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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24화 (24/112)

#제24화. 저 넓은 가슴에 안기고

일레인도 뒤늦게 펠릭스를 발견했다.

온통 새카맣게 차려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등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존재를 지우며 서 있어서 일레인은 아빠를 따라온 시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펠릭스였다니!

일레인이 놀라 펠릭스에게 시선을 돌리자 아까부터 줄곧 일레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펠릭스가 모자를 벗으며 활짝 웃었다.

“일레인!”

두 달 만이었다.

일레인을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검푸른 눈동자에 강렬하게 흘러넘쳤다.

일레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갑자기 터져 나오는 눈물과, 쾅쾅 울리기 시작한 심장의 전율과, 당장 그에게 달려가 저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은 마음의 격정에서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 자신을 바라보는 펠릭스와, 그의 시선 속에 설레는 일레인 자신만이 오롯하게 존재하는 듯했다.

“!”

다이앤은 바삐 놀리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펠릭스가.

펠릭스가 자신을 보지 않는다.

부른 건 나인데, 환하게 밝아진 펠릭스의 시선이 시종일관 향해 있는 건 일레인이다.

감히, 내게, 눈길도 주지 않다니!

아니, 아니야. 그림 모델 되어 주면서 친해져서겠지.

“펠릭스! 그리웠어요.”

다이앤이 손을 내밀며 유혹적인 목소리로 펠릭스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펠릭스는 일레인에게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돌려 다이앤과 눈을 맞췄다.

“다이앤 영애, 반갑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펠릭스가 다이앤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대는 시늉을 했다.

“오오, 우리 에로스 신이 오셨군요. 펠릭스 씨, 그림만큼이나 정말로 멋지군요!”

샬럿이 감탄의 눈으로 펠릭스를 구석구석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얼어붙은 듯 펠릭스를 바라본 채 침묵하고 있는 일레인의 등을 살짝 때렸다.

“일레인! 펠릭스 씨 그림 몇 점 더 그리거라. 그냥 화폭에 옮기기만 해도 명작이 되겠구나.”

“일레인의 모델이라면 언제라도 설 수 있지요, 해밀턴 후작 부인. 처음 뵙겠습니다. 펠릭스 페일른입니다.”

펠릭스가 모자를 가슴에 대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크라몬드 백작은 친근하게 일레인의 이름을 부르는 펠릭스와, 반가움을 감추기 위해 애써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는 딸 일레인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펠릭스의 옆에서 불쾌한 듯 입술을 앙다문 다이앤에게도 향했다.

‘다이앤도 펠릭스를 마음에 담은 것인가.’

남자인 자신이 봐도 설렐 정도니 그럴 수도 있겠다만. 청춘의 엇갈린 사랑이 좋게 끝나는 걸 보지 못했다.

크라몬드 백작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때 다시 성 앞에 들어오는 마차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온 것 아니냐?”

크라몬드 백작이 환해진 얼굴로 살롱 입구로 나가려 했다.

일레인은 서둘러 아빠의 팔을 잡았다.

“조지 크라몬드일 거예요, 아빠.”

“…조지가, 왜……, 여길?”

혼란스러운 얼굴로 백작이 물었다.

일레인은 난감한 얼굴로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펠리스 옆에 서 있던 다이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교계에 정통한 샬럿이 나섰다.

“숨길 것 없다, 일레인. 앞에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뒤에선 벌써 다들 떠들고 있을 거야. 여왕은 또 어떻고? 모른 채로 가면 윌슨만 우스워질 거야.”

“뭘 밝힌다는 거야, 샬럿? 일레인?”

“아빠!”

다이앤이 먼저 변명을 시작했다.

“며칠 전에 루덴의 의상실에 갔다가 조지 삼촌을 만나 커피 하우스에서 차를 마시며 인사를 했는데요. 말다툼이 있었는데, 좀 과격해져서…….”

다이앤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순진한 얼굴로 호소했다.

조지가 자신의 출생을 두고 이상한 말을 했다는 걸 아빠나 다른 가족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아까 아빠의 환대를 보면 조지의 말이 거짓일 것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실인 날엔 난 어쩌면 좋아.

확인하고 싶지 않아!

“오해가 있었어요.”

다이앤이 필사적으로 말을 꾸며낼 때 마침 살롱 문 안으로 조지 크라몬드가 들어왔다.

조지 크라몬드는 윌슨 크라몬드의 선친을 별로 닮지 않고 여배우였던 모친을 빼닮았다. 그래서 붉은색이 도는 갈색 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당한 미남자였다. 키도 크고 몸도 훤칠해 여인들의 호감을 살 만했다.

그러나 세상 경험이 많은 이들은 재빨리 굴려 대는 갈색 눈동자에서 약삭빠른 비열함을 금세 읽어 냈다.

초저녁인데도 조지는 벌써 술에 취해 뷰컴의 부축을 받고도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여어. 형님, 누님! 우리 예쁜 조카들까지! 모두 날 이렇게 환영해 주는 것인가? 눈물 나네, 이런 환대. 천한 놈한테, 응?”

조지가 킬킬거리며 몸을 휘청거렸다.

“너, 감히 우리 다이앤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윌슨 백작이 화를 참지 못하고 조지에게 고함쳤다.

백작 작위를 욕심내 일을 꾸미는 것보다 딸 아이 평판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윌슨 백작에겐 더 괘씸하게 다가왔다.

조지는 푸흐흡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갑자기 다이앤을 향해 히죽 웃었다.

“내가 우리 조카한테 무얼 어떻게 했더라? 술에 취해 있어서 기억이 안 나는데, 다이앤. 내가 너한테 실수한 거라도 있는 것이냐?”

“저, 저런!”

분노를 참지 못하고 조지를 향해 달려들려 하는 크라몬드 백작의 팔을 일레인이 다시 잡았다.

“아빠, 무슨 오해가 있었든 지금은 이렇게 다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요.”

조지가 게슴츠레한 시선을 일레인에게 돌렸다.

“오호, 우리 조카 일레인은 참으로 어른스럽단 말이야. 그러니 바이올렛이 그리 엉망이어도 백작가 안살림이 제대로 돌아가지, 응?”

짝.

거친 마찰음이 조지의 뺨에서 울렸다.

“이래서 제가 조지 삼촌과 다투게 된 거라고요. 엄마와 일레인을 묶어서 밉살스러운 말을 해대서. 삼촌, 제발 술을 좀 끊어요. 이게 뭐야!”

조지의 말에서 바로 핑계 댈 구실을 찾은 다이앤이 재빠르게 조지의 뺨을 올려 치며 눈으로 경고했다.

‘제발 그 입 닥치라고요. 훗날을 기약하려면.’

다이앤의 눈빛에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 조지가 재빨리 헤헤, 비굴하게 웃었다.

“형님, 제 혓바닥이 가끔 주책이 없지 않습니까? 커어, 술에 취한 채 마차에 전속력으로 실려 오느라 몇 번 토했더니 등가죽이 뱃가죽하고 딱 달라붙었네. 샬럿 누님, 이 동생을 위해 무얼 준비했어?”

참으로 뻔뻔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날 만찬은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갖가지 고급 요리가 반짝거리는 은 식기에 올려져 있는 긴 만찬 테이블에서 주인석에 앉은 샬럿 후작 부인은 줄곧 침묵을 지켰다.

조지 크라몬드의 필론 하우스 방문으로 불미스럽게 번졌을 다이앤의 추문을 가리게 되었으니, 더 이상 저 천박한 놈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에 조지를 두고 앉은 크라몬드 백작도 입에 음식을 가득 넣은 채 끝없이 떠드는 조지 때문에 줄곧 얼굴을 찌푸린 채 침묵을 지켰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이앤은 혹시라도 조지 입에서 딴말이 나올까 극도로 긴장한 상태라 아무 말도 할 여력이 없었다.

일레인은 자꾸 자신에게 강렬한 시선을 던져오는 맞은편의 펠릭스 때문에 두근거리는 가슴과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나지 않았다.

펠릭스는 줄곧 일레인을 바라보면서 백작이 부탁한 일을 떠올렸다.

“조지도 조지지만 여왕이 심상치 않아. 그러니 일레인에게 재산을 은닉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해 주어야 하네. 내가 루덴에서 여왕을 알현하고 모로코에 가서 해적 놈들을 깨부순 후 선원들을 구출해 오는 동안, 자네는 일레인이 자네가 제시한 안을 능숙하게 실행할 수 있게 가르쳐 놓아야 해. 부탁하네.”

펠릭스는 일레인과 이 주 정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후엔 마트비아 공국에 가서 일레인을 맞이하기 위한 자격을 얻어 낼 예정이었다.

그 이 주 동안 필연적으로 일레인과 아주 가까이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옆에서 돼지처럼 쩝쩝거리는 놈 따위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제각기 다른 생각을 하느라 침묵하는 가운데 조지는 와인이 아주 맛있다며 물처럼 마시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쯧, 알렌. 조지를 별채 3층 손님방으로 모시게.”

샬럿이 언짢은 목소리로 뒤에 시립해 있는 하인에게 명했다.

하인이 부축해 일으킬 때 조지는 비틀거리며 완전히 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일레인의 날카로운 눈은 조지가 몸을 돌릴 때 다이앤과 눈짓을 주고받는 걸 포착했다.

‘설마, 취한 체하는 거였어?’

다이앤과 조지의 만남이 일레인이 생각하고 있는 종류의 추문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대체 저 둘이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일레인은 몸을 돌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뒤에 서 있는 하녀 안나에게 눈짓했다.

안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뷰컴에게 조지를 잘 감시하란 말을 전하기 위해 식당에서 나갔다.

조지가 사라지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만찬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출생의 비밀이랍시고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는 조지가 나가자 다이앤은 이제 여유 있게 펠릭스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펠릭스, 이번엔 얼마나 머물 것인가요? 투자의 귀재라던데, 저한테도 투자를 좀 가르쳐 주세요.”

투자를 배운다는 빌미로 펠릭스를 자신의 매력에 퐁당 옭아맬 계획으로 다이앤이 교태롭게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크라몬드 백작과 펠릭스가 당황하며 눈을 마주쳤다.

백작이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달래듯 다이앤에게 말했다.

“펠릭스 씨는, 흠, 일레인과 좀 할 일이 많구나. 일레인이 우리 백작 가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지 않니? 그래서 내가 좀 부탁을 한 것이 있단다, 다이앤.”

“…또, 일레인이야!”

갑자기 다이앤의 얼굴이 표독스럽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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