와.
그리고 그 둘을 찢어 놓고야 말겠다는 사악한 악의를 품은, 심술궂은 훼방꾼 아프로디테 같은 자신을 엘렌은 내내 곱씹었다.
한편 일레인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한 펠릭스는 안나를 불러 게인즈 씨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왜 벌써 게인즈 씨를? 나는 아직 채권이며 투자를 잘 모르는데?”
안나가 부르러 간 사이 일레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펠릭스가 다정하게 일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며칠 투자 실무를 배운다고 당장 실전에 적용할 수 없잖아. 대신 최고의 전문가를 고용하게 해 줄게.”
“그게 게인즈 씨야?”
물어오는 일레인의 입술이 예뻐서 펠릭스는 대답 대신 키스부터 했다. 그러고 나서,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 일레인의 뺨에 입술을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설마! 나, 나, 펠릭스야, 일레인. 내가 너의 투자 전문가가 되어 줄게. 평생, 무료로!”
게인즈 씨를 불러들이는 건 앞으로 일레인과 시간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레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삼 일. 그 이후엔 마트비아에 가서 대공의 아들 신분을 인정받아야 한다.
대공과의 만남은 결코 유쾌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펠릭스는 일레인과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을 가슴 가득 꾹꾹 채운 채 마트비아에 가고 싶었다.
“해리스 브라운이란 이름으로 뉴월드 회사 세워 투자하는 것도 전문가 붙여 줄게. 내가 없는 동안 헨리 아셔란 분이 네 일을 도울 거야.”
펠릭스의 말에 일레인은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제 겨우 가문의 안살림을 꾸리는데 능숙해졌는데 또 상속법을 피해 재산까지 성공적으로 은닉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었다.
“고마워, 펠릭스.”
일레인은 펠릭스의 커다란 손에 물감이 물든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꽉 손을 잡았을 때 게인즈 씨가 작업실에 들어왔다.
“어? 이것은?”
게인즈 씨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일레인이 제 마음을 받아 주었어요, 게인즈 씨. 이제 저는 일레인의 사내입니다.”
펠릭스가 꼬리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가슴을 쑥 내밀며 으스대었다.
“오호.”
게인즈는 놀란 듯 감탄음을 내었지만, 줄곧 어쩐지 이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다.
일레인도 펠릭스도 모두 아주 어릴 적부터 강제로 어른의 세계에 팽개쳐져 과도한 부담을 져온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훌륭하게 성장한 두 젊은이가 서로를 아끼고 보듬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어쩐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펠릭스. 축하한다. 일레인, 펠릭스를 많이 아껴다오.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해서 재물 속에서 굶어 죽는 미다스 왕이 되지 않게.”
게인즈 씨는 주름 가득한 얼굴로 흐뭇하게 두 사람을 축복했다.
“아이, 참.”
일레인은 공연히 부끄러워져 손을 빼려 하였다.
그러자 펠릭스는 일레인의 손을 아예 손깍지를 껴 잡은 채로 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