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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14화 (14/112)

#제14화. 너를 얻을 방법을 찾아낼 거야

일레인의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펠릭스는 저 눈빛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싶은 욕망에 심장이 옥죄는 고통을 느꼈다.

‘너를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정체를 숨겨 사라지는 비겁한 방법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을 것을.

그래서였을까.

“그거 알아, 일레인?”

불쑥 펠릭스가 물었다.

“으응……? 무얼?”

일 미터도 넘는 캔버스 뒤에서 한 박자 늦게 일레인의 답이 들렸다.

스케치를 끝낸 일레인은 먼저 작은 크기로 종이 위에 그려둔 펠릭스와 실제 펠릭스의 모습을 비교하며 머릿속으로 색채 조합을 수정하고 있었다.

“…사랑의 금 화살과 거부의 납 화살을 든 채 천방지축 날뛰던 동자 신 에로스가 청년이 된 건 사랑을 알고부터라고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 내가 생각할 땐…….”

“…….”

일부러 말을 끊었는데도 캔버스 천 너머에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슥슥, 붓질을 하는 소리와 이따금 팔레트에서 색색의 물감을 떠내는 소리뿐이었다.

펠릭스는 그림에만 열중해 있는 일레인에게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한 번도 누구에게 자신의 마음을 상세히 털어놓아 본 적이 없기에, 일레인이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말이 더 잘 안 나올 터였다.

펠릭스가 혼잣말처럼 조용하게 말했다.

“에로스가 청년이 된 건 프시케를 책임지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일 거야.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자신의 연정에 책임을 질 때일 테니까.”

순간 일레인의 붓 소리가 멈췄다. 그림 작업실은 돌연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들었나?’

펠릭스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들었으면 싶으면서도, 듣지 못했으면 바라기도 했다.

‘아프로디테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시케를 얻으려 한 에로스처럼, 그렇게 날 잡아 줘, 펠릭스.’ 하고 일레인이 고백해 오길 간절하게 바라는 심장이 일레인을 향해 격렬하게 날뛰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펠릭스의 심장은 스스로를 조롱하며 아프게 조여들었다.

일레인도 가지고 있는 재산만 가지고 있을 뿐, 자신은 변변한 신분도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신분으로는 일레인에게 어머니와 같은 고통을 줄 수밖에 없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에 담게 된 소중한 여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세간의 조롱과 멸시뿐이라면, 감히 욕심을 내어서는 아니 된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혼돈 속에서 펠릭스가 ‘일레인’ 하고 부르기 위해 입을 동그랗게 열 때였다.

캔버스 옆으로 일레인의 얼굴이 빼꼼 드러났다.

긴장한 탓에 깊은 바다처럼 검푸르게 짙어진 펠릭스의 시선과 일레인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 표정, 한 번 해 봐.”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펠릭스가 짙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프시케를 어머니의 핍박에서 보호하겠다고 에로스가 결심한 순간 말이야. 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곧 말라 버릴 이슬과도 같은 존재인 프시케를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이 지키겠다고 결심한 순간에 에로스의 표정이 어땠을 것 같아? 그 표정을 지어줘, 펠릭스.”

“나, 나는…….”

펠릭스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3년 전에 본 오스트리아 국채 위에 어지럽게 이서된 이름 하나하나도 다 기억하는 펠릭스지만 그런 거, 누굴 지키겠다고 결심한 거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제까지 펠릭스는 기억하는 순간부터 이미 지켜야 할 존재로 어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간절히 지키고 싶었던 여동생 엘리노어는 애초에 결심하고 말고 할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레인 나는…….”

머뭇거리며 입술만 달싹이는 펠릭스를 일레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일레인이 그리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 순간의 펠릭스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펠릭스…….’

나는 네가 좋은데.

좋아도 마음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야.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에 젖듯 네가 마음에 스며들었는데.

너를 화폭에 옮기고, 너를 만지고 싶은데.

마음이 깊어갈수록 더욱 거리를 유지해야 하기에 너의 눈빛을 그리고 싶어.

네가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의의 눈빛을 그림으로 그릴 거야.

너의 그 결연한 눈빛이 나를 향한 것처럼 생각하며 두고두고 볼 거야.

그러니 펠릭스.

펠릭스의 눈동자가 일순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캔버스 옆으로 빼꼼 얼굴의 반만 내놓은 채 왼쪽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일레인의 반쪽 얼굴이 슬픔에 젖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강렬한 통증과 강렬한 욕망이 동시에 펠릭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네가 슬픈 게 싫어, 일레인.’

일레인을 울리고 싶지 않다. 일레인을 슬프게 하는 세상 모든 것들을 다 부숴 버리고 싶다.

‘너를 위해 살아야겠어, 일레인. 너를 위해. 네가 웃도록 만들기 위해.’

나는, 너를, 가질 거야.

반드시 널, 내 품에서, 웃게 할 거야.

펠릭스의 얼굴이 무섭도록 진지해졌다. 꽉 다문 입술로 인해 입매는 팽팽하게 당겨져 고집스러워졌다. 눈은 짙고 짙어져 검은색으로 번득였다. 곱슬거리며 이마를 덮은 머리칼까지 갑자기 단호하게 힘을 준 듯했다.

무시받지 않기 위해 지독한 집념으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일궈낸 젊은 사내의 집착과 열망이 마침내 일레인을 향해 폭발했다.

“이 표정이야, 일레인. 내가…….”

더 이상 숨지 않고 당당히 너를 마음에 담기로 결심한 순간의 표정이야.

“일레인, 잘 봐 둬.”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은 강렬한 시선으로 일레인을 포박하며, 펠릭스가 선언했다.

“이것이 바로 제 여인을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고, 제 여인을 반드시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선언하는 자의 표정이야.”

너를 얻을 방법을 찾아낼 거야, 일레인 크라몬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의 데뷔탕트까지, 나는 너를 가질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 거야.

일레인은 열렬하게 고백해 오는 펠릭스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장 박동은 아까부터 둥둥, 귀에 들릴 정도로 날뛰고 있었다.

‘설마……?’

나에게 하는 고백인가.

펠릭스가 내게 사랑을 고백…….

일레인은 고개를 저어 그 달콤한 생각을 지웠다.

나는 사방이 적인 백작가의 영애다.

이재에 밝은 펠릭스가 나같이 위험한 처지의 여인을 마음에 담을 리 없다.

그래도 펠릭스의 표정은 정말로 일레인이 머릿속으로 그렸던 에로스의 모습 그대로였다.

일레인의 붓이 다시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턱을 괸 채 눈앞의 프시케를 강렬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에로스의 모습이 캔버스 위에 점점 더 선명해졌다. 눈동자에는 사랑과 결심이 냉혹하리만큼 선명하게 빛을 내고, 강인한 손가락엔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부숴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툭툭 불거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저, 일레인 아가씨!”

“…….”

고도로 몰입한 채 그림에 열중해 있는 일레인을 집사장이 불렀다.

옆에 서서 여러 번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자, 뷰컴은 곤란한 표정으로 펠릭스에게 말을 전했다.

“서재에 찰스 씨란 분이 와 있습니다, 펠릭스 씨. 급하다고 하네요.”

“!”

눈조차 거의 깜빡이지 않은 채 일레인만 응시하고 있던 펠릭스가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

“일레인!”

펠릭스가 큰 소리로 일레인의 이름을 부르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복근을 관능적으로 칠한 일레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왔어. 오늘은 여기까지 해도 괜찮겠지?”

“아……, 응. 괜찮아. 윤곽과 색채는 다 정해졌으니 나머지는 나 혼자 다듬어도 돼.”

펠릭스는 오랫동안 꼼짝도 안 해 굳어 있는 몸의 근육을 큰 기지개로 풀고 먼저 침실로 내려갔다. 이런 옷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는 없으니.

그러나 운이 나쁘게도 뷰컴 씨는 목동도 아니면서 목동 옷차림을 한 찰스란 자가 미심쩍어 혹시 아무거나 중요한 서류를 엿볼까 봐 서재 문을 활짝 열어 둔 참이었다.

“어, 어어!”

그리스 신화 속 아름다운 신의 모습을 한 펠릭스의 헐벗은 옷차림을 본 찰스는 당황해서 인사도 못 한 채 이상한 소리만 냈다.

“십 분만 기다리시게.”

펠릭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치고 침실로 향했다.

그 사이 일레인은 점점 더 많은 오일을 물감에 섞어 덧칠을 계속했다.

검은색으로 깊게 가라앉은 배경과 대비되게, 경쾌하게 푸른 복장과 밝은 색으로 빛을 내는 몸의 근육이 청년의 활력을 생생하게 드러났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눈동자였다. 흥분과 결심으로 짙푸르게 반짝거리는 눈동자는 살짝 칠한 흰색 물감으로 청년이 품게 된 사랑의 흥분을 여실히 드러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집사장 뷰컴이 감탄했다.

“하아, 저라도 설레겠습니다, 아가씨.”

그림이라곤 여기 세오드 성 살롱 벽에 걸려 있는 역대 크라몬드 가문의 초상화와 일레인이 그린 풍경화 정도나 접해본 늙은 집사장이었다.

그러나 평생 백작가만 모시다가 젊음과 청춘을 다 보낸 집사장의 눈에도 일레인 아가씨가 그린 청년의 모습은 뭔가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감동을 주었다.

“이 늙은이도 저리 찬란하던 때가 있었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청년입니다. 정말로, 아가씨!”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한 회한이 치밀어 올라, 뷰컴은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코트 앞자락을 단정하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백작 마님을 대하듯 공손하게, 마음을 담아 속삭였다.

“아가씨 그림은 뭔가 울림을 줍니다. 버석거리는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느낌이에요. 제가 무식해서 그 이상은 잘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이 그림은 정말 참 좋습니다.”

최고의 찬사였다.

일레인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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