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돌아서는 순간부터 그가 그리웠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온 힘을 다해 등을 꼿꼿하게 세운 채 일레인은 다시 계단을 올랐다.
“일레인!”
펠릭스가 일레인을 불러 세웠다.
일레인은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부질없는 눈물을 보여서 펠릭스의 마음까지 휘저어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게 일레인이 펠릭스를 위하는 방식이었다.
“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사내들보다 내가 훨씬 더 낫다는 걸, 내 조만간 보여주지.”
“?”
애원하듯 마음 아픈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란 예상과 달리 펠릭스의 목소리는 오히려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일레인, 너, 실수하는 거야! 나중에 내 바짓가랑이 붙들며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야!”
‘다시 한번 모델을 서 달라고 애원할 순 있겠지. 황홀하도록 잘생긴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패기가 귀여워, 일레인은 다시 계단을 오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눈물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울고 애원하면 마음은 아플지언정 난처했을 텐데. 근거 없이라도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편이, 마음을 덜 아프게 했다.
* * *
펠릭스가 떠나고 한 달 후.
일레인도 엄마와 페일른 부인과 함께 배런 지방에 있는 샬럿 고모의 필론 하우스로 옮겨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세오드 성은 삼백 년에 지어진 돌성이라 가을부터는 급격하게 냉기를 내뿜었다. 그래서 몸이 차가운 백작 부인이 거하기 썩 좋은 성이 아니란 이유가 컸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이유는 아빠 크라몬드 백작의 편지 때문이었다.
백작은 세계 어디에 가 있든 열흘에 한 번은 반드시 바이올렛 백작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루덴에 본사를 둔 크라몬드 상사는 대형 상선 50여 척을 가진 브리티나 최고의 해운 회사이자 무역 회사였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리스본,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과 더불어 아시아의 루손과 마카오 등지에 많은 지사를 두고 있었다.
규모가 큰 만큼 이런저런 사고와 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 백작은 거의 이 지사에서 저 지사로 대륙을 건너다니며 직접 무역과 운영을 챙겼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이유고, 여왕 세력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차이나와 인도, 니폰 등지에서 값비싼 비단과 향신료, 비단, 도자기, 은 등을 실어 오는 크라몬드 상사의 상선은 무역품을 노리는 해적을 물리치기 위해 배마다 62문의 대포를 갖추고 있었다.
언제라도 군선으로 변모할 수 있는 배이기에, 마틸다 여왕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 백작을 제거하고 상선을 몰수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크라몬드 백작은 아내에겐 항상 사랑의 밀어로 가득찬 절절한 연서만 보냈다.
그렇지만 가문에서 가장 어린 일레인에겐 재산 관리인 존 게인즈 씨를 통해 가문에 관계된 중요한 일을 따로 적어 보냈다.
[일레인, 엄마에겐 말하지 말고 샬럿이 있는 필론 하우스에 가서 내년 봄까지 머무르거라. 루덴의 분위기가 지난 봄보다도 더 어수선해져서 엄마의 신경이 버틸 수 없을 것 같구나.
그 외에도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존한테 듣거라.
아빠는 지금 리스본에 펠릭스와 함께 머물며 여러 일을 처리하고 있다. 다음 달에 필론 하우스에 갈 수 있을 것 같구나.
나의 딸, 일레인.
네게만 무거운 짐을 지워 정말로 미안하고, 또 정말로 고맙다. 네가 그려 준 엄마의 초상화와 우리 가족 그림을 보면서 아빠는 늘 힘을 얻는단다.
사랑한다, 일레인.]
이 편지를 받고 나서 일레인은 배런의 고모께 연통을 넣고, 곧 옮겨갈 준비를 하라고 집사장 뷰컴에게 명했다.
“게인즈 씨, 아빠가 들으란 건 무엇이지요?”
펠리스가 쓰던 서재에서 게인즈 씨를 맞아 일레인은 아빠 편지에 언급된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을 물었다.
게인즈 씨는 아빠와 함께 옥스퍼드에서 법률을 공부한 변호사이자 아빠의 재산 관리인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주 본 터라 일레인에겐 삼촌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일레인의 질문을 들은 게인즈 씨는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게인즈 씨가 일레인에게 바싹 의자를 붙여 앉았다.
“다음 달에 윌슨이 오면 상세히 듣겠지만, 일레인. 조지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아.”
“조지, 삼촌이요?”
조지 크라몬드는 아빠의 배다른 동생으로, 선대 크라몬드 백작의 사생아였다. 선대 백작 부인이 돌아가신 후 극장에서 노래 부르는 배우에게서 본 조지 크라몬드는 이제 스물일곱 살로 외모가 자못 수려하여 브리티나의 미남자로 뽑혔다.
하지만 성품은 그닥 성실하지 못하고 헤퍼서 제 몫으로 받은 엄청난 재산을 거의 탕진했다는 소문이었다.
“삼촌은 해군 장교로 저 남아프리카 쪽에 가 계시지 않았어요?”
“벌써 여섯 달 전에 귀국했는데 연락도 없이 맨날 루덴의 극장가와 유흥가를 전전한다는구나.”
조지의 행적을 말하는 게인즈 씨 얼굴엔 혐오가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다섯 번도 넘게 조지가 저지른 온갖 파렴치한 일들을 게인즈 씨가 돈으로 무마해왔기 때문이다.
게인즈 씨가 얼굴을 붙이더니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튼 일레인. 조만간 네가 채권 투자를 좀 배워 두어야 해. 우리 상사의 재산을 은닉할 필요가 있다.”
“…은닉이라니요?”
일레인의 가슴이 불길하게 뛰기 시작했다. 사실은 조지 크라몬드 이름이 나올 때부터 등줄기가 쎄하게 소름이 돋았던 차였다.
“게인즈 씨, 혹시……?”
일레인은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될까 두려워 감히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일레인의 얼굴을 안타까운 눈으로 본 게인즈 씨가 일레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래, 일레인. 네가 짐작한 것을 나나 윌슨도 걱정하고 있어. 그래서 미리미리 대비하려는 것이다.”
말에는 예언적 힘이 실린다고 했다. 그래서 게인즈 씨도 ‘그 일’을 정확하게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레인은 결코 어떤 일에 있어 두렵다고 회피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해진 눈빛으로 일레인이 잡힌 손을 빼내고 물었다.
“조지 삼……, 조지가 벌써 움직였나요? 그에 대한 대비는 빈틈없이 해 놓은 거죠?”
“그래. 선박이든 어디든 윌슨이 있는 곳엔 경호원이 스무 명씩 붙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마시는 물 한 모금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다.”
하아.
불행 중 다행이다.
그래도 무거운 쇠사슬이 옥죄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일레인은 언제나 자신이 크라몬드 가문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단 사실을 잊지 않았다.
“채권 투자나 다른 은닉 방법을 배울게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게 주선해 주세요.”
“그 방면에 가장 빼어난 지식을 갖춘 자가 펠릭스 페일른이다. 그도 다음 달에 윌슨과 함께 필론 하우스로 올 거야.”
여기서 왜 또 펠릭스의 이름이 나오는가.
심장이 욱신, 칼에 베인 듯 아프면서도 기쁘게 두근거렸다.
* * *
‘펠릭스가 온다.’
펠릭스 페일른이 온다.
그가 떠난 지 한 달.
사실은 그의 고백을 거절하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그가 그리웠다. 3층 작업실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다시 발길을 돌려 그에게 달려가 입술을 맞대고 속삭이고 싶었다.
‘네가 좋아, 펠릭스. 나도 네가 좋아. 기다릴게. 네가 내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는 그 날까지,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기다릴게.’
그러나 일레인 크라몬드는 일곱 살부터 크라몬드 가문의 안살림을 책임져 온 사람이었다. 겉은 열일곱 여린 소녀이나 속에는 늙은 공작 부인이 하나 꿰차고 들어앉아 가문을 위해서는 이리 해야 한다 저리 해야 한다 훈수질이 작렬인 크라몬드 가문의 지킴이였다.
기실 그 속 시끄러운 그 잔소리를 잠시나마 듣지 않기 위해서 일레인은 붓을 휘둘렀다. 그림에 몰두한 순간만큼은 가문이란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그냥 제 나이의 일레인 크라몬드가 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단련되었는데도, 왜 펠릭스에겐 덤덤해지지 않는 걸까.’
어쩌자고.
일레인은 ‘펠릭스’란 이름을 듣자마자 미쳐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런 몸짓을 오해한 게인즈 씨가 휴우,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눈으로 일레인을 보았다.
“미안하다, 일레인. 나나 윌슨은 이리 무거운 짐을 늘 네게만 지워서 정말로 미안한 심정이야.”
괜찮아요. 일곱 살 때부터 해 온 일인걸요.
그러나 펠릭스는 일곱 살 때부터 익숙해진 사람이 아니라는 게 문제예요, 게인즈 씨.
그렇게 게인즈 씨가 다녀가고 난 후 본격적으로 필론 하우스로 옮겨가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일레인과 백작 부인, 페일른 부인은 커다란 배 두 척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크라몬드 가문의 문장이 달린 사륜마차를 타고 먼저 출발했다. 칼과 활, 몇몇은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하인들이 마차를 에워싸고 함께 달려, 여왕의 행차처럼 화려한 여정이었다.
바이올렛 백작 부인이 뭘 이렇게 번거롭고 눈에 띄게 마차를 타고 가느냐고 창백한 얼굴로 말했을 때, 일레인은 이렇게 말했다.
“크라몬드 가문에 허점이 없다는 걸 과시해 둬야 해요.”
상속을 둘러싼 음모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엄마에게 할 수 없다.
엄마는 또 발작을 일으키며 무너져 ‘여왕이 기어이 우리를 죽이려 들 거야.’ 밤낮으로 울부짖을 테니까. 그래서 일레인은 차라리 혼자 가문의 여인들을 보호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