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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72)화 (172/172)



<172>

다음 날.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맞은편에 앉은 은발의 기사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꿈속에서 평행세계의 부모님을 만나셨다고요? 동화 속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요. 그래서 부모님과 대화는 많이 나누셨나요?”

“그게… 그렇지는 않았어.”

듀이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울고만 있었는데 잠에서 깨어 버렸거든.”

“아… 그건 아쉬워요.”

맞아, 진심으로 아쉬웠지. 듀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부모님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죽은 게 아니라 살아서 평행세계에 떨어졌다든가, 힐더 할슈리트 경이 여기서는 듀이라는 이름으로 조만간 나와 결혼할 사이가 되었다는 것.

그 외에도 중요하게는 란타나와 요정 벨라의 이야기부터 사소하게는 약혼자였던 데이브의 숨겨진 실체까지도.

하지만 부모님을 만났다는 기쁨에 감정이 격해져 울음만 터트리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잠시 후에 이 세계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그때의 허무함이란…….’

확실한 건 좀 더 겪어 봐야 알 것 같지만, 꿈에서 부모님을 만나는 데에는 시간제한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1시간 정도가 아닐까? 아직은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한 달 뒤에 부모님을 다시 만나실 수 있는 거죠?”

“응!”

그 말에는 힘차게 대답했다.

부모님과 제대로 대화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중요한 건 앞으로의 만남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이다. 1년이고 10년이고 시간은 있다.

어제는 많이 놀라셨을 테니까, 다음번에는 부모님께 똑바로 말씀드리도록 해야지. 벌써부터 한 달 뒤에 만남이 기다려졌다.

“네리아 님의 부모님이라면 분명 훌륭하신 분들이겠지요. 저도 한 번은 뵙고 싶어요.”

“그래? 꿈속에 다른 사람을 데려갈 방법이 없을지 연구해 볼까? 혹시 모르니까.”

한 달마다 이것저것 실험하다 보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듀이를 부모님께 소개하고 싶은 데다, 동생 루이케를 만나고 싶기도 하니까.

나는 그런 가능성을 꿈꾸며,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았다. 무릎 위에 메리골드 한 송이가 심어진 작은 화분이 있었다.

듀이가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채고서 다시 말을 걸어왔다.

“네리아 님이 가지고 계신 금잔화 말인데요, 정말 칼로스 양을 많이 닮았어요.”

“그렇지?”

나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당찬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듀이와 내가 마차를 타고 향하는 곳은 남부의 세틀렉 백작이 있는 도시였다.

‘칼로스의 어머니가 세틀렉 백작가의 묘지에 있다고 했으니까.’

칼로스는 수도에 남기보다 남부의 고향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의 주검을 어머니의 옆으로 보내 주고 싶었다.

나는 수도에서 일을 처리하는 동시에 세틀렉 백작에게 서신을 보냈고, 백작의 협조를 받아 칼로스를 그녀의 어머니가 있는 장소 옆에 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칼로스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칼로스를 만나며 수도에서 가져온 금잔화를 그녀의 무덤 옆에 심어 줄 계획이었다.

“칼로스랑 제일 닮은 꽃을 찾고 싶어서 이틀 내내 꽃시장을 돌아다녔으니까.”

나는 작게 읊조리다가 옆을 바라보았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

남부와는 거리가 있는 관계로, 꽤 길었던 여정 끝에 우리는 세틀렉 백작의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작은 가장 먼저 나를 저택에 초대해 대접하길 원했으나, 그보다는 칼로스를 만나는 게 먼저였다. 나는 백작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그가 붙여 준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세틀렉 가문의 묘지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하인이 가리킨 곳에 하얗고 평평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깨끗하게 관리된 묘지가 있었다. 칼로스와 그녀의 모친이 잠들어 있는 장소였다.

“오랜만이에요, 칼로스 양.”

하인이 자리를 떠난 뒤, 그녀의 이름이 적힌 비석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제가 저희 일족에게 걸린 저주를 반드시 없애겠다고 했었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단검 하나를 꺼냈다.

그날, 칼로스는 란타나의 앞에서 용감하고 떳떳하게 서 있었다. 나는 그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우리가 함께 이긴 거예요. 그러니 저주를 없애는 모습을 칼로스 양에게 보여 주고 싶었어요.”

벨라의 칼에 박혀 있던 100개의 붉은 보석은 내가 소원을 이루고 난 뒤 다시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말없이 단검을 듀이에게 건넸다. 칼과의 공명 때문인지, 듀이가 일족의 저주를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이 직감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란타나도 듀이가 광전사란 걸 눈치챘던 거겠지.’

그녀에게서 일찍 칼을 탈취할 수만 있었다면, 벨라에게 듣지 않아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지도.

“자, 그러면.”

단검을 없애기 전, 나는 벨라의 칼을 보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벨라 님, 듀이를 살려 주셔서 감사해요.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해 주신 것도 감사드려요… 어?”

방금, 칼이 반짝이지 않았던가?

신기한 마음에 단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착각이었다는 듯 칼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벨라도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 준 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다음은 듀이 차례야.”

듀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집에서 본인의 칼을 꺼냈다. 그러고는 칼끝을 단검의 손잡이 쪽으로 겨눠 벨라의 칼을 힘있게 내리쳤다.

파직-

광전사는 벨라 일족의 저주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오랜 시간 절대 없앨 수 없었다는 벨라의 칼은 듀이의 손에서 허무하리만큼 쉽게 파괴되었다. 곧, 단검의 잔해가 연기가 되었고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요정 벨라와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게 될 터였다. 목표를 이루고 칼로스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럼 이제 칼로스의 옆에 금잔화를 심어 볼까? 위치는 어디, 비석 앞이 좋겠어.”

“잠깐만요, 네리아 님! 땅을 파는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손에 흙이 묻을 거예요.”

“묻으면 어때? 상관없어.”

가져온 모종삽을 꺼내서는 드레스 소매를 걷으며 의욕적으로 흙을 파냈다. 그 뒤로는 화분에서 금잔화를 옮겨 심고, 물뿌리개로 꽃에 물을 주는 일까지. 소소한 작업을 전부 끝내자, 비석 앞에 주황색 꽃이 피어났다.

“그래서 칼로스, 아니. 메리 양. 하늘에서 엄마를 만났나요?”

비석 앞에 쪼그려 앉은 채 금잔화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북쪽에서 따뜻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흩날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넘기고 있었더니, 어디선가 초록색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심어 둔 금잔화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웬 나비가…….”

듀이와 내 시선이 사이좋게 나비에게 향했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선명한 초록색 날개가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으음, 메리는 하늘의 별이 되어서 무사히 엄마를 만났대.”

“다행이네요.”

우리 둘은 금잔화와 나비를 꽤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물기 어린 주황색 꽃잎이 햇볕을 받아 별처럼 반짝였다.

***

수도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황제 폐하께 선물로 받은 남부의 별장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와, 생각보다 더 좋은걸?”

“그…러네요.”

듀이와 나는 별장 입구에서 크고 호화로운 건물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하기야, 무려 제국의 황제가 하사한 장소다. 어중간하거나 어설플 리 없지.

조각상으로 된 분수들이나 정원을 가득 뒤덮은 분홍색 장미들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나는 야외 정원에 설치된 갈색 벤치에 앉아 유쾌한 목소리를 냈다.

“여기, 괜찮은 것 같아. 마음에 들어. 관리인의 말로는 근처에 호수가 있어서 뱃놀이를 할 수도 있다던데, 여름 휴가 때 오지 않을래?”

“저는 네리아 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 좋아요.”

“그래? 그럼 내가 있기만 하면, 지옥도 좋아?”

“…지옥이요? 네리아 님께서 지옥 같은 데를 가실 리가 없지만,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얼굴이 심각해졌잖아! 농담이니까 진지하게 생각 안 해도 돼.”

짧은 시간 지옥에 다녀오느라 혈색이 나빠진 듀이를 보며 나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듀이는 머쓱했던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부끄러우니까 선물로 무마하려는 거야?”

“…그런 것도 있지만, 수도에서 출발할 때부터 언제 드리면 좋을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고민? 왜?”

“선물이 네리아 님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되어서요.”

“나는 네가 주는 거라면 길가의 돌멩이도 좋은걸. 그러니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줄게.”

그렇지만 대체 뭐길래 듀이가 저렇게 긴장하는 거야? 의아해하며 상자의 포장을 열었더니, 안에서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 나타났다.

“이건……?”

황궁에 갔을 때, 듀이에게 받았던 나비 머리핀의 핀대가 부러지는 일이 있었다.

장인에게 맡겨 수리를 끝내기는 했지만, 소중한 선물이 또 부러질까 봐 보석함에 보관만 하고 있었는데, 듀이는 그게 신경 쓰여서 새것을 사 온 걸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수했던 저번 머리핀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다이아몬드와 백금으로 만들어진 나비 모양이 햇볕 아래서 호화롭게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음에 드시나요?”

“또 당연한 걸 묻고 있네.”

“다행이에요. 실은 제가 직접 만든 것이거든요.”

“이걸 듀이가? 정말?”

“네. 제가 기사가 되면 급료를 모아서 더 좋은 걸 선물해 드리겠다고 했는데, 네리아 님은 이미 많은 걸 가지고 계시니까요.”

비싼 물건은 이미 많이 가지고 있고, 원하는 물건이 있다면 언제든 구할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특별한 걸 주고 싶었다며, 듀이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수도에 있을 때 바빠 보이는 것 같더니, 귀금속 공예를 배우느라 그랬던 거야?”

“네…….”

“고마워. 이것도 평생 보물로 간직할게. 어때, 잘 어울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가 없었다. 새 머리핀을 머리카락에 꽂고는 보란 듯이 듀이에게 얼굴을 들이밀자, 그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네리아 님께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는 없어요. 그래서인데, 제 선물이 마음에 드셨다면-”

이건 언제 가져왔던 걸까?

듀이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나에게 분홍색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다.

“저도 제가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합니다.”

나를 올려다보는 듀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에 차 있었다. 그 기분이 나에게까지 전염된 것 같아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째서인지 듀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마법에 빠진 것만 같은 황홀한 감각이었다.

“네리아 님.”

“응.”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고는 듀이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네가 저번에 그랬지? 키스 같은 건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하겠다고. 그런데, 나 이미 18살 생일이 지났어.”

팔을 뻗어 듀이의 머리를 감싸자, 그와 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약속, 지킨다고 했지?”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그와 나의 입술이 닿았고, 듀이의 팔이 내 허리를 감쌌다. 첫 키스란, 사탕보다 더 달콤한 것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순간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 같다고.

햇살 아래 하늘이 맑았고, 산뜻한 바람이 우리를 향해 기분 좋게 불어오고 있었다.

어느 완벽한 오후였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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