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싸움에서는 지형까지 같이 이용하는 게 전술의 기본 아니겠어? 저건 못 피할-”
“안 된다고 했잖아요.”
“…….”
응? 나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란타나를 향해 쓰러지던 옷장이 어느새 정지라도 한 듯 멈춰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그녀가 있는 방향이 아닌 측면으로 쓰러졌다. 당연하게도 란타나에게는 작은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젠장.”
작전이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도구가 있는 이상, 공격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어?”
손에 끼고 있던 마도구 반지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작동이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다른 마도구인 목걸이를 더듬었지만, 이것도 역시 작동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고장?
“이제 그만해요. 이런 짐승 같은 방법. 재미도 없고 지겨워요.”
란타나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계속 반지를 만지작댔다.
“왜 마도구가 작동을 안 해? 당신이 한 짓이야?”
“맞아요. 방금 이 공간 전체에 마력 차단을 걸었어요.”
“마력 차단?”
“네. 이 마도구 역시 렌샤의 작품이랍니다. 최상위 마법이죠. 이제 이곳에서는 1시간 동안 마력을 사용할 수 없어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유치한 몸싸움도 끝이라는 거죠.”
“잠깐!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건, 당신도 마도구를 쓸 수 없다는 의미 아니야? 같은 조건이라면-”
으윽.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가 내 배를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통으로 얼굴을 엉망으로 구겼다.
“시시하게 굴지 말아요. 네리아 양은 졌어요.”
“지지 않았어!”
“그러면 어떻게 이길 건데요?”
란타나가 무릎을 굽혀서는 손가락으로 내 고개를 들게 했다.
“마도구는 쓸 수 없어요. 그런데 네리아 양은 큰 부상을 입어 저에게 반격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듀이 경이 죽은 충격으로 판단력을 잃기라도 한 거예요?”
“아니야. 아악-!”
부정하는 동시에, 그녀가 거센 악력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몸에 또다시 고통이 몰려왔다.
“이제 끝을 내도록 해요. 비록 마지막은 시시했지만, 그동안 함께 어울리며 즐거웠어요.”
란타나의 손에서 벨라의 칼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잘 가요, 나의 마지막 제물.”
“…마지막 제물이 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아직도 헛소리를-”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는 지지 않았다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란타나의 공격에 순순히 당한 것도, 일부러 몸을 다친 것도, 전부 란타나가 방심하며 그녀의 퇴로가 끊어진 지금을 위해서였으니까.
내 왼쪽 손목에 걸려 있던 투박한 모양새의 팔찌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세사르에게 받은 마도구로, 황궁으로 오는 도중에 약간의 개량까지 더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팔찌는 한 가지 중요한 특이점을 가지고 있다.
마력 대신 사용자의 피를 동력으로 사용하기에, 마력이 차단된 장소에서도 문제없이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 싸움이 란타나와의 1:1 난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어.’
벨라 일족의 목숨으로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진다면, 본격적으로 사냥이 일어나는 등 외부인에게 이용을 당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녀도 나도 벨라 일족의 비밀이 타인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이 상황에 개입하는 인원은 극소수의 최측근만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호위 인력은 그들끼리 전투를. 남아 있는 나는 란타나와 개싸움을 벌일 작정이었다. 검이든, 몸싸움이든, 마도구를 이용한 싸움이든 종류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란타나의 곁에는 세기의 천재 마법사라는 렌샤가 있었다.
렌샤는 란타나의 안전을 위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강력한 마도구를 만들었을 터였고, 내가 그 어떤 마도구를 가져간다 한들 세기의 천재가 만들어 낸 도구를 이길 수 없을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나는 란타나에게 구질구질하면서도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녀가 지겹다고 느낄 정도로.
‘애초에 지저분하고 꼴사나운 개싸움은 란타나의 방식이 아니야.’
그러니 내가 마도구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귀찮게 군다면, 란타나는 무언가의 조치를 취할 터였다.
그런데 대체 몇 종류를 가지고 있을지 모를 마도구를 하나하나 일일이 없애기는 번거롭다.
그렇다면 란타나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 주변의 마력을 차단하여 마도구 자체를 아예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원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유능한 렌샤라면 마력 차단을 걸 수 있는 것도 만들었겠지.’
나는 그 부분을 노렸다.
그랬기에 발렌티스 저택에서 황궁으로 출발하기 직전.
‘저도 생각이 있으니까요. 대신 세사르 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이요?’
‘네.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반드시 해 주셔야 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사르에게 받았던 투박한 모양새의 팔찌를 그에게 다시 되돌려주었다.
‘제가 뭘 하면 되지요?’
‘이 팔찌에는 마법 공격을 무효화 하는 능력밖에 없잖아요? 다른 기능 하나를 더 추가하는 거예요. 죄송하지만, 지금 당장이요.’
‘지금 당장이요? 기능 추가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작업하는 데 일주일은 걸릴 텐데-’
‘해내지 못하면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지금 당장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네리아 님. 방금 악덕 고용주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단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만.’
그리하여 황궁까지 마차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렌샤와는 다른 종류의 천재인 세사르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이용해 내가 지시한 작업을 단 30분 만에 수행하는 기적을 이뤄 냈다.
‘해내실 줄 알았어요!’
‘…저도 솔직히 놀랐습니다.’
나는 개량을 거친 팔찌에 피를 흘려 넣었다. 이제 이걸 이용해 마력이 차단된 공간에서도 특정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었다.
내가 마도구를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란타나를 공격할 방법이 없을 정도의 부상을 입는 것.
네리아 발렌티스는 란타나에게 더는 반격할 수 없다. 그녀가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 상황이 되지 않는다면, 란타나가 마력 차단을 걸 이유가 없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란타나와의 싸움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일부러 전투 불능이 될 정도로 몸을 다치게 했다.
어차피 그녀는 칼을 이용해 나를 죽여야 했으니, 내가 난전으로 사망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부상 정도는 처음부터 각오한 바였다.
그리하여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나는 나에게 벨라의 칼을 겨눈 란타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나는 지지 않았다고.”
“당장이라도 기절할 꼴을 해서는 허세 부리는 건 그만둬요.”
“허세가 아니야.”
이제, 내가 가진 비장의 카드를 사용할 시간이 왔다. 나는 왼쪽 팔을 란타나를 향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세사르에게 부탁하여 팔찌에 추가한 기능은 바로.
“속박-! 란타나를 붙잡아 줘!”
번쩍! 팔찌에서 짙은 푸른빛이 반짝였다.
“지금 무슨 짓을…….”
란타나가 눈을 찌푸렸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어디선가 검은 그물 같은 형상이 나타나 란타나를 옭아매고 그녀의 몸을 바닥에 묶었기 때문이었다.
“마법?”
란타나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정말이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보기 좋은 표정이었다.
“이거 치워요……!”
그녀가 몸을 바둥거리며 올가미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속박 마법으로 만든 그물은 물리적인 실체는 없어도 강력한 힘이었다. 무력이 없는 그녀가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내가 이겼어.”
“분명 마력 차단을 걸었는데, 어떻게 마도구를 사용한 거죠? 렌샤의 마력을 깰 수 있는 마도구가 있을 리가 없는데!”
“렌샤가 대단한 건 맞지만, 내 옆에도 렌샤 못지않게 훌륭한 마법사가 있거든.”
“대체 어떻게 한 거죠?”
“알아서 뭐 해? 곧 죽을 건데.”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 근처에 벨라의 칼이 떨어져 있었다. 란타나가 바닥에 묶이는 동안 손에서 놓쳐 옆으로 날아간 것이었다.
“자, 그럼.”
나는 칼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상의 여파로 전신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쿨럭. 또다시 피를 토했다.
아팠다. 갈비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그냥 이대로 바닥에 엎어져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견뎌! 정신 다잡으라고 했잖아!’
듀이는 최선을 다했었다. 온몸이 잿더미처럼 변할 정도로. 그러니 나 역시 겨우 이 정도의 부상으로 우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됐다.
‘듀이.’
눈앞에 내 기사님의 환상이 보였다. 듀이가 나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나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벨라의 칼을 붙잡았다.
“아.”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마치 칼과 공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란타나가 아까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벨라 일족을 구분하는지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 칼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잠깐, 네리아 양.”
란타나에게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되레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기다려요! 할 말이 있어요-!”
“나는 없어.”
나는 단호하게 대답하고는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탔다. 란타나는 속박 마법의 영향으로 여전히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심장을 향해 벨라의 칼을 치켜들었다.
“죽어. 그리고 지옥에 가서, 듀이에게, 칼로스에게, 내 부모님에게, 그리고 당신이 죽인 모든 사람에게 사죄해.”
“…네리아 양.”
“…….”
란타나를 보며 미간을 구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던 그녀가 어느샌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대가 그 누구라도 해도 반해 버릴 것만 같은 아름답고 달콤한 미소였다.
“저는 죽는 게 무서워요.”
“당신에게 죽임당한 사람들도 똑같았을 거야.”
“정말 절 죽일 건가요?”
“당연히.”
“네리아 양은 살인이 뭔지 몰라요.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없잖아요.”
“…….”
“감당할 수 있겠어요?”
란타나가 설득이라도 하듯, 손을 뻗어 내 왼쪽 뺨을 쓰다듬었다.
속박 마법이 풀린 건 아니었다. 그저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이 생존을 위해 능력 이상의 힘을 끌어모은 결과물이었다.
란타나의 오른팔에 핏줄이 터질 듯이 돋아 있었다. 그런데도 내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만은 다정하다는 이질감이 괴이했다.
“사람들은 흔히들 말해요. 널 죽여 버릴 거야, 라고. 하지만 정말로 남을 죽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요. 살인은 영혼에 낙인을 찍는 커다란 죄거든요.”
“…그런 주제에 당신은 잘도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구나.”
“저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라서.”
란타나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네리아 양은 아니잖아요. 사람을 한 번 죽이면,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러니 네리아 양, 죄를 짓지 말아요. 제가 도와줄게요.”
“…….”
“날 죽이면 죄책감에 매일 밤잠을 이루지 못하겠죠. 제정신을 유지할 수도 없을 거예요. 다시 물을게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나는 란타나의 아름답고 고운 분홍색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보통은 그렇겠지.
이 상황은 연극이 아니다. 소설도 아니다. 나는 현실 속에서 사람의 목숨을 직접 빼앗아야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제정신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겠지. 그렇지만.
“유언은 잘 들었어.”
정신 차려. 정신 다잡아.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던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내가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이제 죽어.”
손에 쥐고 있던 칼에 악력을 가했다. 내 눈빛에서 단호함을 읽은 것인지, 란타나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네리아 양!”
“그리고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일은 없어. 당신은 바퀴벌레를 죽이면서 죄책감을 느껴?”
“잠깐, 잠깐-!”
“당신은 나한테 사람이 아냐. 벌레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란타나의 심장 안으로 망설임 없이 벨라의 칼을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