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69)화 (169/172)



<169>

“제가 바라는 것은.”

내 앞에 놓인 두 가지의 선택지. 하지만 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에게는 후회가 남을 것이기에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내 입으로 확실하게 말해야 했다.

“우리에게 내려진 저주를 없애는 거예요.”

“…….”

“벨라 일족의 저주를 없애 줘요. 나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그걸로 괜찮겠어요?”

알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요정의 반문에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나에겐 네리아의 마음이 전부 보여요. 당신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네?”

“나는 네리아가 사랑하는 소년을 되살려 줄 수 있어요.”

“왜 그런 말을…….”

나는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트리며 말끝을 흐렸다.

…마음을 읽혔다.

벨라의 이야기가 맞았다. 사실, 내가 요정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이상하리만치 내 마음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듀이가 보고 싶다고. 듀이의 손을 잡고 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의 따뜻한 몸을 힘껏 껴안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정말로 듀이를 되찾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요정의 아래에 무릎을 꿇고 백 번을 넘게 고개를 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사라져. 이 세상에서 없어져. 영원히 사라져 버려.”

“…….”

“요정인 당신은 모르지? 인간에게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어.”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이 예전에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던 걸까? 지금이었기에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들은 목표를 위한 희생양을 만들던 도중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고, 그런 사람을 살린 건 아니었을까?

‘듀이…….’

금색 눈동자를 가진 소년의 모습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아마도 나는 오늘의 이 결정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겠지. 네가 그리워서,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하지만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문득, 칼로스가 죽기 전에 나에게 남긴 유언이 떠올랐다.

‘저희 일족에게, 걸린 저주도 꼭, 없애 주세요. 이따위, 이따위 이유로 죽는 거, 너무 억울하고… 불쌍하잖아요. 저 같은, 사람이… 더는,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 목표는 의무가 되었다.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의 이기심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을 잃는 사람이 없도록. 저주로 인해 죽어야만 했던 칼로스를, 어머니를, 일족의 목숨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되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내 결심을 흔들지 마. 어차피 당신도-”

나는 눈을 감아 버리고서는 찢어질 것같이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도 차라리 죽고 싶었을 거 아냐! 그게 네 바람이었잖아! 내 말이 틀려?”

칼과 공명하고 있어서였는지, 란타나의 심장을 찌르던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벨라가 울고 있었다. 새끼를 잃은 어미의 비참한 눈물이었다.

“그러니까 내 결심을 흔들지 마, 제발. 사라져 줘요. 부탁이에요.”

내가 솔직한 내 바람을 말해 버리지 않도록 이 순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그렇게 소망하며 고개를 바닥으로 떨군 채 눈물만을 뚝뚝 흘리고 있을 때였다.

“네리아.”

누군가가 나를 안아 주는 감각이 느껴졌다. 뭐지? 무심결에 고개를 들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어느새 요정에서 사람으로 변한 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네리아, 사랑하는 내 아이.”

“…….”

따뜻하다. 마치 엄마의 품속에 안긴 기분이었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엄마가 있으니 이제 다 괜찮다고.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차마 나를 껴안은 벨라를 밀어 낼 수가 없었다.

“네리아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나요?”

“옛날이야기? 갑자기 무슨…….”

“란타나가 가지고 있던 책에서 마지막 몇 장이 찢어져 있었던 것을 기억하나요? 란타나가 찢어서 없애 버린 것인데, 네리아는 사라진 뒷장이 궁금하지 않나요?”

이런 상황에서? 그러나 오히려 상황이 이런 만큼 뜬금없는 화제가 아닐 것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신비로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사라진 뒷장에 적혀 있던 내용이에요.”

***

몇백 년도 전의 어느 옛날.

벨라의 칼로 소원을 이루어 일족 간의 분쟁을 멈추고 작은 왕국을 건국한 자가 있었다.

일족 안에서 왕이 탄생했고, 그로 인해 그들 사이에서는 싸움이 멈추고 평화가 찾아왔다.

아니- 평화가 찾아온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었다.

벨라 일족의 일부는 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서 벨라의 칼을 빼앗고자 끊임없는 사투를 벌여 왔다.

그런 식으로, 칼을 훔치려는 시도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일족의 숫자가 백 명이 넘어갈 무렵.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왕국의 공주들이 결심했다. 어떻게 해서든 벨라의 칼과 그들에게 내려진 저주를 없애야겠다고.

‘이 칼에 벨라의 영혼이 갇혀 있어. 그러니 이 칼을 파괴하면 돼. 그러면 벨라의 영혼도 자연히 없어질 거야.’

막내 공주가 의견을 냈다. 그녀의 추측은 사실이었지만, 안타까운 점은 칼을 물리적으로 파괴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내 생각은-’

그녀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았다. 분홍색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목숨을 대가로 주술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니 그걸 이용하자고. 왕국의 첫째 공주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주술을 사용했다.

‘우리에게 내려진 저주가 사라지게 해 줘.’

그러나 첫째 공주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주술의 힘은 그들의 조상이자 어머니인 벨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후손인 그녀의 주술 능력으로는 벨라를 직접적으로 없앨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가 시도하겠어요.’

첫째가 죽은 후, 다음으로 둘째 공주가 나섰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주술을 사용했다.

‘우리가 저주를 없앨 수 없다면, 일족이 아닌 다른 자에게 저주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을 주세요.’

이는 주술에 걸린 제약을 교묘하게 피한 방법으로, 둘째 공주가 능력을 부여하도록 지정한 자는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였다.

기사의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변하며 그는 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절대 없앨 수 없다는 벨라의 칼을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둘째 공주의 시도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가 섬긴 사람은 처음부터 당신뿐이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이곳의 왕입니다. 제가 칼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을 받으십시오.’

기사가 배신했다.

그는 칼을 없애는 대신, 누군가에게 벨라의 칼을 바쳤다. 기사가 연모하고 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분홍색 눈을 가진 자로서, 왕에게 가장 신뢰받고 있던 신하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한 패였던 거야? 어떻게 네놈이 배신을-!’

마지막으로 남게 된 셋째 공주는 그들을 없애고 다시 벨라의 칼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강대한 힘을 얻게 된 기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왕국에는 새로운 왕이 탄생했고, 셋째 공주는 창문조차 없는 차가운 탑에 갇히게 되었다.

그녀는 일부러 음식을 거부했고,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왔을 때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칼과 저주를 없앨 수 있도록 기사의 후손에게 그 능력이 이어지게 해 줘. 그렇지만 쓸데없는 감정으로 목적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그들이 힘을 얻었을 때 기억과 감정을 잃게 해 줘.’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죽어가는 셋째 공주 옆으로 어떤 자그마한 요정이 나타났다. 셋째 공주를 홀로 짝사랑하며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요정이었다.

‘자격을 가진 후손에게 시험을 내리도록 할게! 내가 네 바람을 꼭 이루게 해 줄게!’

‘고마워.’

셋째 공주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고, 남아 있던 요정이 그런 그녀의 곁을 지켰다.

***

“그렇다는 말은…….”

나는 벨라의 품속에 안긴 채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눈물이 말라 있었다. 거짓말 같았지만 요정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설마 정말로-

“듀이에게 이 칼을, 저주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요?”

“네. 어느샌가 그들이 광전사로 불리고 있더군요.”

“거짓말…….”

어쩌면 이렇게나 기적 같은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힌트는 존재했다.

어느 날 듀이가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각성하기 직전 무의식의 세계에 갔을 때. 자그마한 체구에 날개가 달린, 마치 요정 같은 무언가를 보았다고.

그때는 듀이가 환상을 본 거라고 생각했지만, 처음부터 그는 요정과 연관이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란타나가 듀이를 납치했던 일.

강한 기사를 자신의 아래에 두고 싶어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애초에 듀이를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벨라의 칼을 파괴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듀이를 처음부터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듀이를 되살리는 것으로, 일족의 저주를 없앨 수 있다. 감히 바라지도 않았던 현실이 나에게 일어났다. 지금까지 겪어 온 고생을 가엾게 여겨, 그 보상으로 신이 선물을 내려 주기라도 한 걸까?

“거짓말 같아…….”

듀이를 다시 만날 수 있어?

겨우 그친 눈물이 또 흘러나왔다. 이러다가 탈수로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어때요? 잘 들었나요? 그러면 다시 말해 봐요. 네리아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제 소원은.”

목이 메여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꺼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듀이를.”

“네.”

“듀이를 살려 주세요.”

“좋아요. 네리아의 소원을 들어주도록 할게요.”

벨라가 손짓하자, 눈앞에 새하얗고 커다란 빛의 덩어리가 생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잿더미처럼 검게 변해 있던 듀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듀이 군,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이제 일어나도록 해요.”

벨라가 듀이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자 듀이의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암흑 속에서 빛이 생기는 것처럼, 무채색 풍경에 아름답고 찬란한 오색 빛이 덧칠해지는 것처럼.

그리고 어느덧 듀이가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눈을 감고 있었기에 조심스레 그의 손을 잡았더니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었다.

눈앞에 기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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