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몹시도 아름다운 펠릭스의 몸
일레인 크라몬드가 펠릭스 페일른을 처음 만난 건 수선화가 노란 꽃잎을 거의 다 떨군 스물 늦은 봄이었다.
“여기로 가정교사를 부르다니, 정말 가을까진 루덴으로 돌아가지 않을 작정인가 봐.”
여왕의 고양이라고 불리는 고귀한 샴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2층 서재에 난 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언니 다이앤이 투덜거렸다.
마침 일레인은 작은 나무 빗을 들고 지독하게 털이 엉켜 있는 고양이 블루와 씨름 중이었다.
“가만히 좀 있어. 새로 오신 선생님이 널 쥐나 잡아먹는 들고양이로 오해하시면 어쩌려고.”
한 달 전, 일레인은 느릅나무 아래 노란 수선화 무리 속에서 빼액빼액 울고 있는 아기 고양이를 발견했었다. 눈은 온통 눈곱으로 흐려져 있고 엉덩이에 똥 딱지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더러워, 일레인.”
브리티나 최고의 미인이라 칭송받는 다이앤은 길고양이 새끼를 쳐다보는 것조차 꺼려했다.
그러나 일레인은 엄마를 잃고 빽빽 우는 새끼 고양이가 가끔 혼자 숨어서 우는 자신과 겹쳐 보여서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씻겨놓고 보니 고양이는 의외로 예쁜 눈과 귀여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짙푸른 눈을 가져 블루라고 이름 지어 준 고양이는 애교도 곧장 부려 일레인과 하녀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자 시샘이 난 다이앤은 루덴에 사람을 보내 귀한 샴 고양이를 데려와 ‘사파이어’라고 부르며 안고 다녔다.
순하고 애교 많은 블루는 아쉽게도 빗질을 너무나 싫어했다. 엉킨 털을 풀어 주려 빗질을 하면 애옹애옹 몸부림을 치며 솜뭉치 같은 앞발로 콩콩 일레인의 이마를 때렸다.
“일레인, 그깟 더러운 잡종 고양이 새끼 놓아두고 빨리 내려와.”
재촉한 다이앤은 제 고양이를 하녀 수잔에게 넘기고, 분홍빛 새틴 드레스 앞자락을 살짝 들고 종종걸음으로 서재를 나갔다.
그러나 일레인은 여전히 고양이 털을 빗기기 위해 애를 썼다.
“제발 블루, 이따가 멋지게 그려 줄 테니 가만히 좀 있어!”
일레인이 끙끙거리며 다시 빗을 들이댈 때였다.
그만두라고 여러 번 이마를 콩콩 때려도 소용없자 블루는 크앙, 일레인의 손가락을 야무지게 물었다. 그리곤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휙, 다이앤이 열어두고 간 창문 틈으로 몸을 날렸다.
“블루!”
제법 높은데 다치기라도 하면!
후다닥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었을 때 키가 껑충 큰 청년이 일레인의 눈에 들어왔다. 블루를 품에 안은 채 일레인을 올려다보는 청년의 눈동자가 몇 해 전 보았던 북해 바다처럼 검푸르게 빛을 내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고양이가 날아와서, 놀랐습니다.”
청년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늘씬한 몸에 몹시 잘 어울리는 코트를 입었지만 금사나 은사로 요란하게 수를 놓은 천은 아닌 것으로 보아 귀족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몇 해 전 아빠와 함께 만나 보았던 여왕의 아들만큼이나 태도가 당당했다.
“잘 잡고 있어요!”
풀려나면 또 벌판으로 도망쳐 들쥐를 잡아 와 애옹거리겠지.
정문으로 통하는 살롱으로 내려가면 새로 온 가정교사께 인사드리느라 시간이 지체될 것이다. 일레인은 하인들이 이용하는 뒤쪽 계단을 종종종 내려와 성 앞으로 내달렸다.
“나른하게 기분 좋을 때 빗 말고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빗겨줘 봐요. 피부가 유난히 예민한 고양이들이 있거든요.”
블루를 넘겨주며 청년이 말했다. 온통 고양이 털이 엉겨 붙어 있는 일레인의 녹색 드레스를 보고 빗질을 피해 고양이가 뛰어내렸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펠릭스 페일른입니다. 크라몬드 백작 가에 가정교사로 오시게 된 엘런 페일른 부인의 아들이고요.”
청년이 모자도 안 쓴 머리에 손을 올려 보이며 인사했다.
키가 키고 몸매가 다부져 당연히 어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아직 수염발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또래 청년이었다.
청년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제 소개를 한 후, 그래서 고양이 털을 잔뜩 묻히고 머리는 아무렇게나 산발을 한 너는 대체 누구냐는 듯 깊은 시선으로 일레인을 응시했다.
‘새 가정교사가 장성한 아들까지 데리고 온다고는 엄마가 말씀 안 하셨는데.’
고전과 프랑스 어를 가르친다는 가정교사가 왜 장성한 아들까지 달고 시골 성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일레인은 일단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일레인 크라몬드입니다, 페일른 씨.”
“호오.”
“……?”
왜 갑자기 감탄의 눈으로 나를 훑어보는 거지?
일레인이 의아해하든 말든 펠릭스는 제 할 말을 이었다.
“그대가 우리 어머니를 이 궁벽한 세오드 성까지 불러들인 장본인이시군요.”
“……?”
“어머니께서 ‘초록에 깃든 봄’ 그림을 무척 칭찬하셨습니다. 투명한 색채와 과감한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하시더군요.”
페일른 부인이 어떻게 배런의 샬럿 고모님께 보낸 그림을 보았다는 거지.
멀뚱하게 펠릭스를 보며 상황을 추측하던 일레인이 갑자기 ‘아’ 탄성을 질렀다.
“혹시 페일른 부인께선 샬럿 고모님 소개로 오신 것인가요? 저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시러?”
“예, 어머니는 ‘제이콥 스탠픽셔’란 이름으로 활동하셨던…….”
“제이콥 스탠픽셔 님이시라고요? 전령사 헤르메스 시리즈를 그리신, ‘그’ 제이콥 스탠픽셔 님!”
세상에! 세상에, 제이콥 스탠픽셔 님이라니!
대륙의 왕족들조차 작은 그림 한 점이라도 얻어 보고자 있는 인맥 없는 인맥 다 동원해 줄을 섰다는 대 화가께서 내 그림을 칭찬하시다니!
일레인은 체면을 잊고 블루를 꽉 끌어안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주로 제노바와 빈에서 활동한 화가 제이콥 스탠픽셔는 두 마리 뱀이 휘감고 있는 지팡이를 든 헤르메스와, 우아한 자태로 난롯불을 피우고 있는 불의 신 헤스티아 그림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 두 그림이 가정에 재물과 화목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부유한 가문들은 스탠픽셔의 그림 한 장 얻기 위해 온갖 연줄을 다 동원하는 형편이었다.
일레인은 그 무엇보다 스탠픽셔의 과감한 구도와 거친 붓 터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질감을 좋아했다.
날개 달린 푸른색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구도는 다른 그림에선 찾아볼 수 없었고, 어린 헤르메스가 휘감고 있는 붉은 천은 그 특유의 거친 붓 터치로 인해 역동적인 느낌을 주었다.
어, 그런데…….
일레인은 갈색 눈동자를 한껏 확대한 채 펠릭스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혹시?”
“예, 내가 그 어린 헤르메스 신의 모델이었습니다!”
펠릭스가 활짝 웃었다.
그러자 북해의 바다처럼 차갑게 빛나던 검푸른 눈동자가 순식간에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변모했다. 그 극적인 변화에 일레인은 일순 숨을 멈췄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일레인의 손가락이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싶다!’
자연스럽게 곱슬거리는 검은 머리카락, 깊은 바다처럼 검푸른 눈동자, 웃을 땐 가지런히 드러나는 흰 치아를 가진 이 청년을.
나도 화폭에 제대로 한번 담아보고 싶다!
처음 만남에서 펠릭스가 자신의 ‘뮤즈’가 될 것임을 일레인이 직감했을 때였다.
“일레인 아가씨!”
하녀 안나가 서둘러 다가왔다.
“어디 계신가 했더니, 아유 이 털 좀 봐. 어서 드레스 갈아입고 손님을 뵈어야지요.”
보통 때는 ‘아이고 아가씨, 대체 언제나 숙녀가 되실 거예요? 다이앤 아가씨 절반만이라도 좀 닮으세요.’ 한참 잔소리를 퍼부었을 안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펠릭스의 수려한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부터 붉히고 수줍게 일레인의 팔을 끌었다.
“와, 전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얼굴은 아가씨가 그리신 다비드 상에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 그림 속 사내가 진짜 살아서 나타나다니요. 이전에 만나신 거예요? 언제 보셨어요?”
고래 뼈로 만든 코르셋을 힘껏 조이며 하녀 안나가 수선스럽게 펠릭스의 외모를 칭찬했다.
“아, 다비드 상 얼굴이랑도 비슷하구나.”
처음 본 순간부터 묘하게 낯이 익더라니.
제이콥 스탠픽셔 님의 그림 속에서 어린 시절 얼굴을 보아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안나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그린 다비스 상의 얼굴이 딱 펠릭스의 얼굴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데생을 연습하기 위해 들여놓은 모사품 다비드 상의 몸을 그린 후, 일레인은 목 위로는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잘생겼다고 생각한 얼굴을 그렸었다.
한데 그 얼굴이 왜 펠릭스의 얼굴인가.
혹시 그럼 목 끝까지 단정하게 올려 입은 코트 속 몸도 다비드 상처럼 아름답게 자잘한 근육으로 쭉 뻗어서…….
“앗, 안나, 그만! 갈비뼈 부러지겠어.”
인정사정없이 허리를 조여드는 코르셋 탓에 일레인은 필시 몹시도 아름다울 펠릭스의 몸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밑단에 자잘하게 금사로 들꽃을 수놓은 아이보리색 새틴 드레스를 입고 계단을 내려가는 일레인의 가슴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
‘제이콥 스탠픽셔 님을 뵙는다니! 제이콥 스탠픽셔 님을 뵙는다니!’
춤추듯 들어선 살롱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역대 크라몬드 백작 가족의 초상화를 살피고 있는 펠릭스였다. 언니 다이앤은 그 옆에 붙어 서서 그림과 펠릭스를 번갈아 보며 종달새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다이앤은 보통 태양처럼 고고하게 앉아 행성처럼 주변에 몰려드는 사내들을 감상하는 게 취미였다. 그런 언니마저 저리 비굴할 정도로 눈치를 보며 옆에 서 있게 하다니.
펠릭스는 정말 대단한 피사체다.
반드시 그리고 만다, 내가.
일레인은 다시 한번 굳게 결의를 다졌다.
“일레인!”
엄마가 일레인을 확인하고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엄마 바이올렛 옆에 소박한 검은색 옥양목 드레스를 입고 있던 중년 여인이 일레인을 바라보았다. 펠릭스와 꼭 닮은 검푸른 눈이 강렬했다.
발걸음이 떨려 휘청거릴 정도로 일레인은 몹시 긴장했다.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며 일레인은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깊게 무릎을 굽혔다.
“일레인 크라몬드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