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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29화 (29/112)

#제29화. 사랑한다 말해 줘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펠릭스는 꽉 두 손을 움켜잡고 있는 일레인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풀어낸 손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애원하듯 속삭였다.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단 바람을 품게 한 여인도 일레인, 네가 처음이야.”

일레인의 손등에 따스하고 보드라운 것이 와 닿았다.

살짝, 아주 살짝 겁을 내듯 조심스럽게 펠릭스의 입술이 와 닿았다.

“내 몸과 마음을 함께 가질 여인도, 그리고 내 몸과 마음을 마지막까지 함께 가질 여인도 일레인, 이 넓은 세상에서 오로지 그대뿐일 거야.”

일레인의 손등 위에 달콤한 맹세가 달큰한 숨결과 함께 간지럽게 떨어졌다.

일레인은 귀가 웅웅,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머리는 어서 펠릭스의 고백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거절하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런데 심장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둥둥둥, 거친 박자로 날뛰기 시작했다.

“일레인, 아, 일레인. 제발!”

내 사랑을 받아줘.

손등을 달구는 펠릭스의 입술은 세오드 성에서 단단하게 가슴을 감싸 오던 강인한 팔과, 손님용 침실 문 뒤에서 행해졌던 첫 키스의 황홀함까지 순식간에 소환해냈다.

아아.

일레인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펠릭스…….”

앙다물었던 일레인의 입술이 스르르 풀리며 펠릭스의 이름을 불렀다.

용서와 구원의 부름이었다.

“일레인, 일레인! 사랑해, 사랑해!”

기쁨에 휩싸인 펠릭스가 정신없이 일레인의 이름을 부르며 손등에, 손목에, 그리고 팔에 키스를 뿌리기 시작했다.

펠릭스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열꽃이 피어났다.

하아.

일레인의 숨도 점점 더 가빠졌다.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크라몬드 가문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은 자꾸 몽롱해지는 몸의 감각 앞에서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일레인의 몸은, 그리고 저 깊숙이 꾹꾹 눌러 두었던 감정은 거듭 애타게 자신을 갈구하는 펠릭스의 속삭임을 외면하지 못했다.

“하아, 펠릭스.”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일레인이 펠릭스를 불렀다.

펠릭스는 무너지는 일레인을 받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손으로 일레인의 얼굴을 감싸며, 다시 한번 뜨겁게 고백했다.

“사랑해, 일레인 크라몬드. 이제부터 나 펠릭스 페일른은 네 것이야.”

자신을 받아달라는 듯 펠릭스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선뜻 열리지 않는 일레인의 입술을 펠릭스의 혀가 애원하듯 훑고 또 훑었다.

그 절박한 움직임은 어릴 적 엄마가 떠날까봐 드레스 자락을 필사적으로 잡던 자신의 손가락과 닮아 있어서.

그래서 일레인은 이번엔 주저하지 않았다.

일레인은 스스로 입술을 열고 펠릭스의 입맞춤을 깊게 받아들였다.

두 팔은 어느새 펠릭스의 목을 단단히 감아들었다.

격정적인 숨결이 하나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서툴지만 격정적인 일레인의 키스를 펠릭스는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둘은 거듭거듭 입술을 맞대고, 혀를 얽었다.

온 우주에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온통 집중했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입술을 떼었을 때, 펠릭스가 일레인과 시선을 단단히 얽었다.

짙은 정념이 넘실거리는 펠렉스의 검푸른 눈동자는 일레인을 향해 애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말해 줘, 일레인!’

일레인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들어 조각처럼 완벽한 펠릭스의 얼굴을 쓸었다.

“말해 줘, 일레인.”

격정적인 입맞춤으로도, 다정하게 얼굴을 쓰는 손길로도 답이 되지 않는다는 듯 펠릭스가 일레인을 재촉했다.

“펠릭스…….”

말과 시선으론 충분하지 않다.

암묵적 약속만 믿다가 거액의 성공 보수를 두 번 떼인 후, 펠릭스는 투자 고객이 제왕이라도 반드시 문서화된 계약서를 받았다.

그렇게 뼈 속까지 밴 투자자의 본능으로 펠릭스는 일레인이 제게 마음을 주었다는 것을 문서로 땅땅 박아 두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다짜고짜 종이에 잉크로 사랑의 서약서를 적어 낼 수 없는 노릇이니.

“사랑한다 말해 줘, 일레인. 너는 늘 진실을 말하고 말한 건 틀림없이 지키는 사람이니까.”

말로라도 확인받아야 했다.

“날 사랑한다 말해 줘, 일레인.”

평생 마음을 주어 본 적이 처음이라 제가 받은 마음이 진짜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사내의 불안과 초조가 일레인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래서 또 찌르르, 속절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사랑한다 말해도 될까.’

술 취한 척하며 음흉한 시선을 나누는 조지와 다이앤을 두고.

아빠를 없애 크라몬드 가의 재산을 강탈하고 싶어 하는 루덴의 여왕을 두고.

펠릭스를 사랑해도 될까.

망설임을 길지 않았다.

아니, 아까 이미 입술을 열어 펠릭스의 입맞춤을 받아들일 때부터 일레인의 마음은 펠릭스를 향해 줄달음질 치고 있었다.

일레인은 두 손으로 펠릭스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입술을 가져다, 그의 붉은 입술에 붙이며 속삭였다.

“사랑해, 펠릭스. 그대를 사랑해.”

“흐윽, 일레인.”

안도의 신음이 펠릭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팽팽하게 긴장했던 온몸의 근육이 일시에 풀려 휘청 다리까지 흔들거렸다.

펠릭스는 온 힘을 다해 일레인을 끌어안았다.

“다시는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일레인.”

펠릭스가 격정적으로 선언했다.

“넌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일레인.”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망망대해에 떠돌다 든든한 부표를 얻은 느낌이었다.

“네가 고양이 털투성이 녹색 드레스를 입고 내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일레인. 우린 함께할 운명이었던 거야.”

거친 바다 위를 떠도는 것 같던 뿌리 없는 삶이 비로소 땅을 단단히 딛고 선 느낌이었다.

“고마워, 일레인.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

펠릭스는 기어이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흐느끼고 말았다.

그가 가졌던 외로움이 어깨의 떨림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레인은 있는 힘껏 펠릭스를 마주 안았다.

* * *

마치 후작 부인은 이른 새벽부터 부산하게 차려입고 마틸다 여왕의 투왈레트 실에 들었다.

바로 전전날, 크라몬드 백작가의 영애들을 사교계에서 고립시키려는 목적으로 해밀턴 후작 부인을 방문했던 차였다.

여왕께서 어찌 그 자매들을 망신 주었나 궁금해 하실텐데, 도리어 창피만 당하고 돌아왔으니.

여왕은 어찌 봐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여왕이 화장하고 옷을 차려 입는 투왈레트 실에 들어왔을 때였다.

여우 같은 더비스 남작 부인이 여왕에게 고자질하는 소리가 마치 후작 부인을 먼저 맞이했다.

“펠릭스란 자와 몸을 맞댄 귀족이 누구냐고, 이름을 대라고 고작 스무 살의 영애가 마구 추궁하였습니다.”

“…….”

여왕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전하, 그래서 마치 후작 부인은 톡톡히 창피만 당했답니다.”

희게 반죽된 파르를 여왕의 얼굴 전체에 펴 바르고, 그 위에 백분을 톡톡 얇게 올리며 남작 부인이 또 기어이 망신을 주었다.

‘저 불여우가!’

남작 부인의 공들인 가발을 다 쥐어뜯고 싶은 마음을 감추며, 마치 후작 부인은 서둘러 여왕께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뵈옵니다.”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는데도 마틸다 여왕은 아예 듣지도 못한 양 눈을 감은 채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일어서도 좋다는 여왕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마치 후작 부인은 벌을 받듯 무릎을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다.

“그래도 그림 솜씨가 제법이었습니다, 전하. 펠릭스 페일른이란 자를 에로스 신으로 그렸는데, 실제 크기로 그린 초상화의 눈을 보면 마치 제가 사랑을 고백받는 것처럼 가슴이 뛸 정도였습니다.”

더비스 남작 부인이 은가루와 백연, 부채꽃 가루를 섞은 분을 톡톡 여왕의 이마에 펴 바르며 속살거렸다.

눈을 감고 있던 여왕이 눈을 번쩍 떴다.

“그으, 래?”

외양이 멋진 사내는 언제나 즐거움을 주지.

여왕의 남편인 캠벌리 공작이 사내구실을 못한 지 벌써 3년.

여왕은 요새 침실에 은밀하게 들이는 젊은 사내들 맛에 흠뻑 빠져 있었다.

‘펠릭스 페일른만 여왕 앞에 데려올 수 있다면!’

그제의 과오를 내일의 영광과 총애로 바꿀 수 있으리라.

몸이 달은 후작 부인이 재빨리 고했다.

“펠릭스 페일른은 골든우즈 투자회사의 브리티나 지점장입니다, 전하. 화려한 외모와 보기 좋은 몸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또 그 어미가 엘렌 페일른으로 전직 화가라 합니다.”

그제야 여왕은 비로소 마치 후작 부인의 존재를 발견한 양 눈길을 주었다.

“아, 마치 후작 부인 왔구려. 그만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전하.”

후작 부인은 이미 뻣뻣하게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한 다리를 간신히 펴고 후다닥 여왕에게 다가섰다.

후작 부인의 화장 솜씨는 제법 뛰어나서 여왕의 얼굴 치장을 마무리하는 영광을 부여받았다.

다리의 통증을 참으며 후작 부인은 여왕의 볼에 바를 연지를 묻힐 화장솜인 크레퐁을 집어 들었다.

“그 어미가 화가이니 펠릭스란 자가 아무리 콧대가 높다 하여도 어찌 왕명을 거역하겠습니까?”

마치 후작 부인은 연지 벌레를 말려 곱게 빻은 가루인 양홍을 크레퐁에 살짝 묻혀 여왕의 볼에 톡톡 두드렸다.

여왕의 볼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크라몬드 백작의 투자 자문으로 있다고 하니, 며칠 뒤 예정되어 있는 백작의 알현 때 그자도 함께 들라 이르시지요.”

후작 부인이 교활하게 속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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