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에로스-5화 (5/112)

#제5화. 내년 봄, 데뷔탕트

그렇게 그림과 함께 5월이 끝나가던 마지막 날이었다.

오랜만에 성으로 돌아온 펠릭스가 어렵게 시간을 내 모델을 서 주었다.

페일른 부인은 음악에 빠진 젊은 청년의 모습을 일레인에게 데생하도록 시켰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듣는 청년이야. 그럼 이렇게, 정면을 응시하겠지?”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괸 채로 펠릭스가 일레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포즈를 취했다.

정말로 연인을 바라보듯 강렬한 시선으로 응시해 오는 시선에 일레인은 어쩐지 눈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가슴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얼굴에 홍조를 띤 채 일레인이 가늘게 깎은 목탄을 들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세세하게 표정을 그리려 눈을 들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 자신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펠릭스의 시선과 맞부딪쳤다.

“펠릭스, 입꼬리 너무 올리지 마라.”

무엇이 그리 기분이 좋은지 자꾸 실실거리며 일레인을 향해 웃는 펠릭스를 페일른 부인이 꾸짖을 때였다. 엄마가 숨을 몰아쉬며 작업실에 달려왔다.

“일레인, 샬럿이 편지를 보냈는데!”

엄마는 해밀턴 후작가의 집사 롱본 씨와 함께였다.

“내년 봄 네 데뷔탕트 축하 연회를 필론 하우스에서 하면 어떻겠냐셔.”

‘내 데뷔탕트 연회를 필론 하우스에서!’ 일레인이 놀라 목탄 연필을 놓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일레인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펠릭스의 시선은 변함없이 일레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네가 최근에 그린 그림 몇 점 샬럿한테 보냈잖니. 그 그림을 본 샬럿이 네 그림 전시와 함께 데뷔탕트 기념 연회를 개최해 주겠다고 한 거야. 다이앤의 데뷔탕트 축하 연회는 크라몬드 저택에서 여는 바람에 유력 가문의 귀부인과 영애들이 오질 않았잖니. 하지만 샬럿이 연회를 주관해 주면 해밀튼 후작 때문에라도 다들 올 수밖에 없어.”

엄마는 가여울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눈물이 어룽진 푸른색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번득거리고, 뺨은 붉게 달아올랐다.

“잘 되었구나, 일레인. 네 그림이 드디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페일른 부인이 자랑스럽다는 듯 일레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자신의 그림이 브리티나 최고 가문의 사람들에게 보여진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던 일레인의 시선이 펠릭스의 시선과 마주쳤다. 검게 깊어진 그의 눈빛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 없었다.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보통 일 년 안에 약혼을 하고, 3년 안에 결혼을 한다. 그 시기를 놓치고 나면 노처녀로 늙어 가야 한다. 늙은 귀족의 후처로 들어갈 수 있어도 운이 좋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부쩍 다이앤이 요즘 초조해하는 것이지.’

일레인의 시선은 문가에 기댄 채 뾰쪽한 눈으로 작업실을 훑고 있는 다이앤으로 향했다.

화를 내는 모습마저도 다이앤은 몹시 아름다웠다.

‘소녀의 상심’이란 제목으로 화폭에 옮기고 싶을 만큼.

“필론 하우스 연회장 한 면을 알차게 채울 수 있는 대형 그림을 여러 점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일레인 영애.”

롱본 씨가 끼어들어 해밀턴 후작가의 문장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샬럿 고모님이 보낸 편지였다.

일레인은 양해를 구하고 창가 자리에 앉아 샬럿 고모의 편지를 뜯었다.

[사랑하는 조카 일레인.

바이올렛이 보낸 초상화 세 점과 데생 다섯 점을 보았다. 가슴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바이올렛을 그린 ‘슬픔의 원형’을 본 순간 숨이 턱 막히게 눈물이 났다.

다만 일레인, 내년 봄 데뷔탕트를 빙자한 너의 전시회를 위해서 이 고모가 몇 가지 부탁하고자 한다.

첫째, 데생으로 그린 그 잘생긴 사내의 그림을 대형으로 그리거라. 네 데뷔탕트 때 필론 하우스 연회장 중앙에 크게 걸 거야. 그 옆엔 바이올렛의 ‘슬픔의 원형’을 걸 것이고.

다만 그 사내는 너무나 고혹적으로 잘생겨서, 무슨 모습이든 상관없으나, 반드시 신화 속 인물로 그리거라. 왜 그 사내를 신화 속 인물로 그려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여기까지 읽고 일레인은 저도 모르게 쿡쿡 웃고 말았다.

‘데뷔탕트를 치르는 것이 저리 즐거운가.’

펠릭스의 눈이 차가워졌다.

평소에는 자신과 거의 말을 섞지 않고 거리를 두는 일레인 때문에 펠릭스는 늘상 그림에 열중한 일레인의 얼굴만 볼 수 있었다. 그럴 때 일레인은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살짝 입술을 벌린 채 해부할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그렇게 진지하기만 하던 소녀가 편지를 보며 즐겁게 웃으니, 펠릭스는 어쩐지 기분이 몹시 나빠지고 말았다.

“뭔데 일레인? 엄마한테도 말해 주렴.”

대체 무슨 이야기가 쓰여 있길래 웃는 것인지 궁금한 바이올렛이 일레인을 재촉했다.

“이따가요, 엄마. 따로 말씀드릴게요.”

여자 화가가 인물화를 그릴 때 사내를 모델로 그리면 따라붙을 구설수를 걱정하는 의미였다. 그나마 신화를 모티브로 해서 남자를 그리면 추문을 피해갈 수 있으리란 고모님 말씀을 펠릭스 앞에서 하기는 쑥스러웠다.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일레인은 이마를 찌푸렸다. 글씨 표본집에 나올 것처럼 단정하던 샬럿 고모의 글씨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트러졌기 때문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을 거듭해 읽어서야 해독한 바는 다음과 같다.

[다이앤을 필론 하우스로 보내야 한다. 내가 여러 번 다이앤을 초청하는 편지를 보냈었고, 얼마 전까지도 곧 올 것처럼 기뻐하더니 어찌 된 일인지 요새는 한사코 거부하는구나.

다이앤이 여러 가지를 루덴의 칼 배블 경에게 묻고 있어. 배블 경은, (‘경’이란 남작 작위조차 아까울 뿐이다. 선대 배블 남작 부인은 대체 무얼 먹어서 그런 잡놈을 낳았는지) 작위만 있다뿐 여왕 속옷 색깔까지 떠벌리고 다니는 천하의 개XXX다. 그런 놈과 연통을 주고받다니…….]

샬럿 고모의 화가 종이를 뚫고 하늘 끝까지 닿을 기세였다.

“지금 당장 가긴 곤란하다고 고모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그때, 갑자기 다이앤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작업실을 울렸다.

일레인에게 편지를 건넨 롱본 씨가 이번에는 다이앤에게 편지를 건네며 샬럿 고모의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다이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억누르고 억지로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편지 전달 순서가 일레인보다 다음인 것도, 일레인의 데뷔탕트 축하 연회가 내년에 그렇게 화려하게 열릴 계획이란 것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일레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펠릭스의 시선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일레인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어야 해요. 그렇지, 일레인?”

물어보는 대상은 일레인인데 간절한 시선은 펠릭스에게 맞춰져 있었다.

“어, 음…….”

일레인이 방금 읽은 샬럿의 경고를 떠올리며 무어라 말할까 고민할 때였다.

롱본 씨가 재빨리 기회를 포착했다.

“다음 달에 브라바트 공국의 빌헬름 대공자께서 필론 하우스를 방분하신다고 연통을 보내셨습니다, 다이앤 영애.”

“어머, 빌헬름이!”

반갑게 ‘빌헬름’을 내뱉던 일레인은 그러나 펠릭스를 보면서 입술을 끌어내리고 태연한 척했다.

“어차피 여름 지나면 루덴으로 돌아갈 건데요. 그때 가서 뵙겠습니다.”

굳이 여름을 강조해서 말하는 걸 보면, 다이앤은 펠릭스가 세오드 성에 있는 한 여기 머물러 있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일레인은 그런 다이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이앤이 펠릭스를 좋아하는 것인가.’

하지만 진지하게 좋아할 리는 없는데.

다이앤은 왕족이나 공작가의 자제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공언을 해 왔다. 진지하게 청혼한 백작가와 남작가 영식이 열 명이 넘었는데도 모두 다 거절했다.

그러니 펠릭스에게 진심일 리 없다.

‘…그럼, 펠릭스는?’

일레인의 시선이 다이앤에게서 펠릭스에게 옮겨갔다.

아까부터 시종일관 올곧게 일레인만 바라보고 있던 펠릭스가 일레인의 시선이 제게 오자 굳어진 표정을 풀었다. 팽팽하게 긴장되었던 광대뼈가 좀 느슨해지고, 한일자로 맞물렸던 입매가 곡선으로 휘어 올랐다.

어쩐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변화였다.

‘지독한 우울에 정신이 나가 버렸던 엄마가 드디어 정신을 차려 나를 보았을 때. 그때 내가 엄마에게 보였던 눈빛이 저러했을까.’

그래서 일레인은 충동적으로 말했다.

“펠릭스 씨, 의논할 것이 있는데요.”

일레인이 말을 걸어오자 펠릭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제까지 일레인이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서재에서 따로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일레인은 펠릭스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걸 부러 피해 왔다.

백작가 영애가 신분도 불명확한데다가 요사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사내를 모델로 쓰는데, 둘 사이가 친밀하기까지 하더란 추문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크라몬드 백작가의 막대한 재산 한 귀퉁이 뜯어먹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들에게 공연한 약점을 쥐여 주고 싶지 않았다.

“뭔데……. 뭔데, 둘이서만?”

다이앤이 서둘러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일레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곤 성큼 맞은편 서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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