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났는데
일레인은 아플 정도로 두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오른손의 손가락이 왼손의 엄지와 검지의 여린 살을 파고들어 통증이 이는데도 힘을 풀지 않았다.
‘젠트리 계급이었다니…….’
귀족의 사생아 정도는 되리라 생각했는데.
얼굴은 평온한 표정이어도 마음은 마구 울부짖었다.
채권 투자나 신대륙의 광산 투자, 튤립 투자로 하룻밤 새에 마부나 하녀가 어지간한 하위 귀족보다 더 부자가 되는 세상이다. 그렇게 부유하게 된 평민들도 귀족 못지 않게 화려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천지개벽하게 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하녀 출신의 여인이, 평민 출신의 사내가 귀족가 사람과 결혼하는 건 여전히 강력한 금기 사항이었다.
더구나 재산도, 비록 위협받고 있다곤 해도 정치적인 위치도 막강한 크라몬드 백작가 여식이 평민 사내를 마음에 담는다고!
지나가던 개가 다 비웃을 노릇이다.
일레인 크라몬드는 천한 화가들이나 잡는 붓 놀음에 몰두한다는 비난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가문의 명예와 안전에 근원적으로 관계되는 혼인 문제는 허투루 진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펠릭스 페일른이라 해도.
“내일, 오찬 들자마자 작업실로 와 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 일레인이 몸을 확 돌렸다.
달빛만이 가득한 성 앞의 잔디 위를, 일레인은 발끝에 온 힘을 주어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걸었다.
마음이 무너질 때면 그래왔듯, 일레인은 등을 더욱 꼿꼿하게 세웠다.
‘나는 크라몬드 백작가의 여식이야. 아픈 백작 부인을 대신해 가문 내의 일을 책임져야 하는 백작가의 여식.’
상처투성이 몸과 마음을 겨우 추슬러 삶을 이어 가는 엄마가 세간의 멸시 어린 시선을 또다시 받게 할 수 없다. 자식이 되어 그래서는 아니 된다.
그래도 내딛는 발이 참 아팠다. 왕자에 대한 사랑으로 걸을 때마다 통증을 느꼈던 인어 공주처럼, 처음으로 설렘을 느낀 연정을 차마 표현도 할 수 없다고 체념하는 걸음걸음이 아프고 또 아팠다.
펠릭스는 드레스 흰 자락을 우아하게 흩날리며 성으로 걸어가는 일레인의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나무 그늘에 가려진 채 펠릭스는 문득, 벌을 받는구나 자조하며 입술을 비틀었다.
‘생전 처음으로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났는데…….’
그 마음 한 자락도 펴 보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마음을 표하는 여인들에게 눈도 제대로 안 맞춰주고, 오로지 마음 말고 몸만 받았더니, 이런 벌을 받는구나.
정작 자신은 몸도 마음도 일레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설렘도 주지 못하는구나.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사랑 따위 절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는데, 막상 찾아온 사랑이 너무 아파서 펠릭스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일레인과 펠릭스는 그렇게 서로 좋아하는 마음을 차마 확인하지 못한 채 가슴 아프게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식당에서 맞이한 오찬 분위기는 묘하게 술렁거렸다.
“오늘 드디어 펠릭스를 그린다고, 일레인?”
페일른 부인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그래서 우리 펠릭스를 어떻게 그릴 거야?’ 하고 물어 대었다.
“무얼 그려도 멋지겠지. 빼어난 화가에 저렇게 수려한 미남자 모델이니.”
바이올렛 백작 부인은 노아 부인이 양파를 오래 볶아 정성껏 만든 알 로뇽 스프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블루 다이아몬드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빛냈다.
정작 펠릭스는 묵묵히 스프부터 생선 구이와 비둘기구이를 해치우고, 후식까지 전투하듯 먹어 치우는 데에만 집중했다.
일레인은…….
긴장한 듯 입꼬리를 떨며 빙긋거리기만 하던 일레인은 오찬이 거의 끝날 무렵에 입을 열었다.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요…….”
일레인이 입을 떼는 순간 묵묵히 먹는 것에만 열중하던 펠릭스가 팍, 고개를 들었다. 짙푸른 눈동자 속 까만 동공이 기대와 긴장으로 한껏 좁아져 있었다.
“펠릭스는 막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으니까, 그런 신을 찾아봤어요.”
얼굴을 뚫고 나갈 듯 강렬한 맞은편의 시선을 외면하며 일레인은 엄마와 페이른 부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프시케를 만난 후 사랑과 증오의 화살을 마구 쏘아 대었던 악동에서…….”
“사랑을 알게되어 비로소 청년이 된 에로스를 그리고 싶은 거군요, 일레인 영애.”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일레인의 말을 잘랐다.
그대, 일레인을 만나고서야 연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 나를 그리고 싶은 거군요.
일레인의 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펠릭스의 검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일레인은 양해를 구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일레인 영애. 의상은 어떻게 할까요?”
펠릭스는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여인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다.
“준비해 두었어요. 안나더러 가져다 드리라고 하겠습니다.”
일레인의 대답을 들은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펠릭스가 성큼 식당에서 나갔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페일른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모습으로 그릴지는 전적으로 화가의 선택에 달렸어, 일레인. 그런데 최고의 미남 신이자 다재다능한 아폴론이나 다른 신을 다 놓아두고 하필 사랑의 신을 고른 이유가 있니?”
대공국의 후계자가 될 펠릭스가 하필 에로스 신이라니.
어떤 신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화가의 권한임을 알면서도 페일른 부인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엄마도 궁금하구나. 에로스 하면 ‘의심이 자리 잡은 마음에 사랑은 깃들지 못한다’는 말로 유명하잖니. 또 어쩐지 성애의 신으로도 유명해서…….”
엄마도 조심스럽게 페일른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데뷔탕트를 치르는 아가씨가 에로스를 그렸다가 공연한 구설수에 오를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일레인의 의지는 굳건했다.
‘믿고 싶어요, 그를.’
그의 신분이 무엇이든 난 펠릭스를 좋아하고 싶어요. 그를 나의 첫사랑으로 삼고 싶어요.
모친 아프로디테 때문에 프시케를 잃어야 했을 때 에로스가 용감히 나서서 끝내 프시케를 지켜 준 것처럼, 나도 펠릭스를 지키고 싶어요.
그렇지만 가문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 때문에 그럴 수 없죠.
“…괜찮을 거예요. 모두, 에로스로 분장한 펠릭스를 보며 가슴을 떨 거예요.”
그래서 그림으로나마 내 마음을 담아보고 싶어요, 엄마.
심중의 말을 감추며 일레인은 부러 하하, 웃었다.
한 시간 후, 일레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이젤 앞에 서 있었다.
작업장 한가운데엔 펠릭스가 앉을 긴 소파가 놓여 있었다. 기대어 앉기 좋도록 한쪽에 팔걸이를 만들어 단 소파는 펠릭스가 입기로 되어 있는 짙푸른 코발트 빛 클라미스와 확연히 대비되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작업실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펠릭스가 들어왔다.
일레인은 저도 모르게 ‘아’ 탄성을 내뱉으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레인이 사전에 그려 준 대로 차려입은 펠릭스는 최고급 푸른 린넨 천으로 만든 그리스 클라미스 의상을 입고 있었다. 옷감을 보기 좋게 어깨에 주름을 잡아 두른 후, 등 뒤로 길게 내려 입는 복장이었다. 양쪽 등엔 에로스를 상징하는 흰색 날개가 달렸다.
푸른색 옷감 위로 드러난 상반신에는 조각처럼 멋진 쇄골과 복근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보았다면 당장 조각상으로 만들어 세우고 싶어 할 멋진 몸이었다.
일레인은 자꾸 가빠지는 숨을 숨기기 위해 애를 썼다.
‘정신 차려, 일레인. 나는 화가고, 펠릭스는 피사체야, 피사체.’
화가가 모델을 보고 심장이 떨려 눈도 마주치지 못하다니!
일레인은 자꾸 부피를 키워가는 떨림과 설렘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안의 여린 살을 마구 깨물었다.
“이렇게 앉아서 턱을 괴란 말이지, 일레인?”
소파에 앉은 펠릭스가 미리 그림으로 보여 준 대로 포즈를 취하며 물었다.
“응, 잠시만.”
일레인은 펠릭스에게 등을 돌리고 연거푸 심호흡을 했다.
그제야 조금, 화가로서의 정신이 돌아왔다.
다시 몸을 돌렸을 때 일레인은 평소처럼 차분해져 있었다.
“날개를 바로잡아 줄게.”
일레인은 소파로 다가가 펠릭스의 등과 소파 등받이 사이에 끼어 있는 날개를 빼 소파 뒤로 늘어뜨렸다. 그리고 펠릭스가 느긋한 자세로 소파의 옆 등받이에 기대앉게 했다.
“오른쪽 무릎을 세운 후, 오른손은 이렇게,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한 뼘도 안 되게 가까이 다가서자 펠릭스의 어깨와 팔, 배와 등에 박힌 탄탄한 근육의 결이 선명하게 보였다.
일레인은 다시 입안을 씹었다. 짙은 피의 짠맛이 입안 가득 확 퍼졌다.
펠릭스는 일레인이 잡아 주는 대로 정확하게 포즈를 잡았다.
일레인은 마지막으로 떨리는 손가락으로 크라미스의 주름을 자연스럽게 손질했다.
슥슥.
일레인의 붓이 미리 정성껏 준비해 둔 캔버스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옅은 갈색 물감이 능숙하게 펠릭스의 윤곽을 그려 나갔다. 실제 펠릭스의 상반신 크기에 맞춘 커다란 캔버스를 꽉 채우기 위해, 일레인은 때로 허리를 구부렸다가, 작고 평평하며 단단한 의자 위에 올라섰다가 하며 부지런히 붓을 놀렸다.
펠릭스는 조각상처럼 포즈를 취한 채 그림에 열중한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들어올 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더니.’
붓을 몇 번 놀리지도 않았는데 일레인은 벌써 무섭게 집중하고 있었다.
살짝 찌푸린 눈썹 아래 날카롭게 좁아든 갈색 눈동자는 펠릭스의 아름다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하게 펠릭스의 상반신을 헤집었다.
캔버스 뒤로 사라져 스케치하던 일레인이 고개를 내밀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펠릭스도 일레인을 꼼꼼히 살폈다.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해 풋풋한 홍조를 띤 뺨. 집중하느라 저도 모르게 살짝 벌린 장미 꽃잎 같은 입술.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목의 유려한 곡선.
무엇보다 저 눈빛.
욕망을 담고 훑는 끈적거리는 눈빛이 아닌, 오로지 피사체로서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저 단단하고 날카로운 화가의 눈빛.
저 눈빛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