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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에로스-10화 (10/112)

#제10화.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말해 줘서 고마워요, 펠릭스. 그리고 우리 다시 말 편하게 해요.”

오해가 풀렸구나.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긴 손가락으로 일레인의 목을 다시 살폈다.

“피가 배어나진 않지만 흔들리면 상처가 벌어질 수 있어, 일레인.”

“……!”

펠릭스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마다 열감이 피어올랐다.

당황한 일레인이 살짝 뒤로 몸을 물렸다.

펠릭스가 일어나 풀을 우물거리고 있는 브라운에게 갔다. 실컷 물을 마시고 우물 옆에 수북이 자란 풀까지 배부르게 뜯어먹은 브라운은 다시 순한 말이 되어 순순히 펠릭스의 손에 끌려왔다.

“등자에 발 올리고, 천천히.”

펠릭스는 일레인의 허리를 잡아 등자에 발 걸 때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도와주었다.

일레인이 안장에 오르자 펠릭스가 양해도 없이 휙 뒤에 올라탔다.

“펠, 펠릭스. 이게 무슨!”

“흔들리면 상처가 터질 수 있어. 목이라서 위험해, 일레인.”

펠릭스가 일레인의 손에서 고삐를 빼내 대신 쥐고 말의 배를 살짝 찼다.

브라운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밀착한 펠릭스의 몸이 등에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일레인은 자꾸 안장 앞쪽으로 몸을 꼬물거렸다.

“완전히 기대. 흔들리면 목의 상처가 벌어진다니까!”

펠릭스는 오른손에 고삐를 몰아 쥐고, 왼손을 아예 일레인의 어깨 밑으로 넣어 오른쪽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단단하게 감쌌다.

일레인의 등과 허리가 펠릭스의 가슴과 배에 완전히 밀착했다.

그러자 브라운이 점점 속도를 올려도 확실히 흔들림은 적어졌다…….

…흔들림은 거의 없어졌지만.

포구에서 세오드 성까진 양과 소가 풀을 뜯는 목초지여서 누가 볼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펠릭스도 그 점을 인지해서인지 신사와 숙녀답게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예법 따위를 깡그리 무시한 채 일레인을 완전히 품에 가두고 달렸다.

평소 갖춰 입어야 하는 코르셋을 벗고 시골의 사내들이 입는 바지와 셔츠, 조끼를 입는 탓에 일레인은 펠릭스의 몸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얇은 린넨 천을 통해 쿵쿵 울리는 심장의 박동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단단하고 강인한 펠릭스의 육체와, 머리 위에서 들리는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일레인을 혼미하게 하였다.

게다가 브라운은 일레인의 속도 모르고 평소처럼 거침없이 내달렸다. 소와 양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군데군데 흐르게 만든 작은 도랑과 목초지 경계를 나눈 야트막한 목책이 나타날 때 속도를 줄이는 대신 보폭을 크게 벌려 휙 몸을 솟구쳤다.

브라운이 뛰어올랐다 착지할 때마다 펠릭스는 더욱 단단하게, 조금의 틈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일레인을 당겨 안았다.

펠릭스의 팔이 이따금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일레인의 가슴을 스쳤다. 그럴 때마다 일레인의 가슴은 터질 듯 부풀었다.

일레인은 자꾸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둥둥둥, 북을 치듯 울려 댔다.

이 거북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과, 더 가까이 펠릭스의 가슴과 밀착하고 싶은 몸의 욕망 사이에서 일레인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기만 했다.

모순된 욕망 사이에서 신경이 너덜너덜해질 무렵에야 세오드 성이 나타났다.

브라운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손잡이 단단히 붙잡고 있어, 일레인.”

어쩐지 거칠어진 목소리로 속삭인 펠릭스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일레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레인은 등자에서 발을 빼내고, 조심스럽게 펠릭스의 손을 잡고 바닥에 내렸다.

“고마워, 펠릭스.”

일레인은 감히 펠릭스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거칠어진 호흡을 숨기며 성으로 향했다.

등으로 오랫동안 강렬하게 따라붙는 펠릭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꼿꼿하게 몸을 세운 일레인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가슴까지 들썩이는 거친 호흡과, 무엇보다 펠릭스에게 향하는 제 마음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 * *

이날 새벽의 일은 일레인과 펠릭스만의 비밀로 남았다.

안나가 옷시중을 들다가 목의 상처를 보고 호들갑스럽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지만 조각칼에 스쳤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그날부터 일레인은 필사적으로 펠릭스를 피했다. 당분간 기본 데생에 충실하고 정물화와 풍경화로 색채 조합을 연구하겠다는 구실로 펠릭스를 모델로 그리는 것도 피했다.

“샬럿이 보내 달라는 펠릭스 그림은 언제 그릴 거니?”

일주일 뒤, 다시 기운을 차린 엄마가 물었다. 옆에서 페일른 부인도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제 데뷔탕트 연회에 선보일 그림이니까 정말 잘 그리고 싶어요. 신화도 다시 읽으며 무슨 인물로 할지 구상해 봐야 해요.”

핑계는 그럴듯했지만, 사실은 펠릭스를 볼 때마다 머리가 온통 혼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식사 시간에 눈만 마주쳐도 가슴을 스치던 그의 단단한 팔, 뜨겁게 등과 엉덩이를 압박해 오던 탄탄한 몸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무도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일레인은 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았다.

이따금 하녀와 하인들이 킬킬거리며 속닥거리는 말을 통해, 헛간이나 외진 계단 아래서 들려왔던 가쁜 숨소리에 섞인 고양이 울음 같은 신음을 통해 남녀의 성애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남녀 간의 신체 접촉이 이토록 집요하고 강렬하게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리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펠릭스의 탄탄한 상체와, 등과 배와 가슴에서 느껴지던 뜨거운 감촉을 생각나게 했다.

일레인은 일종의 패닉에 빠졌다.

눈을 뜨게 된 성애의 경험은 그림에서도 드러났다.

신화 속 신들은 대개 최소한의 의상만 걸치고 있다.

그래서 일레인은 최적의 몸 표현을 위해 다비드 상 모사품을 다시 데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군살 없이 단단한 석고상 위로 자꾸 우물가에서 보았던 펠릭스의 몸이 겹쳐 보였다.

몽환과 열정 속에서 일레인의 손이 신들린 듯 펠릭스의 몸을 종이 위에 옮겼다.

일레인이 그린 데생을 본 페일른 부인이 드물게 탄성을 질렀다.

“어머 일레인, 몸의 선이 더 정확해지고 골격의 음영이 훨씬 자연스러워졌네. 이야, 정말 많이 노력했구나.”

화지 위에 옮긴 건 눈앞의 다비드 상이 아니라 선생님 아들의 몸인걸요.

이 사실을 절대 말할 수 없는 일레인은 스승님의 칭찬에 얼굴만 붉혀야 했다.

그러자 일레인의 부끄러움이 사내의 나신을 그리는 아가씨의 쑥스러움이라고 오해한 페일른 부인이 정색을 했다.

“일레인, 다비드 상을 보고 사내의 몸이 가진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이토록 생생하게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재능인 거야. 그걸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게 아니라고요, 페일른 부인.

일레인은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일레인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한 단계 도약했음을 스스로도 인정했다.

지금까지 일레인에게 있어 그림 그리기는 귀족 가문의 여식이 갖추어야 할 여러 미덕 중 유일하게 강렬한 흥미를 끄는 취미 정도였다.

언니 다이앤이 출중한 미모와 우아한 행동거지로 사교계에 돋보이는 아가씨가 되었다면, 자신에겐 그림이 있다는 정도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펠릭스와 몸을 부딪치고 난 후, 이제 일레인은 사물을 화폭 위에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정도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몸을 들끓게 하고 입 안을 바싹바싹 마르게 하던 열망은 이제 그리는 대상이 주는 느낌을 강렬하게 화폭에 옮기고자 하는 욕망으로 옮겨가 사물과 사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러자 일레인이 그리는 그림의 대상이 생생하게 색을 얻고 역동적인 생동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요소는 과감하게 배제하고 표현하고 싶은 면에 집중해 화폭에 옮긴 피사체는 현실의 피사체와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만큼 더 강력하게 일레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구현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전에 그린 데이지가 풀숲에 피어난 여린 데이지 꽃이었다면, 두껍게 올린 물감 위에 꿈틀거리는 듯한 붓질로 마무리된 지금의 데이지는 매서운 바닷바람을 이기고 피어난 승리의 여신 같이 거칠고 강한 데이지였다.

이즈음부터 엄마 바이올렛도 작업실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으로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페일른 부인의 권유 덕분이었다.

처음에는 밑그림도 없이 캔버스 위에 내키는 대로 색을 칠했지만, 점차 그림은 형체를 갖추고 어둡기만 하던 색채도 다양해졌다. 그리고 정말 엘렌 페일른의 말처럼 바이올렛은 지독한 우울에서 조금씩 회복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는 푸르른 목초지와, 언덕 너머 막 이삭이 팬 귀리 밭은 노랗게 흔들리는 세오드 성에서 세 여인은 그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성장해갔다.

펠릭스를 피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6월이 되자마자 아빠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재산 관리인인 존 게인즈 씨가 무슨 서류 뭉치를 마차 가득 싣고 와 펠릭스에게 건넸다. 그 이후 펠릭스는 식사조차도 홀로 때우며 서재에서 내내 서류 작업에 열중했다.

‘참 좋은 시절, 찬란한 색채로 피어난 나날.’

일레인의 스물 생애 동안 가장 충일하게 찬란했던 초여름은 그러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짧기만 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평화로운 여름날은 또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시작은 다이앤이 낸 작은 균열에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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