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네가 윌리엄과 혼인하면
필론 하우스까진 마차로 나흘 거리였다. 낮 동안 말을 바꿔가며 쉼 없이 달리고, 잠은 여정 중에 있는 고급 여관을 통째로 세내어 머물렀다.
“바이올렛, 필론 하우스에 가면 나는 별채에서 조용히 그림만 그리고 싶어. 혹시 방문객이 날 만나고 싶다고 해도 거절해 줘.”
나흘째 되는 날.
필론 하우스 영지까지 한 시간가량 남았을 때 고된 여정에 창백해진 페일른 부인이 문득 엄마에게 말했다.
“그럼, 엘렌. 걱정하지 마. 나도 사교 모임이 싫어서 거의 다 거절하니까.”
하루 종일 마차의 진동에 흔들리느라 투명한 백지처럼 하얘진 얼굴로 엄마가 백합꽃처럼 웃었다.
“해싱턴 공작가와는 전혀 왕래를 안 하시나요, 펠일른 선생님?”
일레인이 문득 물었다.
비록 가문에서 내쳐졌다곤 하나 그래도 공작가의 적장녀였던 페일른 부인이다. 다이앤이 부인의 정체를 다 까발린 후, 일레인은 펠릭스의 정체가 내내 궁금했다.
“펠릭스가 오빠 해싱턴 공작과 함께 투자 회사를 운영한단다. 나는 거의 왕래하지 않지만 펠릭스는 조카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는 셈이지.”
페일른 부인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펠릭스는 누구 핏줄인가요?’
혹시 우리 크라몬드 백작가와 어울릴만한 귀족 가문의 사생아인가요.
귀족의 사생아라면 그쪽 가문에서 아들로 인정만 해 주면 되는데. 그럼 나머지는 내 쪽에서 마련해 마음껏 좋아해도 될 터인데.
그러나 그 질문은 페일른 부인에게 너무 잔혹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일레인은 차마 캐묻지 못하고 대신 커텐을 살짝 올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밀턴 가 영지가 시작되고 있었다.
수확이 끝난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저 멀리 숲이 무성하게 조성되어 있는 해밀턴 가의 배런 영지는 브리티나 밀 생산의 십 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만큼 방대했다.
저 멀리 여러 채의 건물로 이뤄진 필론 하우스가 보였다.
샬럿 고모의 남편 해밀턴 후작은 루덴의 중앙 정치에서 가장 막강한 중립파 수장을 맡고 있다. 그래서 해밀턴 가의 필론 하우스는 여왕의 궁정 못지않게 대단한 규모로 지어져 있었다.
“워! 워!”
마부가 갑자기 말을 멈춰 세웠다.
왜 벌써 말을 세우지? 후작의 영지에 들어왔기에 습격이 있을 리 없지만, 성에 가려면 한 시간은 족히 달려야 하는데, 왜 벌써!
일레인과 백작 부인은 긴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부인, 후작 부인께서 마중 나와 계십니다.”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샬럿이!”
일레인과 바이올렛, 그리고 페일른 부인은 하인이 열어 준 문밖으로 몸을 내밀고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일레인! 바이올렛! 아, 그리고 이 아름다운 분이 제이콥 스탠픽셔님이시겠군요!”
귀족 부인들이 타는 화려한 소형 사륜마차 옆에 서 있던 샬럿 고모가 드레스 자락을 들고 종종종 다가왔다.
“헤르메스와 헤스티아 그림은 우리 살롱에도 전시되어 있답니다. 영광입니다, 스탠픽셔 님!”
브리티나 예술계의 대모답게 샬럿은 페일른 부인에게 무릎까지 굽혀 보이며 지극하게 환대했다.
페일른 부인도 화급히 무릎을 굽혔다.
“후작 부인. 인사가 지나치세요. 엘렌 페일른입니다. 엘렌이라 불러 주세요.”
샬럿 고모의 시선은 이제 엄마에게로 향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바이올렛. 아이슬에서 온천물 실어다 데워 놓았으니 가서 몸 좀 풀어요.”
마차로 닷새나 걸리는 온천에서 물을 실어 올 정도로 단단히 환대의 준비를 해 놓은 샬럿 고모의 시선이 마침내 일레인에게 향했다. 이제까지 예의를 차린 환대의 표정을 짓고 있던 샬럿의 눈에 격한 애정이 차올랐다.
“일레인, 너는 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 좀 하자꾸나. 그래도 되죠, 바이올렛? 일레인 그림이 갑자기 확 좋아져서 대체 무슨 기적이 있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달려 나왔거든요.”
“그러세요, 샬럿. 일레인, 고모님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오너라.”
샬럿이 일레인에게 가진 지극한 애정을 잘 아는 백작 부인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와 페일른 부인을 태운 마차가 앞서 달리고 일레인과 샬럿을 태운 마차는 뒤에서 천천히 달렸다.
“무슨 일이에요, 고모?”
일레인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맞은편에 앉은 샬럿의 손을 잡고 물었다.
그림이 핑계란 건 진작에 눈치챘다. 샬럿 고모는 일레인과 단둘이, 그것도 화급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나온 거였다.
“무슨 일이기에 한 시간을 못 기다리시고 여기까지 나오신 거예요?”
일레인이 고작 일곱 살의 나이부터 크라몬드 백작가의 안살림을 장악하게 된 데는 샬럿 고모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다.
일레인이 열두 살이 되기까지, 샬럿은 여기 배런의 필론 하우스보다 루덴의 크라몬드 백작가에 머무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자주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바이올렛을 대신해 다이앤과 일레인을 챙기고, 백작가 큰 안살림을 관장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런 고모이기에 샬럿은 일레인에게 있어 엄마보다 더 엄마로 느껴지는 사이였다.
“조지 그 개자식이 영 수상쩍어!”
샬럿은 태어날 땐 브리티나 최고의 상단을 거느린 백작가 영애였고, 결혼해서는 브리티나 최고의 농업 귀족 가문의 안사람이기 때문에 세간의 평판에 연연하지 않았다. 마음먹고 행동할 땐 유럽 사교계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우아하고 교양 있었지만, 수가 틀려서 화를 낼 땐 저 시장의 푸줏간 집 여편네보다 더 살벌하고 질펀하게 혀를 놀렸다.
“…들었어요. 게인즈 씨한테. 그래서 재산을 따로 은닉할 방법을 찾는다고.”
“그래서 말인데, 일레인.”
샬럿이 목소리를 낮추며 일레인의 손을 잡았다.
“우리 윌리엄은 어떠니? 네가 윌리엄과 혼인하면 숨긴 재산을 지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거야. 우리 해밀턴 가가 너와 바이올렛의 굳건한 방패막이가 되어 줄 수 있으니까.”
“!”
혼인이라니.
혼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일레인의 머릿속엔 펠릭스의 결연한 얼굴이 떠올랐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사내들보다 내가 훨씬 더 낫다는 걸, 내 조만간 보여 주지.”
펠릭스가 외쳤던 말도 귓가에 쟁쟁 메아리쳤다.
하아, 정말로 구제불능이구나, 나는. 이 시국에 어쩌자고 펠릭스를.
입술을 깨물어 펠릭스 생각을 털어 낸 일레인은 샬럿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윌리엄 오라버니는 다이앤을 열렬하게 좋아하잖아요, 고모!”
“흥, 다이앤은 거미줄 같은 애야. 이리저리 끈적거리는 줄을 쳐 놓고, 먹지도 않을 거면서 아무 거나 막 걸려 죽어 가게 만드는. 난 그 애의 그런 방탕한 음험함이 징그럽다!”
샬럿이 몸서리를 쳤다.
윌리엄 해밀턴은 해밀턴 후작과 샬럿의 장자였다.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 중인 윌리엄은 빼어난 미모와 교양, 부까지 모두를 갖춘 완벽남이다. 그리고 일레인에게도 아주 다정다감한 사촌 오라버니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다이앤을 향해 있었다.
“고모는, 왜 그렇게 다이앤을 싫어해요?”
정말로 궁금했다.
샬럿은 일레인이 기억하는 한에 있어 한결같이 다이앤에게 냉담했다. 형식상 큰 조카로 대해 주고 좋은 옷감이나 보석이 생기면 일레인보다 먼저 나눠 주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안아 주는 적도, 따스한 말을 건네는 적도 드물었다.
“다이앤은…….”
샬럿은 진짜 이유를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 봐야 모두에게 상처가 될 이유 따위를 일레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샬럿은 다른 이유를 꺼내들었다.
“난 그 애의 파란 눈이 무서웠다, 일레인. 내가 안 볼 때면 아직 잘 몸도 못 뒤집는 너를 막 꼬집곤 했어. 어린 게 얼마나 잔혹하게 꼬집었는지 네 다리는 온통 벌겋고 퍼런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천사처럼 아름다운 눈과 요정처럼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등 뒤로 손을 숨겨 네 다리를 꼬집는 고작 두 살배기 그 애가, 너무 무서웠어.”
악마가 이 세상에 온다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싶었어, 일레인.
고모가 다시 몸서리를 쳤다.
“다이앤 이야기는 그만하자, 일레인. 뒤에서 조카 험담이나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구나.”
앞에서 대놓고 험한 말을 하지 뒷말하는 건 취향이 아닌 고모가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일레인의 손을 잡았다.
“사내들 거의가 어릴 적엔 겉껍데기에 혹한단다. 그치만 스물이 넘어가면서부터 달라져요. 결혼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가문끼리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지. 윌리엄도 이제 철이 들었으니 다이앤에게 품었던 철없는 정념도 다 수그러들었을 게다. 물론 내가 늘 네 편일 것이고.”
샬럿 고모가 자신의 편일 거라는 덴 의문의 여지가 없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야, 일레인. 시간이 많이 있잖니. 겨울이 되면 윌리엄이 돌아올 터이니, 잘 고려해 보렴. 윌리엄만큼 너와 바이올렛, 크라몬드 백작가의 여자들을 지켜 줄 이는 없을 거다.”
고모의 말이 길어지는 건 이제 윌리엄 오라버니가 대학을 졸업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해밀턴 후작을 따라 정치계에 발을 들이게 될 터이고, 지지자들을 모으느라 이런저런 모임과 연회를 주관해야 하는데, 그를 도울 안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샬럿 고모는 그 안사람이 지나치게 아름답고 또 지나치게 음험한 다이앤이 될까 봐 두려운 거였다.
또 마틸다 여왕의 흉계에서 크라몬드 백작가 여인들을 지키려면 아들이 일레인과 맺어지는 것이 최선의 방안이라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