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감히 나의 뮤즈를 그 더러운 입에
마침 출가한 두 딸, 엘리자베스와 조지아나를 맞으러 잠시 살롱을 나갔다 들어오던 샬럿 후작 부인은 한눈에 사태를 파악했다.
“일레인, 네가 세오드 성에 칩거하면서 저리 멋진 그림만 그리느라 세상 소식에 무지하구나. 그러게 내가 진작부터 세상일에 좀 관심을 가지라고 했지.”
샬럿이 일레인을 꾸짖었다.
“요 몇 년 새 마치 후작은 우리 브리티나에 중대한 업적을 많이 세우시면서 가문의 부도 무섭게 늘리셨단다. 그렇지요, 앤? 이 속도로 부를 쌓아 가시면 5년 후에는 마치 가문도 크라몬드 상사의 채권을 한 다섯, 아니 한 열 장 살 자격은 되시겠지요?”
“…….”
마치 후작 부인의 얼굴빛은 이제 한참 왕성하게 타오르는 석탄 덩어리 같았다.
샬럿 해밀턴 후작 부인은 평소 매서운 혀로 유명했다. 그래서 마치 후작 부인도 샬럿이 없는 틈을 타 일레인을 공격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일레인마저도 마치 후작 부인의 예상과 달랐다.
일레인과 샬럿에게 연이어 뺨을 얻어맞듯 모욕을 당한 마치 후작 부인은 정신이 아득해져 금세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유, 이 좋은 날 투자니 채권이니 하는 골치 아픈 이야기는 그만하시고, 여기 이 조각상을 좀 보세요. 제가 이번 겨울에 아주 어렵게 모셔 들인 베리타스 조각상이랍니다.”
샬럿이 노련하게 화제를 바꿨다.
샬럿이 가리킨 건 로마 신화 속 진실의 여신인 베리타스를 대리석으로 조각한 작품이었다.
얼굴을 가린 얇은 베일은 실제 천처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고, 그 밑으로는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아름답게 드러나 있다. 아름답게 주름이 진 천을 걸친 다리와, 거짓을 상징하는 뱀을 밟은 발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아름다웠다.
“오스트리아 빈의 리히트호펜 백작이 조각한 진실의 여신상이에요. 글쎄 이 작품을 두고 모델이 백작의 딸이다, 아니다 고급 코르티잔이다 뭐다 지껄여 대던 자작 하나가 리히트호펜 백작한테 혀를 잘렸다지요. 인간과 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 작품을 두고 외설적인 음담패설을 지껄였다고요.”
간접적인 경고였다.
일레인이 그린 에로스 신 그림을 두고 불경한 말을 할 때엔 앞으로 해밀턴 후작 부인이 주관하는 예술 모임에는 발도 못 붙이리라는 경고.
“어머니. 오천 파운드도 넘는 예술품 자랑은 그만하시고요. 마치 후작 부인, 인도에서 들여온 기막힌 홍차를 가져왔는데 드셔 보시겠습니까? 레몬을 듬뿍 넣은 마들렌도 구워왔답니다.”
샬럿의 큰 딸 엘리자베스가 재빨리 마치 후작 부인을 구해 냈다.
물론 마치 후작가가 척박한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연 수입이 고작 오천 파운드란 사실을 슬쩍 흘리는 짓궂음은 어머니 샬럿을 빼닮아 있었다.
사교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는 곧바로 사교계 전체로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번 모임은 여왕의 개 마치 후작 부인이 크라몬드 가의 영애들을 어떻게 물고 씹는지 사교계의 관심이 총 집중되어 있기도 했다.
마치 후작 부인은 어떻게 살롱을 나와 안마당의 정원에 마련된 티 테이블로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당황해 있었다.
아예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할 정도로 크라몬드 백작가 작은 영애에게 창피를 주어 여왕의 환심을 사려던 계획이 무산될까 너무 두려웠다.
되레 자신이 뼈도 못 추릴 정도로 크라몬드와 해밀턴 가문의 여인들에게 당한 사실이 퍼지면 여왕이 얼마나 분노할까는 더욱더 두려웠다.
그래서 인도와 중국에서 들여온 귀한 차를 건성으로 마시며 머릿속으로 어떻게 하면 일레인을 깔아뭉갤까 궁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마치 부인의 눈에 마침 정원에 들어서는 다이앤이 포착되었다.
“어마! 크라몬드 가 영애들께선 사이가 무척 좋은가 봐요.”
마치 부인이 살롱에서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며 호들갑스럽게 외치자 모두 고개를 돌려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살롱의 문을 통해 정원으로 들어서는 다이앤의 자태는 지극히 아름다웠다.
차이나 황실에 진상되는 연한 진주빛 실크로 만든 와토 드레스는 초록색 가는 줄기와 붉은 양귀비 꽃 무늬가 아름답게 직조되어 있었다.
걸친 드레스 한 벌만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데, 머리에는 한 알이 어지간한 성 한 채 값을 넘어서는 블루 다이아몬드 열 개나 금실로 엮어 늘인 장식까지 하였으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으로 바르고 바른, 걸어다니는 성채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일레인과 다이앤이 거의 흡사한 드레스를 입었다는 거였다. 보통 사교 모임에서 서로 디자인이 겹치는 드레스를 피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분명 겨자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오라 했건만.’
설사 아이보리 색 드레스로 잘못 알아들었다 해도, 살롱을 보고 돌아가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올 수도 있었다.
일레인은 대체 다이앤이 왜 이런 경우 없는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이앤은 일레인을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와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를 했다.
“마치 후작 부인, 더비스 남작 부인. 캐시어 남작 부인, 반갑습니다. 크라몬드 백작가의 장녀 다이앤입니다.”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펴고 난 후에야 다이앤은 일레인의 옷차림을 본 것처럼 ‘아!’ 소리를 흘렸다.
“일레인, 왜 나랑 같은 색의 옷을 입은 거야? 겨자색 드레스를 입는다고 하지 않았어?”
동그랗게 눈을 뜬 채 놀란 듯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는 다이앤은 순진하고 무해해 보였다.
그러자 마치 후작 부인과 일행의 시선이 일레인에게 향했다. 여섯 개의 눈동자엔 비난과 조롱이 가득했다.
‘좀 전에 그리 잘난 체를 하더니. 언니의 미모를 질투해 같은 색 드레스나 입고.’
번뜩이는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명확했다.
일레인은 이건 다이앤이 수작을 부린 거라는 잘 알았다. 그래도 왕비의 개떼들 앞에서 가족을 꾸짖는 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도 참는 수밖에 없었다.
수습은 언제나 그러했듯, 일레인의 몫이었다.
일레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겨자색 드레스를 입으려고 했는데 화장수를 엎질렀어, 다이앤. 귀한 손님들 오셨는데 아무 옷이나 입으면 예의에 어긋나잖아. 그래서 아빠께서 특별히 선물해 주신 귀한 옷을 입었던 것인데, 언니도 같은 마음이었구나.”
아주 매끄럽게 상황을 해결하는 말에, 다이앤의 눈썹이 순간적으로 축 늘어졌다.
‘어, 이게 아닌데.’
겨자색 입으라고 한 건 너이지 않냐고 일레인이 따져 물을 것이라 예상했던 다이앤이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이렇게 정중하게 경위를 설명하는 동생을 더 책망하는 것도 남들 보기 좋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하긴 내 드레스는 지난 신년 연회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비께서 입으셨던 것과 같은 양귀비 꽃무늬고, 네 드레스는 지금 보니 이름 모를 들꽃을 수놓은 거네.”
다이앤이 적당히 장단을 맞추자, 마치 부인 일행은 좋은 가십거리 하나 놓치게 되어 영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게다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드레스의 천이 유럽 최고의 왕가에서도 사용하는 것이라니, 부럽고 질투 나는 시선으로 두 영애의 옷을 힐긋거렸다.
샬럿과 두 딸은 안심한 얼굴로 “자자, 귀한 차 좀 드세요.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귀한 차랍니다.” 라며 차를 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치 부인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이대로 돌아갔다간 남편에게 어떤 폭력을 당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제 체면이고 뭐고 불독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로 작정을 했다.
“일레인 영애, 펠릭스 페일른이 국채와 채권 투자의 귀재인 것은 확실하나, 그가 판 것이 채권과 국채뿐만이 아닌 건 알고 모델을 세우신 거죠? 크라몬드는 대단한 가문이니 모델 하나도 신경 써서 고르지 않았겠습니까?”
아예 대놓고 더러운 추문을 끌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건 샬럿이 대신 막아 줄 수 있는 성질의 가십도 아니었다.
좌중의 눈이 모두 다 일레인에게 쏠렸다.
일레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홍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딸각 소리가 나게 소서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마치 후작 부인을 똑바로 직시했다.
“펠릭스 페일른이 지사장으로 있는 골든우즈 투자 회사는 지난 몇 년간 유럽 전체에서 여러 왕실과 대공가, 최상위 귀족 가문의 투자를 주로 의뢰받아서 엄청난 성과를 올렸지요. 마치 후작 부인께선 펠릭스 페일른 씨가 채권과 국채 외에 무엇을 팔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제가 그림만 그리느라 세상 물정을 몰라 묻습니다.”
“!”
저 여우 같은 것이!
마치 후작 부인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골든우즈 사의 실질적인 오너는 늙은 아메리카 인이라고 들었어요. 해싱턴 공작께선 그저 지분만 투자하신 거라고. 중요 고객은 아메리카 인께서 상대하시고, 펠릭스 페일른 씨는 주로 귀족 부인들을 상대로 투자금을 예치했다고…….”
“그러니까 그 귀족 부인이 누구시냐고 묻는 것입니다, 후작 부인.”
일레인은 후작 부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일레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오싹한 살기를 담고 마치 후작 부인을 노려보았다.
감히 나의 뮤즈를 그 더러운 입에 담아!
“그, 그건…….”
마치 후작 부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이름을 말할 수 없다. 가십은 뒤에서 속닥거리는 것이지, 이렇게 공식적인 티 모임에서 이름까지 말했다간, 거론된 귀족 부인에 의해 마치 후작 부인은 가루가 되게 비난당할 것이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더비스 남작 부인이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아유, 일레인 영애. 아직 사교계에 나오지 않아서 예법에 어두우시군요. 그런 추문을 어떻게 입에 담는답니까? 그저 그런 소문이 있더라 정도만…….”
“펠릭스 페일른 씨는 우리 크라몬드 상사에서 각종 국채와 채권에 투자하는 데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문의 상사와도 얽혀 있어서 제가 추문을 그냥 들어 넘길 수가 없군요. 제가 펠릭스 씨에게서 무엇을 샀다는 귀부인들이 누구신지 하나하나 다 알아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여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