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넌 내게서 벗어나지 못해, 일레인
“아예 모로코 바르바리 근거지를 초토화시키자는 말인가?”
과감해도 지나치게 과감한 전략이었다. 상선을 동원하는 거야 별문제 없지만 대륙 최강으로 이름 높은 알베르토의 용병을 1000명이나 부리려면 봉급만 1인당 1두카트에, 화약 값은 또 별개였다.
상선이 연이어 나포되었단 소식에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이 많이 떨어졌다. 또 상선 출항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한 채권의 이자 지불 날짜도 코앞이었다.
한마디로 크라몬드 상사는 현재 자금 융통에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모든 사안을 펠릭스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놈들을 그냥 두면 브리티나 여왕이 크라몬드 상사의 상선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온 해적에게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럼 해적놈들뿐 아니라 해적을 가장한 각국의 해군들까지 모두 우리 상선에 눈독을 들이겠지요. 그러면 크라몬드 상사는 당장 망하고 말 것입니다!”
펠릭스의 강경한 말에 크라몬드 백작도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병은 사는 순간부터 돈이 어마어하게 들어간다. 지금 백작으로서는 그 자금을 댈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상사의 채권을 추가로 발행한다고 해도 사 줄 이를 찾기 어려울 터였다.
빈익빈 부익부라, 잘 나갈 땐 너나없이 모두 투자하지 못해 안달이지만, 어려움이 있단 소문이 돌면 열었던 지갑도 도로 닫는 게 이쪽 분위기였다.
백작의 근심을 읽어낸 펠릭스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로코의 바르바리 해적 근거지를 소탕하는 비용은 제가 다 대겠습니다. 대신 백작께서 가지고 계신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 3할을 주십시오.”
“3할이나 되는, 주식을……?”
3할이면 크라몬드 상사에서 백작 다음의 대주주가 된다.
“또 이자 지급 만기가 다가오는 채권도 제가 인수해 이자를 지불하겠습니다. 채권값은 나중에 모로코 해적 놈들에게 선원을 되찾고, 로이드 보험 회사의 보험금을 받은 후에 청산해 주시면 됩니다.”
백작은 펠릭스의 제안을 따져보다 속으로 엄청나게 놀라는 중이었다.
“해싱턴 공작도 동의했나? 또 공동 대표라는 그 아메리카인도 동의한 사안인가?”
백작의 물음에 펠릭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제 개인 자격의 투자입니다.”
“자네 개인, 자격으로?”
대체 자네 자산이 얼마나 되기에 어지간한 소국의 한 달 치 재정 수입만한 금액을 우리 회사에 투자하겠다는 겐가.
물으려던 백작은 질문을 삼켰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펠릭스를 다시 살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혹시…….’
조지 그놈과 손을 잡고 크라몬드 상사를 장악하려 드는 것인가.
크라몬드 백작의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펠릭스는 크라몬드 상사의 대주주가 될 예정이었다. 일레인을 얻기 위해서였다.
‘넌 내게서 벗어나지 못해, 일레인.’
평생 사람들에게서 도망쳐 온 내가, 처음으로 가지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
그게 바로 너야, 일레인.
대공의 후계자란 신분은 당장 인정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레인의 데뷔탕트는 4개월 후인 내년 봄. 일레인이 유력 가문의 자제와 약혼이라도 하게 되면 낭패다.
그래서 펠릭스는 그 전에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과 채권을 최대한 장악해 일레인을 돈으로 얻어 낼 작정이었다.
크라몬드 백작은 펠릭스에게 대체 속셈이 무엇인지 따져 묻는 걸 뒤로 미뤘다. 지금은 당장 펠릭스의 말대로 바르바리 해적들을 다 죽여 없애는 것이 먼저였다.
“베인!”
백작이 스텔라 호의 선장을 호출했다.
“당장 이 주변에 있는 우리 상선이 몇 척이지? 대포가 장착되어 전열함으로 쓰일 수 있는 배가 스물세 척이던가?”
“스물다섯 척입니다, 백작님!”
“모두 다 여기 리스본으로 오라고 연통하게. 얼마나 걸리겠나?”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백작님!”
펠릭스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저도 알베르토에게 용병들을 이끌고 오라고 전언을 보내겠습니다. 대포와 총에 쓰일 탄환은 제가 아는 무기업자에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펠릭스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호!”
백작은 펠릭스를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젊은이가 보면 볼수록 대단했다.
“자네가 내 아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펠릭스.”
40대 후반의 크라몬드 백작이 진심 아쉬운 듯 펠릭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펠릭스가 빙그레 웃더니, 도발적인 어조로 응답했다.
“사위는 가능합니다, 크라몬드 백작님.”
“사위!? 으핫핫!”
그래서 이렇게 통 크게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거였군. 내세울 것 없는 신분의 사내가 크라몬드 백작가의 영애를 넘보려니.
의심이 해소된 크라몬드 백작은 눈가에 주름을 짙게 패며 웃었다.
“자네도 우리 다이앤의 미모에 반했구먼. 다이앤을 신부로 삼고 싶다는 청년들이 여기서 저기까지, 온 항구를 메울 정도야.”
“제가 원하는 건 다이앤이 아니라 일레인입니다, 백작님. 제가 일레인 크라몬드를 마음에 담게 되었습니다.”
“…일레인을?”
백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바로 사라졌다.
“그 아인 아직 어려. 우리 일레인은 너무 어리네. 게다가 자네는…….”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변변치 않은 신분이 아니던가.
상선 다섯 척이 연달아 나포되면서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겪고 있다 해도, 크라몬드 백작가의 자산은 펠릭스의 자산보다 훨씬 많았다.
…많은가?
어쩐지 자신이 없어져서 크라몬드 백작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자, 우리는 사무실로 돌아가 내 재산을 채권 형태로 바꿔서 은닉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해 보세나.”
크라몬드 백작이 펠릭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펠릭스의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레인에 대한 제 마음은 진실합니다, 백작님.”
펠릭스가 다시 고집스럽게 말했다.
하핫, 이거 참.
이 맹목적인 열정이란.
어쩐지 자신의 젊은 날을 생각나게 하는 펠릭스의 태도에 백작은 항구를 벗어날 때까지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향신료와 도자기, 비단과 고운 옥양목, 장신구와 보석 등을 파는 번화가를 지나 조용한 골목의 사무실에 이르렀을 때 백작의 얼굴은 진지해져 있었다.
“펠릭스, 고깝게 듣지 말게.”
“예, 말씀하세요.”
“일레인은 그림에 아주 재능이 빼어나네. 페일른 부인을 어머니로 두었으니 자네도 그 아이의 재능을 알아보았을 게야.”
“예, 정말로 대담하면서도 강렬한 붓 터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브리티나보다는 대륙 쪽에서 더욱 열렬히 환영받을 것입니다.”
“자넨 여인이 취미 이상으로 진지하게 예술을 하고자 할 때 따라붙는 시선을 잘 알지 않는가?”
“…예,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펠릭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음악이든 자수든.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면 어느 정도 소양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여인이 진지하게 예술을 한다고 나서면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었다.
“일레인의 그림은 강렬하지. 그 어떤 사내의 화풍보다 자유롭고 대담하네. 화가로선 보기 드문 재능이지. 그래서 일레인은 아주 강력한 가문의 사내를 만나야 한다네.”
신분, 또 신분에서 걸리는구나.
그깟 신분, 따지고 보면 백작보다 내 신분이 더 높은데. 평생 그 신분 때문에 이리저리 쫓겨다니며 동생까지 잃어야 했는데!
펠릭스의 입매가 불쾌하게 굳어졌다.
“일레인이 무슨 그림을 어떻게 그리든 감히 더러운 뒷말을 늘어놓을 수 없을 만큼 두려운 사내. 그게 내가 일레인의 짝으로 찾고 있는 사내야.”
그러니까 재산만 크라몬드 백작 못지않게 있다 뿐 내세울 가문이 없는 펠릭스는 일레인의 짝으로 부적합하단 거절이었다.
“자네는 그냥 내 아들을 하게나. 내가 후견인이 되어 주겠네. 어디 가서 무얼 하든 우리 크라몬드 가문이 강력한 후원자로…….”
“크라몬드 가문의 후원 따위 필요 없습니다, 백작님.”
펠릭스가 잘라 말했다.
그로서는 일레인에 이어 백작에게까지 신분 때문에 거절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사생아라고 냉대받으면서 생겨난 무수한 상처가 다시 벌어져 피를 흘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펠릭스는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전투욕이 솟는 사내였다.
“…미안하네, 펠릭스. 그러나 나는 일레인의 아비야. 아비는 어쩔 수 없이 딸의 미래를 최선을 다해 안전하게 해 주려 노력할 수밖에 없네.”
백작이 양해를 구하듯 펠릭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크라몬드 백작은 정말로 펠릭스를 좋아했다. 본인이 원한다면 양자로 입적할 용의도 있었다.
그러하기에 더더군다나 사위로는 생각하기 싫었다. 그건 가장 사랑하는 딸 일레인과, 아들처럼 아끼는 펠릭스 둘 다를 불행에 몰아넣는 짓이었다.
‘나와 바이올렛처럼.’
크라몬드 백작은 여전히 바이올렛을 사랑했다. 그러나 사랑한다고 해서 극심한 우울감에 가정도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아내를 둔 현실이 고통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백작은 펠릭스가 돈에 대해 가진 지독한 집착 이상으로 일레인을 집착하기 시작한 걸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큰 투자를 앞두고 언제나 그래왔듯 펠릭스가 노련하게 심중을 감췄기 때문이다.
‘백작, 당신을 존경하지만 아무리 반대하셔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저는 일레인을 가지고 말 것이니까요!’
펠릭스가 해싱턴 공작이 투자한 돈을 단기간에 오천 배 이상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냉철한 확률적 투자 마인드 덕분이었다. 도박과 다를 바 없는 투자 광기 속에서 매번 승률을 높게 올려 온 치밀한 마인드가 일레인을 얻는 데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먼저 크라몬드 상사의 주식과 채권을 확보해 일레인이 다른 새끼와 약혼하는 일이 없도록 만들고, 2년 후에는 신분을 되찾아 당당하게 청혼한다!’
이것이 펠릭스가 치밀하게 세운 일레인 얻기 프로젝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