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풋풋한 청년이 뿜어내는 아찔한 관능
“일레인, 너의 강점은 인물화다. 인물의 개성과 심성을 아주 날카롭게 잡아내 극적으로 표현하는 안목이 있어. 그렇지만 기본 데생이 약해서 결과물이 안목을 따라가지 못해.”
며칠 일레인의 그림 작업을 지켜본 페일른 부인이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당분간 이젤과 화구통을 들고 나가 봄이 무르익어가는 초록빛 벌판을 그리는 건 중지하고, 석고상과 인물화를 그리기로 했다.
인물화를 그릴 때 모델은 주로 펠릭스가 서 주었다.
일레인이 강력하게 펠릭스를 모델로 욕심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페일른 부인의 바람도 들어 있었다.
가을이 오면 햄튼 스쿨로 떠나야 하는 아들의 모습을 페일른 부인은 화폭에 담고 싶어 했다.
궁벽한 시골인지라 따로 전문 모델을 구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펠릭스는 좋은 대안이었다.
짙은 검은 머리에 뚜렷하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 얼핏 보면 검은색으로 보이는 강렬한 푸른색 눈동자는 제대로만 그리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인물화가 되었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벌써 크라몬드 가문의 투자 자문까지 할 정도로 수완이 있다는 펠릭스는 손님용 별채에 페일른 부인과 함께 묵고 있었다.
별채는 총 3층으로, 3층에 서재와 그림 작업실이 있다. 그리고 2층에는 방 두 개와 작은 응접실, 1층은 넓은 연회장이 있었다.
펠릭스는 주로 3층 서재에서 매일 커다란 책상 위에 높게 쌓인 서류를 보고, 이따금 아빠 크라몬드 백작의 사람들과 서신을 교환하느라 분주했다.
그래도 페일른 부인이 모델을 서 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기꺼이 책이나 서류를 들고 복도 건너 맞은편 그림 작업실로 건너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셔츠 차림으로 턱을 괸, 몽상에 빠진 젊은이로 해 보자.”
페일른 부인이 정해 준 대로 펠릭스는 석고상이라도 된 듯 끈기 있게 자세를 유지했다.
펠릭스를 그릴 때마다 일레인은 어쩐지 목이 말랐다.
정면을 응시하는 초상화를 그릴 때면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레인은 고집스럽고 집요하게 펠릭스를 제대로 화폭에 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레인, 인물화는 그 인물에게서 받은 느낌을 극대화해 표현하는 거야. 그리는 대상이 가진 성마름, 절박한 고뇌, 노동에 지친 허탈한 분노 등등. 펠릭스의 모습에서 너는 무엇을 찾았니?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일레인.”
일레인은 인물에게서 받은 느낌을 극대화해 표현하라는 페일른 부인의 가르침에 따라 펠릭스를 보았다. 그리고 매번 그에게서 발견한 것은 지독한 아름다움이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풋풋한 청년이 뿜어내는 아찔한 관능. 성인의 사내처럼 단단하지 않으나 보기 좋게 여물어 가고 있는 육체가 뿜어내는 찬란한 젊음.
북해의 바다처럼 검푸르게 빛나는 차가운 눈동자를 화폭에 그려 넣을 때마다 일레인은 지극히 아름다운 피사체를 그리고 있다는 황홀감에 빠져 붓을 휘두르곤 했다.
그림에 몰두한 자신의 모습을 펠릭스 또한 홀린 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 * *
페일른 부인이 성에 온 지 두 달이 흘렀다.
꾸준하게 펠릭스를 그린 덕분에 일레인의 데생 실력은 페일른 부인이 ‘이제 그만 하산하여라’ 하실 만큼 좋아졌다.
그래서 일레인은 페일른 부인과 함께 종종 야외 스케치를 나가거나, 다이앤과 바이올렛을 모델로 인물화를 그렸다.
그런데 지금, 일레인은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대체 저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귀리 밭이 보이는 언덕에서 스케치를 하다 근처 자작나무 숲을 헤치고 다니는 약초꾼을 발견한 일레인이 생각했다. 자작나무 아래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야생 민들레나 야로우 꽃을 제외하고 변변한 약초랄 풀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오드 성이 있는 이곳은 브리티나 왕국의 구석빼기. 여행자도 거의 없어 낯선 이를 마주하면 바로 알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페일른 부인과 펠릭스가 온 뒤로 종종 낯선 이들이 눈에 띄었다. 때로는 변변한 숲도 없는 목초지에 지팡이를 짚은 약초꾼 무리이기도 했고, 또 때로는 제대로 된 교회도 성자도 없는 마을에 찾아든 순례자 무리이기도 했다.
이방인들은 일레인과 페일른 부인이 목초지나 귀리 밭을 스케치하러 나갈 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펠릭스, 당신은 누구야?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 세상에 보여야만 하는 페일른 부인의 정체는 또 뭐야?’
여러 이름으로 활동한 페일른 부인은 화가로서 정체는 확실했지만 대체 그 이전에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이앤이 추궁할 때마다 엄마는 금기처럼 입을 꽉 다물곤 했다.
펠릭스가 아주 빼어난 투자 전문가인 건 확실했다. 아빠 윌슨 크라몬드 백작의 재산 관리인인 게인즈 씨가 거의 매일 사람을 보내 국채와 채권 투자를 의논하는 걸 직접 들었으니까.
일레인은 두 사람에게 직접 정체를 캐묻지 않았다.
한사코 숨겨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고, 또한 아빠와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 정체가 무엇이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레인은 매일매일 착실하게 그림을 그렸다.
5월 들어 펠릭스가 많이 바빠졌다. 종종 루덴에 다녀오기 위해 성을 떠나기도 했고, 성에 있을 때도 아빠가 보낸 사람들과 뭔가를 끝없이 논의했다.
바쁜 펠릭스 대신 다이앤과 엄마가 인물화 모델을 서 주었다.
그렇지만 다이앤은 모델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다. 다이앤이 고집하는 포즈는 최신 유행의 드레스를 완벽하게 차려입고, 아름다운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정면 각도로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앉아 있는 자세였다. 옆으로 앉는 것도, 때로 슬픈 듯 아련하게 얼굴을 조금 일그러뜨리는 것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 그리고 나자 더 그릴 모습이 없었다.
오히려 엄마 바이올렛이 적극적으로 모델 포즈를 취해 주었다.
‘슬픔의 원형’이란 제목으로 유화를 그릴 때는 장장 세 시간이나 검은 드레스 자락을 아무렇게나 펼친 채 엎드려 있는 포즈를 취했다.
‘슬픔의 원형’을 그리고 났을 때 페일른 부인은 일레인의 그림을 보며 말씀하셨다.
“일레인, 얼굴과 몸의 자세 전체에서 슬픔이 묻어날 수 있게 윤곽을 희미하게 처리한 것은 잘 했어. 다만 치맛자락을 좀 봐봐. 슬픔이 아스라이 흘러내리는 침잠된 느낌을 주고자 했다면 테레빈유를 더 섞어서, 이렇게.”
페일른 부인은 검은 계열의 색을 다양하게 준비한 다음, 아직 마르지 않은 치맛자락에 물감과 테레빈유를 듬뿍 섞어서 여러 번 덧칠했다.
“자 봐봐, 이렇게 마르기 전에 비슷한 계열로 여러 번 색을 올리면 깊이감이 살아. 또 기름을 많이 섞으면 그림 전체가 흐르는 듯 아련한 느낌이 난단다. 바이올렛이 풍기는 덧없는 슬픔이 더욱 깊은 느낌으로 다가오지.”
엄마는 이 그림을 너무나 좋아했다.
흰색 커튼이 살랑, 마침 불어온 바람에 잘게 펄럭이는 가운데 아리따운 여인이 긴 탁자에 옆으로 엎드려 있는 그림이었다.
정면을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는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흰 목덜미는 밝게 비친 햇살에 희게 빛나 곧 스러질 것처럼 아스라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었다. 무엇보다 상복인 듯 검은색으로 입은 치맛자락은 흘러내리는 듯 주름져 켜켜이 쌓인 슬픔의 두께를 증언하였다.
“샬럿한테 보내야겠다. 샬럿의 필론 하우스에 정 중앙에 걸릴 만한 역작 아니니?”
고모 샬럿은 아빠 크라몬드 백작의 손위 누이로 해밀튼 후작과 혼인하였다. 브리티나 귀족 세력 중 해싱턴 공작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세를 이루고 있는 해밀튼 후작의 부인으로서 샬럿은 사교계에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엇보다 예술 작품에 대한 안목이 빼어나, 해밀턴 후작가의 영지가 있는 배런 지방의 필론 하우스의 살롱은 유럽 최고의 작품만 엄선되어 전시된 걸로 유명했다.
계절마다 전시품을 바꾸는 필론 하우스의 살롱에 아주 작은 그림 한 점이라도 걸리면 그 화가의 작품은 단숨에 열 배 이상 뛰어올랐다. 그래서 유럽의 신진 화가들은 빼어난 작품을 그릴 때마다 간절한 희망을 품고 샬럿 고모한테 작품을 보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이, 아직은 그 수준이 아니에요, 엄마.”
“아니긴. 샬럿이 일레인 너한테 기대가 얼마나 큰데. 로딘 선생이 떠난 후 새로 선생을 찾으라고 일주일이 멀다하고 사람을 보내 날 닦달한 사람이 샬럿 아니니.”
늘 창백한 엄마가 뺨에 홍조를 띨 정도로 열심히 일레인을 설득했다.
일레인은 가슴 한 구석이 찌르르 울리는 슬픔을 느꼈다.
‘엄마가 저렇게 열심히 나를 알리지 못해 안달이신 것은.’
엄마의 과거 때문이다.
엄마의 템슨 가문이 멸문되면서 자신에게 따라붙은 오명 때문에 혹시 다이앤과 자신의 장래가 어두울까 봐 저리도 걱정이신 거였다.
“그럼, 내 초상화도 보내요. 연보라 새틴 드레스 입고 양귀비꽃 들고 있는 내 모습 정말 예쁘게 잘 그려졌는데 필론 하우스에 걸리기에 충분하지 않을까요?”
단순히 예쁜 사람을 그렸다고 걸작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다이앤은 자신의 인물화도 함께 보내라고 엄마를 채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