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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28화 (28/112)

#제28화. 나의 처음을 주지 못해, 미안해

뒤에 서 있던 펠릭스는 순간 숨을 멈췄다.

하아.

아까부터 솜털이 보송보송한 일레인의 하얀 뒷목에 입술 한번 대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는데.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소녀들이 그러하듯 일레인은 얇은 비단 베일을 목과 가슴에 둘렀다.

그래서 왠지 펠릭스에게 보이기 쑥스러운 부분을 다 가렸다고 일레인은 안심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베일을 통해 선명하게 비치는 속 살결이 더욱 사내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걸 아직 어리고 순진한 일레인은 모르고 있었다.

자꾸 거칠어지려는 숨을 잇새로 고르며 펠릭스가 서서히 일레인에게 가슴을 더 기울일 때였다.

“그럼 내가 여기 맨 밑에…….”

맨 밑에 적힌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던 일레인의 손가락이 펠릭스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순간 불똥이 튀듯 손가락 끝이 찌릿 울려 일레인은 화급히 손가락 끝을 오므렸다.

일레인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보디스 위로 가슴이 또 부풀어지며 베일 위로 선명하게 그 부피감을 드러냈다.

‘하아, 일레인.’

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 얼마나 달디단 향이 날까.

자꾸 부푸는 욕망과 거칠어지는 호흡을 제어하기 위해 펠릭스는 일레인이 앉은 의자 등받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등과 팔에 핏줄이 파랗게 일어섰다.

일레인도 오므린 손가락을 정처 없이 꼼지락거렸다.

손끝만 닿았을 뿐인데,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을 찌릿하게 관통하는 이 느낌은 뭐란 말이야.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열기가 팔과 목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뺨이 달아오르고, 입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무얼 원하는지 모를 욕망이, 갈증이 자꾸 일레인을 몰아세웠다.

하아.

일레인은 크게 숨을 내쉬고,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하며 오므렸던 손가락을 다시 조심스럽게 폈다.

“여기 맨 밑에 내 가명인 해리스 브라운이라고 서명하면 이 프로이센 국채가 내 것이 된다는 거지?”

그러나 목소리의 떨림까지 감추진 못했다.

“오, 이해가 제법 빠른데, 일레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펠릭스가 일레인의 머리를 스윽 쓰다듬었다.

“!”

아빠 크라몬드 백작을 제외하고 머리를 쓰다듬은 남자가 없었다.

일레인은 머리를 쓰다듬는 펠릭스의 손길에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해서 노려보기 위해 얼굴을 팩 돌렸다.

그런데.

펠릭스의 얼굴이 아까보다도 더 가까이 있었다!

일레인의 입술이 아슬아슬 펠릭스의 뺨을 스쳤다.

일레인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의자를 뒤로 밀며 몸을 일으켰다.

펠릭스도 재빨리 의자를 짚었던 손을 떼며 몸을 세웠다.

서너 뼘 거리로 멀어진 펠릭스가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올린 채 일레인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한 펠릭스의 표정에 일레인은 자신만 혼자 이상한 느낌을 받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얄미운 마치 후작 부인의 말이 귀에 쟁쟁 울렸다.

“저기 그림 주인공은 골든우즈 투자사의 브리티나 지점장이 아닌가요? 투자 상품도 팔지만……, 그 이상도 판다는……?”

말랑말랑 떨리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펠릭스가 과거에 뭘 팔았고 앞으로 또 뭘 팔지도 자신과 관계없는데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배신감이 들었다.

일레인은 참지 못하고 펠릭스에게 따져 묻고 말았다.

“마치 후작 부인이라는 여인이 며칠 전 필론 하우스에 왔었는데.”

“응, 일레인.”

여인이라면 이제 일레인만 보이고 일레인만 들리는 펠릭스가 마치 부인인지 여치 부인인지 건성으로 대답했다.

‘뭘 잘했다고 이리 뻔뻔하게 태연한 거야.’

일레인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펠릭스 당신이 투자 상품만 판 게 아니고 귀족 부인들에게 그 이상도……, 그 이상도…….”

팔았다면서!

말을 하다 보니 대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펠릭스에게 화를 내나 하는 현실 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그래서 일레인은 말을 삼키고 숨만 씩씩거렸다.

그러느라 또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하아, 정말. 일레인!’

펠릭스는 점점 제어하기 힘든 욕망에 미칠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펠릭스는 혈기 왕성한 스물하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게다가 이미 여인의 몸을 경험한 육체는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소녀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르고 또 올랐다.

안 보려고 입 안의 살을 깨물며 노력해도 어느 새 시선은 자석에 끌리는 철 조각처럼 흰 목덜미와 부푸는 가슴으로 향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베스트를 입고 버튼을 모두 꼭꼭 잠그고 오길 잘했지.

하마터면 아주 민망한 상황이 될 뻔했다.

어, 그런데.

방금 일레인이 무슨 중요한 말을 한 것 같은데. 대충 흘려들었다간 큰일이 날 것 같은 불길한 말을.

자꾸 움찔거리며 일레인의 목을 쓸려는 손가락을 제어하기 위해 이미 너덜너덜해진 입 안을 또 깨물던 펠릭스가 돌연 씹기를 멈췄다.

“뭘, 팔았다고, 마치 부인이란 여자가 그랬다는 거야?”

펠릭스가 가슴에서 시선을 떼고 일레인과 시선을 맞췄다.

일레인이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

귀여워라.

늘 서늘하게 침착한 일레인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흥분해서 씩씩대는 일레인은 정말 귀엽구나!

펠릭스는 방금 확인하려던 내용도 잊고 입꼬리를 움찔거리며 눈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니 지저분한 소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웃어!?’

일레인은 정말로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고 말았다.

“펠리스! 그렇게 대단한 귀부인들과 놀아났다면서 감히 나에게 사랑을 고백한 거야?”

그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사실도, 펠릭스의 행적이 모두 자신을 만나기 전이란 것도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질 정도로 맹렬한 분노였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염치가!”

막 소리치던 일레인이 당황해 입을 꾹 다물었다.

‘내, 내가 이렇게 화를 내도 되나.’

그럴 자격이 있나.

부끄러움과 당황에 일레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펠릭스도 웃던 얼굴 그대로 얼어붙었다.

‘제길, 마치 부인이란 자가 내가 귀부인과 놀아났다고 했다고?’

감히 나의 일레인에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지껄이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와 땅에 나뒹굴었군.

‘쫄딱 망해서 땅을 치고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펠릭스의 눈동자가 한겨울 북해의 바다처럼 싸늘한 살기로 깊어졌다.

“…….”

“…….”

물감 냄새 가득한 그림 작업실에 퍼져 나간 당황스러운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눌렀다.

일레인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또르르 굴렸다.

펠릭스는 일레인의 어여쁜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무어라 말해서 이 사태를 수습할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저기…….”

“일레인, 미안해.”

일레인이 고개를 들어, ‘저기, 내 말은 신경 쓰지 마. 내가 비난할 자격이 없는데.’ 사과하려 할 때였다.

펠릭스가 한발 먼저 일레인의 말문을 막았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진지한 얼굴로 펠릭스가 일레인과 눈을 오롯하게 맞췄다.

“골든우즈 사의 고객이 주로 왕족과 고위 귀족이라는 건 알지? 그중에는 물론 여러 귀부인 고객들이 있어. 주로 남편이 죽어 가문의 재산을 관리할 실권을 쥔 여인들이지…….”

말을 하다 말고 펠릭스는 잠시 망설였다.

‘차라리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할까. 앞으로는 일레인만 바라볼 것인데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잠시 갈등이 일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사랑은 거짓 위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오래오래 사랑하려면 잠시 아프더라도 진실만으로 다가서야 한다.

“일레인 내가 외로울 때가 있었어. 투자로 엄청난 자산을 벌었는데 자랑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거나, 겨우 정착할 곳을 찾았다고 안심하는 순간 또 도망쳐야 할 상황이 생길 때가 있었어.”

떨리는 목소리 속에 펠릭스의 아픈 과거가 하나둘씩 일레인 앞에 그려졌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쳐 위로가 간절할 때, 그 순간 내 애정을 갈구하던 여인들이 옆에 있었던 건 사실이야, 일레인.”

늘 여유롭게 유들거리던 펠릭스의 어조가 딱딱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일레인은 눈을 꽉 감았다.

‘그래서 그 여인들을 아직도 좋아하나?’

묻고 싶지만 그렇다는 대답이 들려올까 두려워 감히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심장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아팠다.

“대개는 그 여인들도 위로가 필요했고, 그래서 서로 찰나의 위안을 주고받은 거였어. 이제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여인들이지만, 그래도 미안해, 일레인.”

펠릭스가 사과했다.

일레인은 휴우 긴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새카맣게 좁아든 채 긴장한 검푸른 눈동자가 눈앞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의미로 심장이 아팠다.

왜 그는 그런 관계밖에 가지지 못했을까.

마음이 실리지 않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허망한 관계 밖에 가져 보지 못한 것일까.

무얼 어찌 살았길래 오래도록 서로를 아끼는 사랑 한번을 못 해 본 것일까.

자신도 누구와 마음 한 번 제대로 나눠본 적 없으면서도 일레인은 펠릭스가 몹시 가여워졌다.

“괜찮아, 펠릭스. 이미 지난 일인걸.”

“나의 처음을 네게 주지 못해, 미안해. 일레인.”

너무 진지하게 거듭 거듭 사과를 해오는 펠릭스에게 일레인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누가 너의 처음을 가지고 싶다고 했다고.’

일레인이 진정으로 가지고 싶은 건 펠릭스의 마음이었다.

더 정확히는 오롯이 자신만 바라보는 마음과, 그 마음이 깃든 아름다운 육체 모두였다.

‘그렇게 미안하면, 펠릭스. 너의 마지막을 내게 줘.’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이 입 밖으로 자꾸 비집고 나오려 해서, 일레인은 다시 입을 꽉 다물었다.

“일레인.”

펠릭스가 한 발 더 다가섰다.

이제 펠릭스와 일레인 사이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서로의 숨결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거리까지 다가온 펠릭스가 한쪽 무릎을 세워 꿇어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 수려한 얼굴로 애타게 일레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내 마음을 가진 여인은 일레인, 네가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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