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71)화 (171/172)



<171>

세상에 ‘벌’이 있다면 그 반대쪽에는 ‘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아가씨. 아니지, 오늘부터는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하지요?”

“아직은 아냐.”

발렌티스 저택의 오후.

들뜬 목소리로 재잘거리는 사샤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뭐, 황궁에 다녀온 뒤부터는 가주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지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을 덧붙이며 입가에 씩 미소를 그렸다. 왜냐하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나의 열여덟 번째 생일날로, 오늘부터는 공식적으로 성년이 된 것이다.

‘제국법에 따라서, 나도 이제 발렌티스 가문의 가주직에 정식으로 취임할 수 있게 된 거지.’

물론 지금까지도 실질적인 가주 역할을 해 온 건 맞지만, 공식적인 직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러한 고로, 나는 황제 폐하께 이를 위한 재가를 받고자 황궁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거나, 옷차림을 단정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준비는 끝. 나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듀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에스코트를 부탁할게.”

“네, 네리아 님. 황궁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듀이와 나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어쩐지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욱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황궁 복구 작업에는 건축 전문가들 외에도 기사와 마법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그 덕분인지 황궁 내부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와, 대단하네.”

나는 황제 폐하를 뵙기 위해 본궁 안으로 들어가기 전, 건물의 외관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본궁이라고 하면 듀이와 렌샤가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던 장소다.

목숨을 바쳐 절대 방어를 펼친 수석 마법사 덕분에 건물이 무너지지는 않았어도 파손 정도가 심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복구 작업을 거의 끝내 하얗게 번쩍이는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였다.

“듀이에게는 여러모로 추억의 장소지?”

“네, 감회가 새로워요.”

둘 사이에 짧은 농담이 오갔다. 듀이는 이곳에서 한 번 죽었지만, 이렇게 되살아나 지금은 가벼운 대화 소재로 입에 올릴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사실이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듀이와 함께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오후입니다, 레이디 발렌티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레이디께는 순번이 밀리기 전에 미리 축하를 드려야겠군요.”

메인 홀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나는, 사람들에게 밀려 자연스럽게 가운데 위치로 향하게 되었다.

듀이와 잠시 떨어져 황궁 시종의 안내를 받고 있다 보니 어느덧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나타났다. 제국의 황제 폐하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모두 반갑네. 그리고 네리아 발렌티스는 가까이 오도록.”

“네, 폐하.”

붉은색 융단을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황제 역시 가장 높은 상석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대, 네리아 발렌티스는 역적들의 비열하고 흉악한 간계로부터 황족을 보호했으며 또한 다리스의 수도를 안전하게 지켜 냈다.”

나는 공손하면서도 당당한 자세로 선 채, 황제 폐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사실, 오늘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히 발렌티스 백작가의 정식 가주로 승인받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본궁에서 듀이와 렌샤의 전투가 끝난 이후, 조사관들은 렌샤가 수도에 대규모 폭발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리고 광전사인 듀이가 그 폭발을 막았다는 사실까지도.

듀이가 없었다면 수도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참사를 막아 낸 듀이는 당연하게도 제국의 영웅이 되었고, 황제 폐하는 그에게 귀족 작위와 상을 내리고자 했다.

그러나 듀이는.

‘저는 발렌티스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상은 개인이 아니라 발렌티스 가문이 받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황제의 상을 고사하는 바람에 듀이의 공로는 고스란히 나의 공로로 돌아오고 말았다.

게다가 나에게는 란타나를 제압한 것과 세사르를 통해 황제궁에서 붙잡혀 있던 황족들을 구출했다는 실적까지 있었다. 그리하여.

“다리스의 황제로서 그 공적을 치하하는바. 발렌티스 가문을 후작가로 승격하며, 그대를 발렌티스 후작으로 임명하겠다.”

“저, 네리아 발렌티스. 폐하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다리스 제국의 번성과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중한 목소리로 답하며 황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변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옆으로 슬쩍 눈을 돌리자, 이곳에서 제일 기뻐하는 듀이의 모습이 보여 웃음을 참아야 했다.

문득, 머릿속으로 지난날의 고난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전부 이겨 냈어.’

이겨 내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로 했다. 다만 이런 날이기에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루이.’

보고 싶다. 부모님이 지금 이 모습을 보셨다면 정말로 기뻐하셨을 텐데. 하나뿐인 동생도 네르가 최고라면서 폴짝폴짝 뛰어다녔을 텐데. 그렇지만 슬프게도 가족들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래도 평행세계의 어딘가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있으실 테니까.’

먼 미래에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지. 메인 홀을 울리는 박수갈채 속에서 나는 그런 바람을 말없이 속삭였다.

***

후작 임명식이 끝난 후에는 간소한 티타임을 가지기 위해 니나렛의 황녀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풍스러운 원형 테이블에 앉은 인원은 니나렛과 나, 그리고 듀이와 레오니트 황태제까지 네 사람이었는데, 지금까지는 없었던 상당히 이색적인 조합이었다.

“네리아 선생님! 아, 이제는 발렌티스 후작이라고 불러야 해? 음… 그렇지만 그건 싫은걸. 난 앞으로도 네리아 선생님이라고 부를래!”

“저도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쪽이 더 좋아요.”

“응! 선생님이랑 마음이 맞았어!”

꺄아- 하며 기뻐하는 니나렛은 오늘도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방금은 마음에 안 들었어! 우리 선생님은 후작이 아니라 공작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렇지 않아요, 전하. 저는 지금도 매우 영광스럽답니다.”

이 말은 예의상 하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께 받은 상에는 남부의 영지와 별장, 엄청난 양의 금화, 각종 귀중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작위가 공작까지 올라 버린다면, 그에 걸맞은 강도 높은 의무까지 따라오는 데다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물론 노력하면 어떻게든 해내기야 하겠지만, 나는 이제 겨우 성년이 되었다. 그동안은 앞만 보며 쉴 틈 없이 달려온 만큼, 당분간은 듀이와 손을 잡고 천천히 여유롭게 걷고 싶었다.

그러니까, ‘아직’은 말이다.

“대신, 언젠가는 공작으로 승작할 수 있도록 더욱 공을 쌓아 볼 생각이에요. 아무래도 목표가 있는 인생이 더 즐겁잖아요?”

“멋져! 선생님을 응원할 거야!”

니나렛이 또다시 꺄악- 환호하며, 먹고 있던 쿠키까지 내려놓고는 내 무릎 위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오니트가 그런 나와 니나렛을 보며 웃다가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은 레이디다운 발언이군요. 저 역시 발렌티스 후작을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황태제 전하.”

“당신께서 저의 비가 되어 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었지만, 후작께는 지금 이 자리가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깔끔하게 포기하도록 하지요. 저로서는 듀이 경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전하.”

듀이는 신하로서 황태제에게 예의를 지켰지만, 히죽 올라가는 입꼬리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승자의 미소였다.

“듀이 경, 반응이 너무 솔직하신 것 아닙니-”

“숙부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숙부님의 비라니, 나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그리고 이 화기애애한 대화 속에서, 커다란 충격에 빠진 꼬마가 있었다. 나를 뒤돌아보는 니나렛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네리아 선생님은 나랑 같이 살 거란 말야! 오늘부터는 숙부님도 적이에요! 그리고 당신! 나는 아직 선생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어! 알아들어?”

“황녀 전하? 그렇다면 전하께 허락을 받기 위해서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 어떻게? 그, 글쎄? 일단은 드래곤과 싸워서 이겨야 해!”

“전하, 드래곤은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의 동물이기 때문에-”

“그런 거 몰라! 아무튼 드래곤이랑 싸워서 이기는 게 조건이야!”

“예?”

어느새 원래 자리로 돌아가 억지를 부리는 니나렛과 당황하는 듀이. 나와 레오니트는 그런 둘을 구경하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니나렛, 듀이 경이 곤란해하니 이제 그만.”

“쳇.”

“그보다 ‘목표’라는 말을 들었더니, 나도 이참에 니나렛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뭔가요, 숙부님?”

“니나렛은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아?”

“…….”

상상하지도 못했던 레오니트의 발언에 황녀궁이 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당사자인 니나렛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가요? 황제가 될 사람은 숙부님이잖아요?”

“하지만 애초에 황위 계승자가 되어야 했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니나렛이었지. 게다가 죽은 황후 폐하의 누명도 벗겨졌어.”

나는 레오니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레오니트는 황제 자리보다는 예술에 더 관심이 많던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게다가 서궁 관계자의 자백으로, 독 케이크 사건이 란타나의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죽은 황후의 죄가 사라지며, 자동적으로 니나렛이 박탈당했던 황위 계승권도 되찾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레오니트 전하, 진심이신가요?”

“물론 진심입니다. 니나렛이 차기 황제 자리를 바라지 않는다면, 저도 황족으로서 의무를 다해 폐하의 뒤를 잇겠지만.”

레오니트가 아직도 혼란에 빠진 니나렛을 바라보며 웃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이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란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당장은 그렇겠지. 그러니 천천히 고민하고 생각해 보렴. 널 옆에서 지지해 줄 믿음직스러운 사람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레오니트의 시선이 나와 듀이에게 닿았기에, 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내가 황제가 된다고?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데…….”

니나렛은 여전히 충격받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꼬마 황녀님의 앞으로 새로운 가능성 하나가 던져졌다. 앞으로 고민거리가 많아지겠군.

과연 니나렛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니나렛이 나를 응원하는 것처럼 나도 꼬마 황녀님을 응원하기로 했다. 니나렛의 인생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그리고 그날 밤에는 꿈을 꾸었다. 자면서 꿈을 꾸는 일은 흔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자각몽?”

꿈속에서, 나는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발렌티스 저택에 서 있었으나 저택의 모습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 장소는.

“예전 세계의 집이야!”

가족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꿈에 반영된 걸까?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쉬웠지만, 나는 호기심이 가득해져서는 빈 저택의 이곳저곳을 마음껏 돌아다녔다.

“이쪽 방에는 특이하게 생긴 철제 의자가 있었지? 내 방도 오랜만이고…….”

내 방의 익숙한 풍경은 죽기 직전과 변함없이 똑같았다. 나는 그리운 마음으로 침대를 쓰다듬고는 다시 복도로 나갔다.

오랜만에 원래 세계의 집에 온 건 좋았지만, 그랬기에 외로움도 느껴졌다. 꿈속에서라도 부모님을 만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는 식당 옆을 지나갈 때였다.

“신기하지 않아요? 우리가 똑같은 꿈에 들어와 있다니. 진짜인가? 암호를 정해 놓고 깨어나면 동시에 말해 볼래요?”

“예, 부인이 원하신다면.”

“일어나서 제가 3월이라고 말하면, 당신은 13일이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오늘은 네르의 생일이었으니까…….”

“부인…….”

“자각몽 중에는 꿈속에서 원하는 걸 만들어 낼 수도 있다던데, 어째서 네르는 만들어지지 않는 걸까요?”

맙소사.

나도 모르게 주저앉고 말았다. 부모님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부모님도 이곳에서 자각몽을 꾸고 있다는 건…….

‘이건 작은 선물이에요.’

어째서였을까? 이 순간, 내 뺨에 키스하며 그렇게 말하던 벨라의 모습이 떠오른 이유는.

“…….”

손을 들어 벌어지려는 입을 가렸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벨라의 선물이다. 그녀가 평행세계로 떨어져 버린 나를 위해, 꿈속에서라도 부모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정답이에요.’

그때, 벨라에게 키스를 받았던 뺨이 화끈거리며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네리아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만, 한 달에 한 번씩 꿈에서 부모님을 만나게 해 줄 수는 있어요. 네리아가 보여 준 용기와 희생에 대한 보답이랍니다. 선물이 마음에 들었나요?’

마음에 들다마다요!

최고의 선물이에요!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바닥에서 일어나 식당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엄마! 아빠-!”

“네르? 네리아니?”

“보고 싶었어요! 두 분이 너무나도 그리웠어요!”

“맙소사. 네르-!”

부모님이 의자에서 일어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두 분에게로 힘껏 달려가 안겼다. 부모님에게서 포근한 향기가 났다. 그리운 냄새였다.

“엄마, 아빠!”

꿈인데, 꿈이 아니다. 기적이었다. 나는 부모님의 품속에 안겨서는 눈물을 펑펑 쏟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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