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철없이 예쁘기만 한 인형의 배반
“가진 옷들 중 최고로 입고 내려오라고 했다고?”
다이앤이 일레인이 보낸 하녀 안나에게 되물었다.
“예, 마치 후작 부인 일행이 오는 건 공연한 트집을 잡기 위해서니 크라몬드 가문이 가진 부를 아낌없이 과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으래?”
연지며 볼에 바를 분, 커다란 장신구 함이 놓여 있는 화장대 앞에서 거울 속으로 안나를 노려보며 다이앤은 입을 비쭉거렸다.
“알았다고 전해. 다시 차려입어야 하니까 시간은 좀 걸릴 거라고 하고.”
안나를 내보내고, 수잔을 비롯한 하녀들까지 모두 물린 다이앤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엄마와 똑 닮은 푸른 눈에 녹아내릴 듯 빛나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대단한 미인이 자신과 눈을 맞춰 왔다.
아빠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흔적은 하나도 가지지 않은, 오로지 템슨 가 바이올렛만 빼다 박은 외모.
전에는 아빠를 빼닮아 풍성하나 갈색의 밋밋한 눈동자와 머리칼을 가진 다이앤을 평범한 외모를 가졌다고 무시했었는데…….
이젠 그 외모가 너무나 부러웠다.
“왜 네가 왕족은커녕 공작가나 백작가의 후계자와도 혼인할 수 없는지 말해 줄까, 다이앤? 너는 크라몬드 핏줄이 아니야!”
닷새 전 조지 크라몬드가 커피하우스의 밀실로 끌고 가 다짜고짜 지껄였던 말이 다시 머리를 쾅쾅 울렸다.
“너는 템슨 가문이 멸문될 때 병사들에게 범해진 결과로 태어난 천한 핏줄의 사생아야. 아무리 윌슨이 널 친딸처럼 키웠다고 하나 과연 고귀한 분들도 그리 생각할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빠가 얼마나 날 아끼는데.”
다이앤은 화장대 위에 놓인 향수병을 들어 거울에 던져 버렸다.
쩍 소리를 내며 거울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조각조각마다 불안에 떠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조롱하듯 다이앤에게 물었다.
‘그럼 친딸인데 왜 아빠는 네게 중요한 일은 하나도 맡기지 않은 걸까? 병신같이 질질 짜기나 하는 엄마 대신 누가 크라몬드 가문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지 봐봐.’
“아니야! 아니야!”
조지의 무서운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 다이앤은 요 며칠 일레인처럼 분별 있게 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일레인을 도와 백작가의 대소사 중 몇 개를 넘겨받으려고도 해 보았다.
그러나 틈이 없었다.
이미 일레인이 완벽하게 장악한 백작가의 일에서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다이앤은 그저 철없이 예쁘기만 한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다이앤, 억울하지 않아? 네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너를 멸시한 그들이 원망스럽지 않아?”
아니라고, 거짓말 하지 말라고 조지의 뺨을 마구 내리칠 때 조지는 다이앤의 두 손을 잡아 제지하면서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게, 다이앤. 너와 같이 크라몬드 가의 혹처럼 멸시받은 내가, 이 조지 크라몬드가 널 도와줄게, 다이앤. 네게 크라몬드 가를 넘겨줄게.”
조지 크라몬드의 제안은 너무도 잔혹하고 무서웠다. 그래서 또 이브를 꼬여낸 뱀의 유혹처럼 강렬했다.
‘사탄은 되고 싶지 않아. 사탄은 되고 싶지 않아!’
순간마다 바뀌는 마음 때문에 다이앤은 처음으로 자신이 불쌍해서 울었다.
울다 보니 문득 펠릭스 페일른이 생각났다.
‘일레인은 마땅히 내 것이어야 할 것을 다 빼앗았어. 아빠의 사랑, 엄마의 신뢰, 샬럿 고모의 애정까지. 하지만 펠릭스만 내 것이 된다면, 일레인이 마음에 담은 펠릭스만 내 것이 된다면!’
펠릭스는 출신이 자신처럼 천하다고 했지. 대신 ‘마이더스의 손’이라고 불릴 정도로 빼어난 투자의 귀재라고 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이가 크라몬드 가문 못지않은 재산까지 가졌다면, 그렇다면 나와 참 어울리지 않겠는가.
“일레인도 뭐 하나 내게 양보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
다이앤은 거울 속 조각난 미인에게 비웃듯 선언했다. 그리고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수잔! 가서 일레인이 무슨 색깔 드레스를 입는지 알아 와.”
이제부터 다이앤은 일레인보다 돋보이는 것에만 집중할 예정이었다. 그래야 펠릭스가 일레인보다 자신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지 똑똑히 알게 될 터이니 말이다.
다이앤은 펠릭스가 당연히 자신을 더 좋아하리라 믿었다. 또한 일레인은 당연히 펠릭스를 자신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믿었다.
가문을 위해서 일레인이 펠릭스를 밀어낸 것도, 그럼에도 펠릭스는 일레인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사실도 모두 다이앤의 관심 밖이었다.
다이앤의 세계는 늘 자신을 중심으로만 돌아갔으므로.
다이앤에게 말을 전하러 갔던 안나가 다른 하녀 둘을 더 데리고 왔다.
“아가씨, 이거 말이지요? 데뷔탕트 때 입으시려고 맞춰 둔 거.”
“그래, 오늘이 데뷔탕트나 다름없어.”
처음이 중요하다.
처음에 밀리면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사교계다. 창과 칼 대신 아름다운 드레스와 장신구를 차려입고, 살벌한 무기 대신 우아한 화법으로 상대를 말려 죽이는 곳. 그곳이 사교계의 모임이었다.
일레인은 한 번도 그런 모임을 좋아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 져 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나는 크라몬드 가문의 수호자니까!’
안나가 드레스 색과 같은 계열의 다마스크 산 진주색 비단 스타킹을 일레인의 발에 꿰어 주기 시작했다.
다른 하녀는 치마를 부풀게 하는 고래뼈로 만든 파니에를 들고 서 있다.
우스꽝스런 파니에까지 걸치고 두 팔을 하늘로 들고 서 있는 일레인의 머리 위로 하녀 셋이 조심스럽게 연한 아이보리 빛 실크 드레스를 입혔다.
중국의 칸토 항에서 실어 온 진주색 실크는 처음 짤 때부터 여러 가지 유백색의 비단 실로 무늬를 짜 넣은 비단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천 위로 따로 수를 놓을 때 생기는 주름이 하나도 없이 매끈하게 아름다웠다.
일레인이 입은 진주빛 드레스 단 아래에는 작은 중국 들꽃을 금실과 은실, 붉은 비단실로 직조해 넣었다. 불빛 아래 서면 다양한 야생 꽃이 은은하게 드러나 봄의 벌판에 선 것처럼 황홀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직조하기가 극도로 어려워 차이나에서도 황후나 황제의 총애받는 황실 여인이나 입는다지.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 가의 왕비와 공주만이 입었고.’
아빠 크라몬드 백작은 겨우 드레스 여섯 벌을 만들 수 있는 소량의 비단을 어렵게 구해 아내와 두 딸에게 선물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드레스를 입었으니, 머리는 한참 유행 중인 높다란 가발 대신 소박하게 작은 진주를 꿴 금실과 함께 땋아서 올렸다.
빈틈없이 치장한 후 일레인은 적을 무찌르기 위해 출정하는 장군처럼 늠름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여왕의 개들인 마치 후작 부인과 그 일행은 샬럿 해밀튼 후작 부인이 자랑하는 살롱의 전시실에 모여 있었다. 거기엔 최근 일레인이 그린 바이올렛 크라몬드 백작 부인의 초상화와 펠릭스의 그림도 전시되어 있었다.
“어머, 에로스 신을 그리신 분이 바로 일레인 영애시라고요?”
일레인이 살롱에 들어섰을 때, 꼬리를 활짝 편 공작새처럼 가발과 깃털로 요란스럽게 머리를 장식한 마치 후작 부인이 인사도 나누지 않고 다짜고짜 공격을 시작했다.
마치 후작은 이전에는 자작으로, 브리티나 최북단의 척박한 섬에 영지 하나 가지고 있던 최하급 귀족이었다.
가난하여 후작이 태어나자마자 그 어미가 젖어미 유모로 아들 곁을 떠나야 할 정도로 궁핍한, 이름뿐인 귀족가.
그런데 유모로 돌보게 된 아이가 운이 좋게도 왕족 마틸다였다.
마틸다가 여왕이 된 후로 마치 가문은 자작에서 후작으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마치 후작 부부에겐 가문의 영광이 마틸다 여왕과 함께 시작되었기에 여왕이 어여뻐하는 이가 마치 가문의 은인이고, 여왕이 미워하는 자는 미치 가문의 원수였다.
그래서 마치 후작 부인은 여왕이 싫어하는 크라몬드 백작 부인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들개처럼 물어뜯었다.
그리고 지금 또 나폴리에서 들여온 비단 부채를 야단스럽게 펄럭거리며 일레인과 다이앤을 물어뜯으러 온 거였다.
“저기 그림 주인공은 골든우즈 투자사의 브리티나 지점장이 아닌가요? 투자 상품도 팔지만, 그 이상도 판다는……?”
마치 후작 부인의 말에 그 뒤에 시녀처럼 서 있던 귀족 부인들 사이로 의미심장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꼿꼿하게 세운 일레인의 등 뒤로, 총을 맞은 듯한 전율이 흘렀다.
‘나나 언니를 물어뜯을 거라 예상했는데. 감히 펠릭스를 끌어들여서 내 평판을 망치려 들어!?’
감히, 나의 펠릭스를!
펠릭스의 구애를 거절했으면서도 일레인은 펠릭스의 이름을 더럽게 입에 담는 마치 부인에게 맹렬한 적의를 느꼈다.
그 적의가 너무 커서, 일레인은 일단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렸다.
일레인의 침묵을 마치 후작 부인은 사교계에 아직 데뷔도 못한 어린 영애의 당황으로 착각했나 보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또 칼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요새 크라몬드 상사의 상선이 다섯 척이나 해적에게 납치되어서 투자한 이들이 투자금을 돌려 달라 난리라지요? 게다가 상사가 발행한 채권의 2분기 이자도 곧 지불 날짜가 다가오는데…….”
“마치 후작가에선 우리 크라몬드 상사의 무역선에 투자하셨던가요? 아님 채권을 사셨던가요?”
후작 부인의 말을 싹둑 잘라드는 일레인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너 따위가 우리 상사의 무엇을 샀을 리가 없다는 의구심.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었거든요. 우리 크라몬드 상사는 투자를 받을 때도, 채권을 팔 때도 자격 기준을 엄격하게 가려 받는다고요.
위험으로 가득 찬 바닷길에서 하나하나가 성 한 채 값도 더 되는 고급 무역품을 싣고 오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기는데, 그깟 배 한두 척 해적에게 나포되었다고 징징 짜면서 투자금 내놓으라고 독촉할 잔챙이들은 상사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무, 무슨!”
고작 열일곱 풋내기한테 뺨을 맞은 듯 모욕을 당한 후작 부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