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20화 (20/112)

#제20화. 예감이 나빴다

“오늘 요리들은 모두 얼마 전에 마틸다 여왕이 왕실 만찬에 내놓은 것들이에요. 내가 특별히 왕실 요리사에게 부탁해 레시피를 얻었지요.”

샬럿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음식들을 가리켰다.

일레인과 바이올렛, 그리고 특히나 한 번 꼭 만나 보고 싶었던 스탠픽셔 화가를 환영하기 위해 샬럿은 며칠 전부터 요리장을 닦달해 최고의 요리를 준비했다.

해밀턴 후작은 국정에 참여하기 위해 루덴에 머물고 있고, 딸 둘은 이미 결혼하여 출가했다. 그래서 방문객이 없는 아침 오찬은 주로 다이앤과 둘이 들어야 했는데, 샬럿에겐 이게 무척 큰 고역이었다.

그러다 가장 예뻐하는 조카 일레인과 평소 만나 보고 싶던 화가까지 온다니, 기뻐 어쩔 줄 모르는 것이다.

보기에도 군침이 도는 요리가 해밀턴 후작가의 문장이 각인된 은그릇에 담겨 차례로 서빙되었다.

“여기 어린 송아지로 만든 호치포치와 양고기 에스칼로프는 특히 여왕이 좋아하는 요리랍니다.”

샬럿이 고기 스프와 양고기에 빵가루를 발라 튀긴 요리를 가리켰다.

일레인은 스프를 한 번 떠먹고 에스칼로프 한 조각을 먹어 보았다. 튀김 요리가 특히 바삭하게 맛있었다.

샬럿과 엘렌은 예술에 대한 관심 덕분인지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두 사람은 베니스의 산마르코 성당 안에 있는 거대한 티치아노의 그림 ‘성모승천’의 색감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일레인은 옆에서 묵묵히 요리를 깨작거리고 있는 다이앤에게 말을 걸었다.

“다이앤, 무슨 일이 있어? 얼굴이 창백해.”

그러자 다이앤은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을 들어 우아하게 입가를 닦더니 일레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처럼 얼굴이 타면 시골 아낙네 같이 않겠니?”

습관처럼 일단 비꼬고 나서, 웬일인지 다이앤이 한숨을 다 푹 쉬었다.

“미안해, 일레인. 지난번에 그렇게 오고 나서 마음이 안 좋았어.”

“……?”

철이 들은 건가 아님 그냥 하는 소리인가.

무엇이 되었든 가여울 정도로 창백해져 아까부터 언니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엄마를 위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럼 언니, 엄마께 다정하게 말을 건네 봐. 그렇지 않아도 엄마도 언니 때문에 많이 마음 아파하셨어.”

다이앤은 상석 여주인 자리에 앉아 있는 샬럿 고모와 페일른 부인 사이에 앉아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죄송해요. 지난번에는 제가 너무 심하게 말했어요. 오, 엄마. 제발 용서해 주세요.”

“다이앤……!”

뜻밖의 사과에 엄마의 눈엔 벌써 감격의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시스티나 대성당 그림, 이야 그 짜임새란 정말! 하도 열심히 올려다봐서 이틀 동안 고개도 돌리지 못했어요.” 라고 말한 고모까지 놀란 눈으로 다이앤을 바라보았다.

다이앤도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르 흘리며 입술을 떨었다.

“혼자 여기 필론 하우스에서 지내면서 엄마 생각을 많이 했어요. 죄송해요, 엄마.”

“아니, 아니야, 다이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다. 엄마가 되어서 네게 심한 말이나 하고. 미안해, 다이앤.”

모처럼 흐뭇한 모녀의 사과와 화해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왠지 일레인의 마음 한구석에 오히려 불안이 피어올랐다.

‘뭔가 있어. 뭐일까, 그게.’

그게 무엇인지는 사흘 후 하녀 안나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가씨, 여기 하녀들이 수군대는 말이 있는데요.”

일레인과 바이올렛을 환영하기 위해 여러 인사가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곧 도착할 손님맞이용 드레스로 갈아입는 대공사를 시작하는데 아까 세수 시중을 들 때부터 안색이 어두웠던 안나가 쭈뼛쭈뼛 말을 꺼냈다.

“다이앤 아가씨가…….”

“다이앤이, 뭐?”

다이앤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가슴이 철렁한 일레인이 안나를 다그쳤다.

지난 사흘 동안 다이앤은 평소와 달리 무척 친절하고 다정했다. 세오드 성에 있을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표정은 밝고 공손했고 상대를 좀 무시하듯 내려져 있던 입매마저 살포시 웃음을 머금은 부드러운 입매로 변했다. 그래서 정말로 천사처럼 아름다운 기운을 거대한 필론 하우스 곳곳에 뿌리고 다녔다.

세오드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샬럿까지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레인은 그런 다이앤의 변화가 미심쩍단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저 변화가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공연히 변했을 언니가 아니었다. 감당 못할 정도로 큰일이 있었겠지.

그래서 안나더러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은밀하게 알아보라고 그제 말해 두었던 참이었다.

“열흘 전에 다이앤 아가씨가 수잔과 다른 하녀 둘을 거느리고 루덴의 의상실에 드레스 가봉하러 갔었는데요. 의상실이 있는 케스터 가에서 조지 경을 만났나 봐요. 그런데…….”

“조지 삼…….”

‘삼촌’이라는 말을 하려던 일레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조지가 백작위와 크라몬드 가문의 재산을 탐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전히 ‘삼촌’이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개자식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그런데?”

“그, 그런데…….”

안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일레인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안나!”

엄하게 부르고 나서야 안나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두 분이서 커피 하우스에 갔었는데……, 마침 점심때가 지나서 간단하게 식사도 할 수 있는 룸에 계셨었다는데…….”

예감이 나빴다. 벌레가 기어가는 느낌이 스멀스멀 꼬리뼈부터 올라왔다.

“수잔이랑 다른 하녀들이 같이 있지 않았어?”

“마차에서 기다리라고 했대요.”

보통의 삼촌과 조카 사이라면 커피 하우스의 룸이 아니라 한밤중에 침실에 단둘이 있었다고 한들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조지라면!

그게 다이앤이라면!

문제가 되고도 남았다.

“이 일을 누가 아니? 샬럿 고모도 아셔?”

“아, 아니에요. 제가 수잔한테 홍옥 브로치 하나 주면서 살살 꼬셨더니…….”

“수잔하고 다른 애들 입단속 단단히 시켜. 이 이야기가 밖에 새어 나가면 세 사람 모두 내 손에 죽을 줄 알라고 해.”

“예, 예, 아가씨.”

일레인 아가씨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죽이기까진 안 해도 다리 하나는 족히 부러뜨리고 그 어떤 귀족 가에도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할 터이니 세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물 것이다. 순진한 안나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일레인은 백작가 안살림을 책임져 오면서 일찍부터 세상을 잘 알고 있었다. 말하지 말아야 한다면 더욱 입이 근지러워 병이 나고야 마는 것이다. 미다스 왕에게 죽임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친 이발사가 있지 않은가.

“뷰컴 씨 좀 불러 줘.”

크라몬드 백작가 집사장 뷰컴 씨가 왔을 때 일레인은 안나까지 물렸다. 그리고 커피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말했다.

“곧 소문이 어떻게 날지 몰라요. 당장 사람을 보내 여기 필론 하우스로 조지를 데려오세요.”

조지가 와서 샬럿 고모와 엄마 바이올렛, 일레인과도 더할 나위 없이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다이앤이 조지와 이상한 분위기를 보였다고 해도 세간의 미심쩍은 시선을 무마할 수 있다.

“예,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려가면 오늘 저녁 만찬에는 맞춰서 올 수 있을 것입니다.”

충실한 집사장 뷰컴이 서둘러 나갔다. 그리고 안나가 들어왔다.

“벌써 다들 오셨어요, 아가씨. 어서 내려가 보셔야지요.”

“안나, 이 드레스 말고 그거, 차이나 황실에 진상된다는 실크로 만든 와토 드레스 있지? 그걸로 가져와. 입는 게 복잡하니 애들 몇 더 불러서 옷시중 들라고 하고. 다이앤에게도 가서 말해. 아빠가 가지고 오신 비단 중에서 그 노란색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내려오라고.”

왜 갑자기 얼굴 정도나 알았던 마치 후작 부인이 굳이 필론 하우스까지 와서 환영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는지 의아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온갖 추문을 들이대 크라몬드 가의 영애들을 갈갈이 찢어 놓으려고.’

마틸다 여왕이 직접 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엄마 바이올렛을 극도로 미워하는 이유가 여왕의 남편 윌리엄 공이 한때 바이올렛을 열렬하게 마음에 담아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보단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크라몬드 가문이 호락호락하게 굴복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꺾으려는 거였다.

그러나 여왕의 자리가 다이앤과 일레인까지 헐뜯으라고 시킬 만큼 한가한 자리인가.

‘늘 알아서 기는 것들, 여왕의 똥구멍이라도 핥아 한자리 차지하려는 것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엄마를 괴롭혔고 지금은 나와 다이앤까지 괴롭히려고 오는 것이지.’

엄마는 늘 그들을 피해 숨었지만, 나 일레인 크라몬드는 다르다.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단 차이나 속담도 있지 않은가. 우리 크라몬드 가가 가진 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제대로 보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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