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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15화 (15/112)

#제15화. 첫 키스였다

“아직 더 손을 봐야 하지만, 그래도 고마워요, 뷰컴 씨.”

뷰컴이 나가고 홀로 남은 일레인은 잠시 붓을 놓고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 몸을 길게 내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물감과 오일 냄새에 찌들었던 폐 속으로 짠 바다 내음이 섞인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일레인은 창 옆 벽에 몸을 기댄 채 펠릭스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벌써 점심때가 지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햇살 속에 두꺼운 물감을 거듭 올린 펠릭스의 초상화가 일레인을 마주 보았다.

웃는 듯 찡그린 듯 미묘하게 턱을 굳힌 단단한 입매, 그리고 앞에 있는 여인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유혹하듯 빛을 내는 검푸른 눈동자.

“이것이 바로 제 여인을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고 선언하는 자의 표정이야.”

펠릭스의 목소리가 귀를 웅웅 울렸다.

그림 속에서 펠릭스는 일레인에게 고백하고 있었다.

너를 얻을 거야, 일레인.

아아, 그럴 리 없지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펠릭스의 고백이 실제로 나를 향한다 해도.

일레인의 눈동자가 슬픔에 젖어들었다.

‘나는 너를 얻지 않을 거야, 펠릭스.’

너를 가질 수 없어.

나는 백작가의 영애니까. 엄마와 가문을 지켜야 하니까. 그렇지 않아도 세상의 조롱을 받는 엄마에게, 평민에게 미쳐 신분도 버렸다는 딸을 가졌다는 수모를 더해 줄 수 없으니까.

그래서, 펠릭스!

일레인은 펠릭스의 눈동자를 향해 슬프게 속삭였다.

“설사 당신이 날 원한다 해도, 난 당신의 여인이 될 수 없어.”

눈물이 또르르 뺨을 적시며 투둑,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한번 피어도 보지 못한 일레인의 첫사랑도 투둑,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참 흐느끼던 일레인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이제 엄마와 스승 페일른 부인께 그림을 보여 드릴 때였다.

두 사람은 일레인이 집중하지 못할까 봐 궁금해도 꾹 참고 살롱에서 차를 마시며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으리라.

일레인이 여러 물감으로 얼룩진 앞치마를 벗고, 작업실 문을 나설 때였다.

복도 맞은편 서재 문이 열리며 펠릭스가 나왔다. 그 사이 펠릭스는 드레스 셔츠와 테일 코트까지 빈틈없이 차려입어, 정말로 대단히 부유한 청년 사업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레인, 살롱으로 가는 건가?”

물어오는 펠릭스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무엇인가에 쫓기듯 초조한 표정이었다. 펠릭스의 등 뒤로, 서재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조금 낯익은 사내 얼굴이 보였다.

‘포구에서 보이던 자다. 찰스라고 했던가.’

그날. 단단히 밀착한 채 말을 타고 돌아오게 되던 날 보았던 자다.

“난 당장 떠나야 해, 일레인. 루덴으로 가 크라몬드 백작을 만난 후, 배편으로 리스본과 지브롤터로 가야 해.”

펠릭스가 빠르게 말했다.

“무, 무슨 일이야?”

“일레인!”

펠릭스가 갑자기 일레인의 손을 잡았다.

“물감 투성이인데.”

당황한 일레인이 손을 빼려고 하자 더욱 단단하게 손을 잡은 펠릭스가 2층 계단에서 안쪽 침실로 통하는 문 뒤로 일레인을 끌었다.

2층 침실에 묵고 있는 이는 페일른 부인과 펠릭스뿐이니, 여기라면 바깥을 오가는 이들의 눈에서 둘을 숨길 수 있었다.

문과 벽 사이 움푹 들어간 공간에 일레인을 세운 펠릭스가 빠르게 말했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잊지 마, 일레인. 내 말과 내 표정, 잊지 마!”

두꺼운 석벽의 냉기가 일레인의 등 뒤를 찔렀다. 등 뒤의 냉기와 바싹 붙어선 펠릭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어쩐지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자꾸 다리에 힘이 빠졌다.

“일레인!”

제발. 잊지 않겠다고 말해 줘.

애원하듯 자신을 부르는 펠릭스의 입술이 컴컴한 그늘 속에서 붉게 빛났다.

그 입술이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절박해 보여서.

일레인은 홀린 듯 발꿈치를 들고 펠릭스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말캉, 하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일레인은 당황으로 몸을 굳혔다.

몸을 굳힌 건 일레인뿐만이 아니었다. 펠릭스의 몸도 뻣뻣하게 굳었다.

두 사람은 굳어진 몸으로, 입술만 맞댄 채 점점 빨라지는 상대의 숨결을 느끼며 감히 다른 걸 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참 서 있었다.

첫 키스였다.

그저 입술만 살짝 맞댄 얕은 접촉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윙윙 울리고 목이 바싹 타오르는 첫 키스.

맞닿은 입술과 숨결에선 레몬 향이 났다. 노아 부인이 만든 레모네이드를 마신 것 같았다.

‘앞으로 레몬차를 마실 때마다,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마다, 레몬 소스를 얹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는 너를 떠올리겠지, 펠릭스.’

그럼 너는 앞으로 유화 물감 냄새, 테레빈유 냄새, 린시드 오일과 바니쉬 냄새를 맡을 때마다 날 생각할까.

그리워할까.

궁금해하며 일레인은 입술을 뗐다.

발꿈치를 내리고 시선도 내리며 일레인이 변명처럼 웅얼거렸다.

“미안. 입술이 너무 예뻐 보여서.”

기다리는 대답이 아니었지만, 어쩐지 쫓기듯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대답이기도 했다.

펠릭스가 낮게 웃으며 일레인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펠릭스의 옆얼굴을 비췄다. 일레인을 내려다보는 펠릭스의 눈엔 작은 불씨 같은 갈망이 선명하게 불타올랐다.

“일레인. 편지할게.”

너를 얻기 위해, 너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해 줄게.

이번엔 펠릭스가 입술을 대어 왔다. 그러나 그의 키스는 그저 입술을 대는 수줍은 입맞춤이 아니었다.

격렬하게 입술을 부딪쳐 온 펠릭스가 무자비한 힘으로 얼어 있는 일레인의 입술을 벌렸다.

강인한 혀는 숨 쉴 틈도 주지 않은 채 일레인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일레인은 안은 펠릭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플 정도로 세게 일레인의 몸을 껴안은 채, 펠릭스는 거침없이 일레인의 입속을 탐했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 사이로 서로의 욕망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점점 존재를 부풀려가는 펠릭스의 욕망에, 일레인의 머릿속이 아찔하게 아득해졌다. 저도 모르게 펠릭스의 목을 감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아, 펠릭스.”

일레인은 기어코 펠릭스의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욕망에 젖은 일레인의 목소리가 되레 펠릭스를 정신 차리게 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위험하다.

펠릭스의 이성이 더! 더! 를 외치며 아우성치는 욕망의 목덜미를 잡아 저 깊은 심연 속에 간신히 밀어 넣었다.

그래도 채 가라앉지 않는 욕망은 기어이 일레인의 목을 살짝 깨물어 흔적을 남기고서야 뱀처럼 치켜들었던 머리를 수그렸다.

목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에 일레인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꾹 참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일레인을 꽉 안은 채 여러 번 깊은숨을 고른 펠릭스가 일레인의 귀에 뜨겁게 속삭였다.

“사랑을 깨달은 소년은 비로소 청년이 되지. 지킬 것이 있는 청년은 비로소 어른이 되고. 나는 너를 지킬 거야, 일레인 크라몬드.”

달콤하고 아찔한 첫사랑의 고백이었다.

“기다려, 줄 거지?”

펠릭스가 다시 기다란 손가락으로 일레인의 얼굴을 들고 시선을 맞춰 왔다.

“날 기다려 줄 거지, 일레인?”

“…….”

어찔어찔한 키스의 여운에 숨을 헐떡거리는 일레인의 흐트러진 시선이 점차 초점을 되찾았다.

“펠릭스, 나는…….”

오랫동안 서서 그림을 그리느라 지친 다리는, 펠릭스의 키스를 견뎌내지 못했다.

두 손으로 펠릭스의 코트 깃을 잡고 간신히 버텨 선 일레인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 이성을 되찾아 움켜쥐었다.

펠릭스, 당신은…….

“나는, 크라몬드 백작가의 영애야.”

일레인은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프시케에겐 돌아갈 집이 없었지만 내겐 지켜야 할 가문이 있어, 펠릭스.”

휘둥그렇게 커진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일레인은 천천히 말했다.

“에로스가 그의 어머니 아프로디테와 아무리 힘써 싸워 준다고 한들, 프시케에게 지켜야 할 자신의 가문이 있었다면 그렇게 바보처럼 고난을 견디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일레인!”

“쉿!”

일레인은 손가락을 뻗어 참으로 잘생긴 펠릭스의 입술을 막았다.

“펠릭스, 당신은 내 그림 속 뮤즈가 될 수는 있어도 내 현실의 연인은 되지 못 해.”

왜냐하면 나는, 엄마와 가문을 지켜야 하니까. 가문에서 내쳐진 프시케가 아니니까.

늘 영민하게 빛나던 펠릭스의 눈동자가 일순 어두워졌다. 세상 만만한 듯 팽팽하게 올라붙어 있던 눈매마저 순간적으로 힘을 잃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이내 등을 쭉 폈다. 눈빛도 다시 이글이글 한겨울의 북해처럼 날카로워졌다.

“내가 처음부터 에로스가 아니니까. 그래서인가, 일레인?”

펠릭스가 일레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딱딱해진 말투만큼 그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애당초 내 어머니는 여신이 아니고, 내 아버지는 누군지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자라서. 그래서인가, 일레인?”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그 무엇이든, 나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당신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엄마가 조금만 더 제대로 백작 부인의 역할을 해 왔다면. 다이앤이 조금만 더 장녀 노릇을 제대로 해 주었다면. 그러면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사내를 모진 말로 끊어 내지 않아도 되련만.

“크라몬드 백작님과 함께 일하니 알지 않습니까, 펠릭스 씨. 우리 가문에겐 지금 굉장히 적이 많아요. 나 일레인 크라몬드는 가문에게 힘이 되는 사내와 혼인해야 합니다.”

펠릭스의 입매가 위험하게 구겨졌다.

“하! 내가 불려 준 백작의 재산이 얼마인데!”

“권력 싸움에서 지면 그깟 재산, 하루아침에 허물어진다는 걸, 잘 알지 않습니까?”

마음에 그를 품었던 무게만큼 단호하게 속삭이며 일레인은 펠릭스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을 잡고 살짝 무릎을 구부렸다.

“모델이 되어 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펠릭스 씨. 덕분에 과분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일레인은 우아하게 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뺨을 적셨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지언정 백작가 영애의 임무를 저버린 적 없다.

그게 나, 일레인 크라몬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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