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작 부인의 에로스 ]
#제1화. 밤새도록 날 농락해 놓고
“그리 싫은가, 일레인?”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장난꾸러기 이든과 아서를 겨우 재우고 촛불 하나에 의지해 비척비척 침실로 돌아가던 일레인은 흠칫 몸을 굳혔다.
찾아오겠단 통보를 받았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고귀한 공작 부인께서 천한 사생아 따위에게 깔려 앙앙거릴 생각을 하니, 응? 걸음을 떼기조차 힘든가 봐.”
일레인의 등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다가섰다. 거대한 검은 형체는 일레인의 가녀린 몸을 빈틈없이 감싸 안았다. 헉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거센 포옹이었다.
일레인의 귓불에 사내의 더운 숨결이 떨어졌다.
“속옷은, 입지 않았겠지?”
검술로 다져진 단단한 손이 일레인의 허벅지를 서슴없이 파고들었다. 순백의 린넨 잠옷 아래 부드러운 살결이 노골적으로 만져지자 으흠, 펠릭스는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웠어, 일레인.”
펠릭스가 뜨겁게 속삭이며 일레인의 귓불을 핥았다.
으흑, 낯선 자극에 일레인의 온몸이 절로 곱아들었다.
“이러지 마, 펠릭스.”
펠릭스.
3년 만에야 입 밖에 내어 보는, 그리운 이름, 펠릭스.
당신 이름을 입속에 굴릴 때마다 내 가슴이 얼마나 기쁘게 부풀었는지, 펠릭스 당신은 절대 모를 거야. 몰라야 해.
“몬토바 공국의 공녀와 혼인해야 할 당신이, 여기서 무얼 하는 거지?”
싸늘하게 책망하는 일레인의 목소리에, 쇄골로 핥아 내려가던 펠릭스의 혀가 그대로 멈췄다.
다음 순간 펠릭스는 그대로 일레인을 안아 들고 성큼성큼 일레인의 침실로 향했다. 문을 뻥 차 열어젖힌 펠릭스는 일레인을 침대 앞에 내려놓았다. 기세 흉흉한 발걸음과 달리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펠릭스는 일레인의 손에서 촛불을 뺏어 들었다. 불빛 아래 잘게 떨리는 일레인의 갈색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3년 전 그날 밤처럼.
뜨겁게 유혹한 후 차갑게 버렸던 그 첫날의 밤처럼 자신의 얼굴을 담고 흔들리는 일레인의 눈동자를 향해 펠릭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내가 무얼 하는지 모르겠어, 일레인? 배운 대로 하는 거잖아.”
펠릭스의 손이 일레인의 얼굴을 쓸고 내려와 가는 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의 굳은살이 일레인의 목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해싱턴 공작과 이미 결혼해놓고도 막무가내로 나를 유혹했던 일레인, 너한테 배운 대로!”
펠릭스의 엄지손가락이 토독토독 빠르게 뛰고 있는 일레인의 맥박을 눌렀다. 손가락 끝을 통해 일레인의 떨림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펠릭스는 저도 모르게 손아귀의 힘을 늦췄다.
“제길!”
공작의 새끼까지 낳았다면서. 5월에도 냉기가 폴폴 나는 이 낡은 성이 다 무엇이야, 일레인.
멋대로 유혹해 놓고 사생아 출신 천한 것과는 미래를 함께할 수 없다며 모질게 내쳤으면 잘이라도 살든가.
이게 뭐야. 비 맞은 강아지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네 꼴을 좀 봐, 일레인.
자신을 버린 일레인에 대한 새삼스러운 배신감인지, 아니면 일레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찾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분노인지.
정체 모를 강렬한 감정을 상스러운 말로 뱉어 내며 펠릭스는 일레인의 잠옷 레이스를 쓸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익숙했다.
“……?”
펠릭스의 짙은 눈썹이 의아하단 듯 꿈틀거렸다.
F.P.
펠릭스의 침실을 소리 죽여 찾아들었던 3년 전의 밤, 일레인은 펠릭스 페일른 (Felix Pailen)의 첫 글자를 도톰하게 수놓은 레이스 칼라 잠옷을 입었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이야, 일레인?”
하룻밤 놀고 버린 사내의 이름을 새긴 잠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니.
잠옷을 고정하고 있는 매듭을 스르륵 풀어내며, 펠릭스가 이죽거렸다.
“공작 아래에 깔려 흔들거리면서도 마음은 늘 내게 두었다는 뜻인가? 하긴, 다 늙어빠진 노새 같은 공작의 몸이 성에 찼을 리가. 응, 일레인?”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입었던 잠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는 사실이 기쁜지 괘씸한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펠릭스의 몸에선 짙은 욕망이 착실히 피어올랐다. 그러자 3년 전, 온 밤을 새우도록 자신을 자극하고 또 자극했던 일레인의 감촉이 아찔하게 머리를 데웠다.
더는 참기 힘들었다.
펠릭스는 한 손으로 일레인의 잠옷을 확 끌어 내렸다. 촛불 아래 동그란 어깨와 소담하게 솟은 가슴이 펠릭스의 눈을 가득 채웠다.
“제발, 펠릭스.”
사정이 있었어! 끝까지 함구해야만 했던 사정이, 정말, 있었다고!
그때도 지금도 말할 수 없는 그 기막힌 사정을 목구멍에 밀어 넣으며, 일레인은 잠옷 자락을 끌어 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 모습이, 그 애원이 펠릭스를 더욱 자극하는 것도 모르고.
“내가 애원했을 때, 너는 어떻게 했지?”
펠릭스가 긴 팔을 뻗어 초를 촛대 위에 올렸다. 그리곤 순식간에 일레인의 겨드랑이 밑으로 양손을 넣어 들어올렸다.
순백의 린넨 잠옷이 뱀의 허물처럼 덩그러니 바닥에 떨어졌다. 희디흰 일레인의 나신만이 펠릭스 얼굴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차가운 공기에 오종종 소름이 돋은 일레인의 피부를 펠릭스가 입 한가득 베어 물었다.
절박하게, 이든이 아기였을 때 일레인의 가슴을 빨던 것처럼 절박하게 물어드는 몸짓에서 일레인은 펠릭스의 상처를 읽어냈다.
“미, 미안해, 잘못했어, 펠릭스!”
살기 위해 너를 이용한 거, 미안해.
그때 나는 그렇게라도 내 몸에 너를 새겨넣지 않으면 살아갈 힘을 내지 못했을 거야.
사과하며 일레인은 펠릭스의 머리를 밀어냈다.
그러나 펠릭스는 더욱 가까이 몸을 붙이며 이번에는 반대쪽 가슴을 머금었다.
하아.
늦은 밤 홀로 누운 차가운 침상에서나 은밀하게 꺼내 보았던 그 은밀하고도 야릇한 감각이 일레인의 몸을 데우기 시작했다. 펠릭스의 머리를 밀어내는 손에 힘이 자꾸 빠졌다.
펠릭스가 다시 일레인을 바닥에 내려놓고 더욱 짙어진 눈동자로 일레인의 몸을 훑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촛농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홧홧하게 따끔거렸다. 일레인은 흥분과 부끄러움에 양팔로 가슴을 가리며 다리를 오므렸다.
펠릭스가 재빨리 일레인의 다리 사이로 제 튼실한 허벅지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능숙한 다리 짓으로 일레인의 다리 사이 은밀한 곳을 비비며 펠릭스가 속삭였다.
“내가 애원할 때, 일레인. 너도 이렇게 나를 자극했었지.”
일레인의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아래로부터 척추를 타고 짜릿한 감각이 머리까지 휘몰아쳤다. 그래서 일레인은 아흣, 3년 전 펠릭스가 그랬던 것처럼 앙다문 입술을 열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펠릭스의 혀가 일레인의 혀를 얽어 들었다.
일레인의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온몸을 휘감는 낯선 감각에 혼미해진 일레인은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자꾸만 허공을 움켜쥐었다.
“애까지 낳은 여인이 사내의 목을 감아들 줄도 모르다니. 응, 일레인.”
공작은 대체 이리 어여쁜 너에게 무얼 가르친 것이냐.
3년 전에도 벌써 이가 세 개나 빠져 어금니가 휑했던, 이제는 무덤에서 백골로 썩고 있을 해싱턴 공작을 비웃으며 펠릭스는 일레인의 팔을 잡아 제 목을 감게 하였다. 그리고 일레인을 안아 침대에 내려놓았다.
펠릭스의 시선이 일레인의 온몸을 구석구석 훑었다.
과거에 자신이 저질렀던 행동 그대로 달려드는 펠릭스를 더는 제지할 수 없다.
“불, 촛불을 꺼 줘, 펠릭스.”
체념한 일레인은 양손으로 가슴을 가리며 어둠을 부탁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땐 네가 훅, 들고 온 촛불을 꺼 버렸었지, 일레인.”
펠릭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무릎 안쪽의 살을 천천히 쓸어 올리며 그들의 첫날밤을 속살거렸다.
“한밤중에 들이닥쳐 내 곁에 눕고는,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 함께하자고 애원하는 내게 너는 마구 몸을 붙이고 막무가내로 유혹했잖아.”
꿈결처럼 아득하기만 했던 그 날의 모습이 펠릭스의 낮은 목소리 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온몸을 훑는 펠릭스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꼬물꼬물 열기가 피어올랐다.
더 이상 제어되지 않는 흥분을 숨기기 위해 일레인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았다. 그러자 새카맣게 물든 시야 속에서 점점 더 다리 가운데로 다가오고 있는 손가락의 감촉이 더욱 선명해졌다.
“너무 깜깜해서 나는 오로지 이 손과 혀, 그리고 나의 중심으로만 너를 느껴야 했어, 일레인. 그 후로 늘 궁금했었어. 그렇게 밤새도록 날 농락해 놓고, 응? 일레인. 날이 밝기 무섭게 사생아 출신 따위와 계속 엮였다간 너도, 네 그 어린 동생도 영영 사생아 신분을 못 벗어날까 두려웠다던 냉혹한 여인의 몸은 과연 어찌 생겼는지.”
펠릭스의 다른 한 손이 일레인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 손 밑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지던 너의 가슴은 또 어떻게 생겼는지.”
“아, 그, 그건, 펠릭스. 그건…, 아, 아흣.”
사정을 설명하려던 입에서 말 대신 달뜬 숨소리와 신음이 흘러나왔다. 펠릭스의 손가락이 때마침 일레인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흐흣.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차피 진실을 말할 수 없을 바엔 부끄러운 신음을 흘리는 것이 나았다.
일레인의 신음 소리가 제대로 자극했는지 아니면 움찔거리며 손가락을 자꾸 빨아들이는 감각이 3년전의 욕망을 고스란히 되살렸는지 펠릭스의 숨소리가 돌연 거칠어졌다.
한 손으로 여전히 일레인의 은밀한 곳을 지분거리며, 펠릭스가 목을 감싸고 있던 크라바트를 아무렇게나 풀어 던졌다. 셔츠까지 단숨에 벗어 탄탄한 상체를 드러낸 펠릭스는 본격적으로 일레인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아, 결국 지은 대로 죄를 받는구나.’
탄식하며 일레인은 눈을 가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손 내려, 일레인. 어둠 속에서 네가 마구 베어 먹고 버렸던 내 몸을, 너도 이제는 제대로 봐야지. 그게 예의 아니겠어, 일레인?”
“아, 아니야. 펠릭스. 그게, 으흣!”
사정을 설명하려던 일레인은 돌연 느껴지는 자극에 젖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벌거벗은 일레인의 몸 위로 펠릭스가 몸을 겹쳤다. 한 치도 어긋난 곳 없이 완벽하게 밀착하길 바라듯 거세게 몸을 밀어붙이며, 일레인의 귀에 대고 펠릭스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손 떼고 내 몸을 똑똑히 보지 않으면 일레인, 다음 달 회사채 이자는 어떻게 감당할 거야?”
달콤한 위협의 말을 자잘한 입맞춤과 함께 퍼부은 펠릭스가 일레인의 중심을 꿰뚫었다.
“아흐흐흑.”
온몸을 두 쪽으로 가르는 듯한 낯선 흥분이 일레인의 몸을 휩쓸었다.
“이대로 파산할 거야, 일레인? 그럼, 이든이랑 아서는 어떻게 키우려고? 공작가 아들들을 거지새끼로 만들 셈이야, 응?”
느긋하게 점점 더 깊게 들어오며 펠릭스가 달콤하게 위협했다.
펠릭스의 몸놀림에 따라 점점 쾌락이 몰아쳤다. 펠릭스의 허리 짓에 따라 속절없이 흔들리며 으흣 입술을 깨물던 일레인은 천천히 얼굴을 덮었던 손을 내렸다.
“그래, 그래야지. 해싱턴 공작 부인.”
3년 만에 마주한 펠릭스의 얼굴이 뿌연 어둠 속에서 색스럽게 빛을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