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12화 (12/112)

#제12화. 마음이 갑자기 갈피를 잃고

펠릭스는 부러 거칠게 일레인을 다그쳤다.

정작 화가 나 있든 대상은 펠릭스, 자신인데도.

한 달 전 포구에서 함께 말을 타고 돌아온 후 일레인이 자신을 피하는 걸 펠릭스도 예리하게 감지했다. 그래서 펠릭스도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서재와 2층 침실에서만 머무는 중이었다.

마침 인도에서 정향과 계피, 샤프란, 후추 등 금보다 더 비싼 향신료를 싣고 오던 크라몬드 백작의 상선이 또 두 척이나 연거푸 지중해 인근에서 해적에게 납치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던 참이었다.

펠릭스는 자신의 사람들을 풀어 그 해적이 어느 패거리에 속하는지, 정말 해적이긴 한 것인지 조사하는 중이었다. 하루 빨리 이 사악한 패거리를 잡아내야 백작의 재산은 물론, 상선에 투자한 자신의 재산도 지킬 수 있다.

한데 해적에 관련된 각종 보고 서류와 또 유망한 회사채를 찾아내는 작업에 몰두해 있다가도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펠릭스는 일레인이 있을 만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는 심지어 어머니 엘렌과 함께 일레인이 그림 작업을 하는 맞은편 작업실에서 나는 소리를 엿듣기도 했다.

또 날이 화창하게 맑은 어느 날은 이삭이 패기 시작한 귀리 밭을 그리러 나가는 일레인의 뒷모습을 넋 놓고 훔쳐보다가 창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오늘처럼 부엉이가 호옹호옹 외롭게 우는 밤이면 본성 3층, 일레인이 잠들어 있을 침실의 창을 바라보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방금 일레인이 온 걸 알아챈 것도 일레인의 침실에서부터 촛불이 흔들리며 움직이는 걸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펠릭스는 대책 없이 일레인만 찾아 서성거리는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대체 어쩌자고 나의 시선은 너만을 찾아 서성거리는가. 한사코 나를 피하는 너를, 어쩌자고.

한두 번 여자를 안아 보았던 것도 아닌데 풋내기 사춘기 소년처럼, 어쩌자고 대체. 그것도 이 긴박한 상황에서.

[저들의 손길이 루덴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측에서 추적자의 얼굴을 확인했으나 놓치고 말았습니다. 신변 안전에 각별히 유의하시오, 펠릭스 대공자.]

순례자로 분장해 세오드 성 근처를 지키고 있는 호위 패의 우두머리가 게오르그 베르프 백작의 서신을 전해 온 것이 두 주 전이다.

저들이 루덴까지 추적해 왔다면 자신과 어머니가 크라몬드 백작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비밀이 드러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떳떳하게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신분에, 신변까지 위험에 처한 자.’

그것이 나 펠릭스 페일른이다.

크라몬드 백작 못지않은 재산을 가졌다 해도 세상에 그 존재를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이런 주제에 일레인을 마음에 담아서 뭘 어쩌자고.

그러나 이래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면 할수록 펠릭스의 마음과 몸은 일레인을 향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심지어 꿈속에서조차 한 여인을 향해 집요하게 부푸는 몸의 욕망은 처음이라, 펠릭스도 일종의 패닉에 빠져 있었다.

일레인은 자신을 거칠게 다그치는 펠릭스가 당황스러웠다.

“돌아가려는데 쿵, 떨어져 손잡고 이리고 끌고 온 사람이 누군데 왜 화를 내는 거야?”

일레인은 기가 막혀 펠릭스에게 잡힌 손을 거칠게 뺐다.

어, 듣고 보니…….

화를 내던 펠릭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풀어졌다.

“돌아가려고 하는 내 손을 잡아끈 건 펠릭스, 너잖아. 근데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언제 너한테 들러붙었다고.”

말을 하다 보니 일레인은 쌓아 두었던 화까지 점점 더 폭발했다.

노아 부인한테 얻은 음식을 가지고 네 거처에 들었더니, 다시 이런 추파를 던지면 백작 부인께 일러 쫓겨나게 하겠다고 네가 아주 화를 냈다며.

안나에게 찾아와 그래도 네 손 한 번 쓸어봤다고 자랑하던 그 예쁘장한 하녀 따위에게나 할 짓거리를 왜, 네가 감히 내게. 네가 손잡아 끌어와 놓고 이 무슨 개 같은 예절이야!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민 일레인이 입을 열었다.

“간식거리 핑계로 침소에 드나드는 하녀들이 많다 보니 나까지 그리 보이나 보지?”

“어……, 그, 그게 아니고.”

늘 당당하던 펠릭스가 말을 더듬었다.

내 시선이 대책 없이 너만을 찾아서, 그런 내가 제어가 안 되어서 화가 난 걸 네게 풀었어, 일레인.

심중의 말을 할 수 없는 펠릭스가 머뭇머뭇, 화제를 돌렸다.

“나, 몇십 일 해외에 나가야 해, 일레인. 며칠 뒤 떠날 거야. 그 말 하려고 널 붙잡은 거야.”

“……!”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일레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여름이 끝나려면 한 달은 있어야 하는데. 벌써 떠나다니. 마음이 갑자기 갈피를 잃고 수런수런 요동쳤다.

“…다이앤 때문이야? 다이앤이 배블 놈한테…….”

정체를 누설해서 떠나야 하는 거야?

물으려던 일레인이 말을 삼켰다. 놀랍게도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울먹거리고 있었다.

네가 떠난다는데 왜 내가 울먹거리는 거지. 우리 사이가 뭐라고.

당황한 일레인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일레인.”

펠릭스가 다가섰다.

그러자 잉크 냄새와 함께 젊은 몸의 냄새가 훅 코끝에 스며들었다.

그러자 또 자동으로 그날, 자신을 단단하게 감싸 안았던 펠릭스의 손길이 떠올랐다.

정말, 미쳤나 봐.

머리를 흔들며 일레인이 펠릭스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다이앤 때문이 아니야, 일레인. 해적에게 나포된 크라몬드 상선의 행방을 확인하기 위해서야.”

일레인이 물러선 만큼 다가서며 펠릭스가 성실하게 설명했다.

위의 말은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크라몬드 백작의 상선에 실었던 물품이 포르투갈 리스본 상인들에게 흘러들어 간 것이 확인되었다. 그래서 루덴에 있는 크라몬드 백작과 함께 리스본으로 가 배후를 추적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후, 펠릭스는 당분간 종적을 감출 예정이었다. 펠릭스 페일른이란 이름을 버리고 어머니의 친정 오라버니인 해싱턴 공작과 함께 세운 ‘골든우즈 투자회사’의 새 대표로 행세할 예정이었다. 조나단 골든우즈라는 이름의 아메리카 인이 새로 펠릭스가 얻을 신분이었다. 그래야 자신의 뒤를 추적하고 있는 암살자들을 따돌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햄튼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야, 일레인. 그 말을 하려고 했어.”

펠릭스가 다시 한발 다가섰다. 이제 일레인과 펠릭스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펠릭스가 손을 뻗어 왔다.

“울지 마, 일레인.”

펠릭스의 손이 부드럽게 뺨을 쓸고 나서야 일레인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 때문에 울어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른 이 때문에 울어 본 적이 없는데.

펠릭스 따위가 뭐라고. 우리 사이가 뭐라고.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이 너무 뻐근하게 아파서 어디 세게 부딪친 것처럼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고통을 주었다.

“울지 마.”

펠릭스가 다시 속삭이며 일레인의 얼굴을 쓸었다. 뺨을 덥히는 온기가 너무 따스해서, 일레인은 새삼 서러워지고 말았다.

누군가 이렇게 달래 준 것은 처음이었다.

엄마 때문에 울 때 엄마의 상태는 일레인보다 훨씬 나빠서 울면서 엄마를 달래야 했다.

자신을 달래 줘야 할 아빠 크라몬드 백작은 그때마다 너무 멀리 있었다. 아빠가 있을 때 엄마는 절대 우울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니 다이앤은…….

없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만, 펠릭스.”

일레인은 한 걸음 다시 물러나 펠릭스의 손길을 피했다.

너무 따스한 손길에 익숙해질까 두려웠다. 익숙해져서 지금처럼 매일 펠릭스의 몸과, 펠릭스의 손길만 떠올릴까 두려웠다.

그래도 펠릭스가 준 온기는 일레인에게 다시 평정을 되찾아 주었다.

“물어볼 게 있어, 펠릭스.”

일레인이 겨우 침착해진 시선으로 펠릭스의 눈을 직시하였다.

“당신, 누구야?”

정체가 뭐길래 당신이 여기 있다는 말이 새어 나가면 언니가 엄마처럼 곤란한 신세가 된다는 거지?

“나는 알아야 해, 펠릭스. 그래야 엄마와 언니를 지킬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진실을 말해 줘.

거짓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일레인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나는.”

펠릭스는 일순 정체를 다 털어놓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자신을 보면 늘 눈웃음으로 유혹해오는 다수의 여인들과 달리 일레인은 의식적으로 자신과 거리를 유지했다.

‘가문을 책임진 자의 절제이지.’

데뷔탕트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어엿한 가문의 귀공자와 혼인을 해내야 하는 백작가 여식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절제.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책임져 온 펠릭스는 일레인에게서 자신과 같은 절제와 인내를 발견했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부유한 상인의 사생아야, 일레인. 물려받을 작위도 없고 오로지 재산만 많은 젠트리 계급의 사내, 그게 나야.”

펠릭스는 대공의 사생아, 지금의 후계가 죽게 되면 대공의 직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진짜 신분을 털어놓지 않았다. 일레인과 크라몬드 백작의 가족을 더러운 후계 다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다.

복잡하고 더럽게 얽혀 있는 신분을 털어놓으면 일레인이 자신을 영영 보지 않겠다고 할까 무서웠다.

몇 달간 지켜본 일레인은 가문의 일에 있어선 늘 늙은 공작부인처럼 냉철하게 셈을 했다. 그러니 자신이 복잡한 권력 다툼에 끼어 있다는 걸 알게 될 땐, 가문의 안전을 위해 자신을 쳐내려 할 것이다.

그렇게 일레인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펠릭스는 너무 두려워, 속이고 있다는 가책을 누르고 거짓을 말했다.

“그럼, 펠릭스. 가기 전까지 모델을 서 줘. 내년 데뷔탕트 연회에 내걸 그림, 내일부터 시작하자.”

역시나 일레인은 냉철했다. 펠릭스의 신원에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데뷔탕트에 전시하기로 한 그림부터 걱정하는 걸 보니.

입안이 소금을 삼킨 것처럼 썼다.

그러나 펠릭스는 일레인이 손 마디가 하얗게 불거지도록 두 손을 꽉 잡고 있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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