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6화 (6/112)

#제6화. 질투, 하는 겁니까

“롱본 씨, 먼 길 오셨는데 좀 쉬시고 내일 출발하시지요. 뷰컴, 롱본 씨 거처로 안내해 드리고 식사랑 여러 가지 준비해 드리세요.”

일레인이 자연스럽게 집사장에게 명을 내렸다.

뷰컴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롱본과 함께 나갔다.

백작 부인이 있는데도 일레인이 손님 접대와 처우를 정하는 건, 바이올렛이 그간 안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였다.

“그림과 관계된 것이니?”

페일른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림과 관계된 것이라면 자신도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여러 가지입니다, 선생님. 이따가 말씀드릴게요.”

딱 부러지게 말하고 일레인이 서재로 향했다. 이럴 땐 여덟 살 무렵부터 백작가의 안살림을 챙겨 오면서 몸에 배게 된 권위가 일레인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백작 부인도, 스승인 페일른 부인도 철없이 마구 내지르는 언니 다이앤도 일레인이 치맛자락을 쥐고 성큼성큼 작업실을 나서는 걸 말없이 보기만 했다.

“일레인은 어째서 저를 끼워 주지 않는 것일까요?”

울먹거리는 다이앤의 목소리가 문을 닫는 일레인의 등 뒤로 떨어졌다.

늘 이런 식이었다.

다이앤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을 담고, 쓰러질 듯 연약한 목소리로 울먹거린다.

그러면, 나쁜 사람은 늘 일레인이었다. 그리고 일레인은 이제 나쁜 사람이 되는 데에 이골이 났다.

“차 드시겠습니까, 일레인 영애?”

서재에 들어섰을 때 펠릭스는 티앤에서 홍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서재의 커다란 탁상 한쪽에는 온갖 쿠키와 아이스 셔벗까지 예쁜 접시에 골고루 담겨 있었다.

‘하녀들이 맨날 펠릭스 얼굴 한 번 보기를 소원해서 간식거리를 핑계로 서재를 드나든다더니.’

일레인의 시선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귀한 간식거리를 훑어서일까.

“가져오지 말라고 해도 청소를 핑계로 자꾸 가져다 놓아서…….”

변명처럼 펠릭스가 웅얼거렸다.

“크라몬드 상사의 기밀 서류도 꽤 있을 텐데 하녀들이 막 드나들게 두어도 되나요?”

평소 별로 감정 표현이 없는 일레인의 눈초리가 뾰로통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에 펠릭스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을 둘러싸고 여자들이 서로 견제하고 질투하는 모습은 늘 성가시기만 했는데, 일레인의 관심은 심장을 말랑거리게 녹였다.

“아, 중요한 서류는 모두 저기 안쪽 금고에 늘 보관하는지라…….”

서재 구석에 커다란 자물쇠가 튼튼하게 달린 마호가니 금고를 가리켜 보이던 펠릭스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나직하게 깔리는 웃음소리가 애무하듯 일레인의 귓불을 훑었다.

두근.

일레인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일레인은 감정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늘 애늙은이처럼 감정을 노련하게 숨기던 일레인이 자신 앞에서 또래의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자, 펠릭스는 더 놀리고 싶어졌다.

일레인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펠릭스가 짓궂게 물었다.

“질투, 하는 겁니까?”

“무, 무슨. 질투라니…….”

누가 누굴 질투한대.

당황한 일레인이 시선을 피하며 차를 들이켰다.

‘아 뜨거.’

불덩어리 같은 찻물이 목구멍에서 식도를 핥고 내려갔다.

펠릭스는 뜨겁단 말도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목을 잡고 있는 일레인의 모습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림 그릴 때는 속옷까지 벗길 듯 샅샅이 쳐다보면서.’

평소 오찬이나 저녁 만찬 자리에서는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원하지 않아도 파리떼처럼 들러붙는 여자들에게 넌덜머리가 나 있는 펠릭스는, 자신과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레인을 보면서 안심이 되면서도 또 초조했다.

어머니가 일레인의 그림을 보고 제자로 키워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펠릭스는 맹렬하게 반대했었다.

정체를 드러내 봐야 좋을 것이 하나 없는 어머니가 브리티나의 권력자들이 주시하는 가문의 영애를 가르치시겠다니.

“어머니 정체가 드러나면 크라몬드 백작가에도, 이 그림을 그렸다는 백작가의 영애에게도 큰 누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머물렀다는 흔적이 너와 함께 그림 몇 점뿐이다. 그것도 엘렌 해싱턴도, 엘렌 폰 바덴니히도 아닌 제이콥 스탠픽셔란 이름으로 그린 그림 열다섯 점. 그 이후 그린 그림은 엉뚱한 화가의 이름으로 알려진 채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 않느냐? 나는 화가로서의 내 존재를 이 아이를 통해 이어야겠다!”

자신과 똑같은 검푸른 눈동자를 비탄과 초조에 번득이며 어머니가 애원했다.

펠릭스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외면하기가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만날 사람은 만나고야 마는 것인가.

때마침 윌슨 크라몬드 백작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부인과 딸들을 위해 재산을 은닉할 수 있는 방법을 물어왔다.

어머니는 화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이어 갈 제자를 얻어서 좋고, 펠릭스 자신도 잠시의 은신처를 얻어서 좋은 제안이었다.

그래도 수도 루덴도 아닌 궁벽한 시골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실이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노어 같은 소녀를 만났지.’

고양이 털을 잔뜩 묻힌 초록 드레스의 아가씨를 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 전 잃은 여동생 엘리노어가 떠올라서였다.

엄마가 자랑스러워할 만큼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내 가여운 동생 엘리노어.

‘엘리노어에게서도 늘 물감 냄새와 라일락 향이 났었지.’

애틋하게 그리운 향을 풍기는 아가씨가 몹시 닮은 눈빛으로 자신을 그릴 때, 펠릭스는 살아남기 위해 딱딱하게 굳혀 온 심장이 스르르 녹아 말랑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자꾸 일레인에게 눈이 갔다. 대책도 없이.

그리고 시선이 머물 때마다 마음이 커졌다. 어쩌자고.

“물어볼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펠릭스 씨.”

“세 가지 물어봐도 좋습니다, 일레인 영애.”

맞은편에 앉아 강렬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펠릭스의 시선을 피하며 일레인은 그간 가장 궁금했던 사안부터 물었다.

“선생님께서 몸이 안 좋으신가요? 이따금 창백해진 채 식은땀을 흘리십니다.”

뜻밖의 질문이었다.

펠릭스는 일레인이 자신과 어머니의 정체에 대해 물어올 줄 알았다. 물어보면 거짓을 말해야 하기에 미리 고통스러웠는데.

“…심장이 안 좋으십니다. 그래서 영애를 가끔 가혹하리만치 몰아치시는 겁니다. 힘드실 텐데 잘 따라와 주셔서 어머니를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일레인은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설마설마했는데.

이제 막 화가답게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는데.

일레인은 울먹거리며 펠릭스에게 물었다.

“의원을 모시고 오면…….”

“이미 저명한 의사 몇 분께 진료받았습니다.”

펠릭스가 단호하게 일레인의 말을 잘랐다. 의사는 다음번에 발작이 일어나면 위험할 것이라 했다.

“예……, 그러시군요.”

가망이 없으시다 단언하는 펠릭스의 말은 커다란 칼처럼 일레인의 심장을 찔렀다.

페일른 부인을 만나고 그림의 세계에 푹 빠지게 되었는데. 영혼을 던져 탐색해 볼 만한 세계를 함께 걸어갈 스승을 얻어 기뻤는데,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습관처럼 외면하며 일레인은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펠릭스 씨는 자신의 인물화가 대중에게 전시되어도 괜찮은 건가요? 이미 헤르메스 신으로 전시된 건 알지만 그건 어렸을 적이니까요.”

또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질문은 가슴을 아프게 할퀴었다.

펠릭스의 보기 좋은 눈썹이 착잡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일레인?”

늘 유들거리거나 냉정하던 펠릭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레인의 질문이 뭔가 깊게 담아 둔 금단의 영역을 건드렸는지, 말마저도 경칭을 버리고 짧았다.

“이제까지 여러 점 그리면서 묻지 않더니, 왜 새삼스럽게?”

그래서 일레인도 짧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에겐 ‘영애’란 경칭을 붙이는데, 귀족이 아닌 펠릭스에게 ‘경’을 못 붙이고 그냥 ‘씨’로 호칭하는 게 영 불편했던 참이었다.

“누구나 다 알아보는 게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잖아.”

그 다정한 말에 펠릭스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대는, 꼭…….”

엘리노어처럼 말하는군.

뒷말은 이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제이콥 스탠픽셔란 이름으로 펠릭스를 그렸을 때, 헤르메스 그림을 본 사람들마다 펠릭스를 아는 척하며 만져 댔다. 알지도 못하는 어른들이 쓰다듬고 때로 은밀한 곳까지 주물러 대는 통에 아홉 살의 펠릭스는 대인기피증까지 걸렸었다.

그때, 여동생 엘리노어가 어머니한테 대들었다.

“왜 펠릭스를 그려 팔아서, 저렇게!”

그러자 어머니는 검푸른 눈을 미친 사람처럼 번득이며 소리쳤다.

“알려 주어야지! 그들에게 오토 폰 바덴니히 대공의 아들 펠릭스 폰 바덴니히 대공자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어야지! 진정한 대공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어야지!”

어머니는 아들 펠릭스가 건재하다는 걸 그림으로 그려 온 천하에 공표하는 것이, 그래서 너희가 인정하지 않아도 펠릭스는 차기 대공감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걸 과시하는 것이, 자신을 버린 대공에 대한 복수라고 굳세게 믿었다.

공국의 대공비와 그의 아들은 사생아 펠릭스의 존재를 지우고 싶어 했다. 훗날 있을지도 모를 승계 논쟁의 싹을 미리 잘라야 한다고 제멋대로 확신했다.

이 모든 사태를 조장한 대공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펠릭스를 부정하지도 않았지만 인정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그림으로 펠릭스의 존재를 알리면 추격이 시작되었다. 추격을 피해 달아나 간신히 한숨 돌릴 정도로 자리를 잡으면 어머니가 그림으로 다시 그의 건재를 공표했다.

이 악순환이 펠릭스가 살아온 21년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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