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66)화 (166/172)



<166>

“되살릴 가능성이 있는 이상, 듀이 경은 아직 죽은 게 아닙니다.”

“…….”

“그러니 어서 정신 차리십시오! 디르케가 황제궁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디르케가 도망이라도 치기 전에 가셔야죠.”

“…네.”

세사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도저히 멈추지 않는 눈물을 왼손으로 대충 닦아 냈다.

“가야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듀이와 렌샤가 죽었다고 해서 내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는 아직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란타나에게 가겠어요.”

정신 차려, 네리아. 어린애처럼 굴지 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끝을 봐야지.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 쓰러진 듀이의 모습을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듀이.”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주먹을 거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흘렀으나 아픔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가만 안 둬. 절대 가만 안 둬. 죽일 거야. 내 손으로 반드시 죽일 거야. 지옥으로 보내버릴 거야.

“다녀올게, 듀이. 지켜봐 줘.”

고요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뚜벅뚜벅 앞을 향해 나아갔다.

종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

“흐음.”

란타나는 황제궁의 집무실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제국에서 황제가 아니라면 절대 앉아서는 안 될 의자였다. 하지만 란타나는 그곳이 처음부터 제 자리였던 양, 편하게 등을 기대고는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끝이 난 것 같군요!”

드디어 눈엣가시 같던 광전사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렌샤까지 같이 죽은 건 솔직히 아쉬웠다. 그녀는 강한 마법사인 데다 원하는 말을 속삭여 주기만 하면 목숨까지 쉽게 바칠 만큼 아둔했으니까.

‘그 정도로 유용하고 쓸모있는 인간은 찾기 어렵거든요.’

하지만 광전사와 함께 죽는 것으로도 렌샤는 충분히 쓸모를 다했다. 어차피 란타나는 오래도록 살 계획이었으니, 쓸 만한 인간은 다시 찾으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더는 집무실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으니, 네리아를 마중 나가도록 할까?

란타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동작에 그녀의 검은색 머리가 조금 흔들렸다.

“어떻게… 어떻게……!”

문을 나서기 직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란타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제국의 황제와 니나렛 황녀가 마법 도구에 묶인 채 붙잡혀 있었다.

“란타나……!”

황제가 분노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폐하?”

황족 둘을 붙잡는 일은 간단했다.

란타나는 집무실의 여분 열쇠가 있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설마 마수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 침입을 당할 줄은 몰랐겠지.

황제와 황녀에게 호위가 붙어 있기는 했었으나 그 이상으로 많은 숫자의 마수들을 투입하니 그들로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네가 감히! 내가, 내가 얼마나 너를-!”

“어차피 서로의 목적을 위해 이어지던 관계가 아니었나요?”

함께 지낸 시간 같은 건 무의미하다. 란타나의 입가에 아름다운 미소가 그려졌다. 황족은 후일에 쓸 일이 있을 테니 살려 둔 것뿐, 란타나에게는 황족조차 평민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굳이 신경을 써 줄 필요가 없지. 란타나가 황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아.”

그러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얼마 전에 유산된 아기 말이죠.”

“…….”

“실은 말이죠, 폐하의 아이가 맞았답니다! 지금 와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겠지만요.”

“뭐, 뭐라고?”

황제가 크게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란타나가 그런 황제를 보며 생긋 웃고는 이번에는 정말로 문밖을 나섰다.

***

사람들이 남아 있는 마수들과 계속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는 호위인 두 사람과 함께 황제궁 앞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맙소사…….”

그러나 입구에 쓰러진 인영들을 발견하고는 신음성을 흘렸다.

황족의 호위들이었다. 그렇다면 황제 폐하와 니나렛 전하는? 설마 두 사람에게까지 손을 쓴 건가?

“어서 와요! 네리아 양을 만나고 싶었답니다.”

드레스를 구기며 손에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더니, 어디선가 창문이 열리며 분홍색 눈을 가진 미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란타나.”

그 증오스러운 얼굴을 보자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또다시 거세게 날뛰기 시작했다.

나의 연인을, 나의 가족을,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빼앗아간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분노로 시야가 흐려졌다.

‘안 돼. 정신 다잡아.’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흥분하는 건 약점을 내보이는 것과 같았다. 냉정해야 한다. 이성을 잃으면 안 돼.

어느새 손끝이 차가워졌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은 해결해야 할 일이 더 있었다.

“그래, 나도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 그런데 폐하와 황녀 전하를 어떻게 한 거지?”

“죽이지 않았어요. 아직은.”

죽이지 않았다고?

하기야 황족은 이용 가치가 있다. 세사르를 향해 눈짓하자, 그가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황제와 니나렛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탁- 그러는 사이에 다시 창문이 닫혔다. 나는 그레이 경과 함께 그녀가 기다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함정이 있을 것 같아 그레이 경이 앞장서며 주의를 기울였으나, 의외로 함정 같은 건 없었다.

무슨 여유야? 불쾌한 기분이었으나, 란타나가 있는 방 앞에 무사히 도착하기는 했다. 그레이 경이 발로 문을 걷어찼을 때였다.

쉬잉-!

문이 열리는 동시에 안쪽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란타나의 시녀이자 자객인 젠이 이쪽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딜!”

그러나 그레이 경이 젠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들의 검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나는 두 사람의 공방이 이어지는 동안, 란타나가 서 있는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을 돌려 그레이 경과 힐끗 눈을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젠을 어디론가 유인하며 복도로 사라졌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밀폐된 공간 속으로 무겁고 어둑한 공기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와 단둘이서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꺼웠다. 이건 듀이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할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어차피 다른 사람이 있어 봐야 방해물밖에 되지 않잖아. 둘만 있으면 충분하지?”

“네, 둘만 있으면 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우리, 대단한 인연이지 않아요?”

“악연이겠지.”

“그런 말은 서운한데요. 어쨌거나 네리아 양은.”

그녀가 후후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드레스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걸 찾고 있죠?”

처음 보는 물건이지만, 그것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벨라의 칼이었다.

“듀이 경을 살리고 싶을 테니, 네리아 양도 이 칼이 절실하겠죠.”

“서론이 길어.”

“차갑기도 해라! 그럼 본론을 이야기할게요. 우리 둘, 벨라의 칼을 걸고 게임이라도 하지 않을래요? 이기는 사람이 이걸-”

게임? 더 들을 필요도 없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는 란타나의 뺨을 향해 던져 버렸다. 손수건은 그녀의 왼쪽 얼굴을 명중한 뒤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사들이 상대에게 장갑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이를테면 결투 신청이었다.

“굳이 게임 같은 걸 할 필요가 있어? 피차 노리는 건 서로의 목숨인데.”

란타나는 손수건으로 맞은 부위를 손으로 누른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황한 기색 같은 건 여전히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장담할게. 당신의 그 얼굴, 엉망으로 울어 버리게 만들겠다고.”

마수와 전투가 벌어져서였는지 땅에는 검들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장 가벼워 보이는 하나를 주워 들어 란타나를 향해 겨눴다.

“그러니까 덤벼.”

나에게는 전투력이라고 할 법한 능력이 없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기사나 자객같이 강한 자를 가리키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었다.

정식으로 검을 배워 본 적은 없지만, 기사들의 훈련을 구경하며 장난삼아 휘둘러 본 적은 있다. 게다가 어머니에게 배운 호신술까지. 성인 여성 하나 정도는 무력으로 이길 수 있다.

“난투? 몸싸움 같은 건 시시해서 재미없는데. 하지만 네리아 양이 원한다면 어울려 줄게요!”

란타나가 아무렇게나 들고 있던 벨라의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는 사이, 나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에 놓인 가구나 소품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좋아, 그렇다면.

“덤빌 생각이 없다면, 내 쪽에서 먼저 가겠어!”

란타나를 향해 뛰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망설임조차 없는 움직임이었다.

“네리아 양, 보기보다 난폭하네요. 새롭게 알게 된 일면인데요?”

“아직도 농담이 나와?”

비어 있는 란타나의 왼쪽 허리로 검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능숙하게 내 공격을 피했다. 심지어 몸을 숙여 검과 내 사이로 파고들어서는 내 목을 겨누기까지 했다.

“공격이 막무가내예요. 검을 정식으로 배워 본 적은 없죠?”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지만 저에겐 실전으로 단련된 감각이 있답니다! 네리아 양보다는 나을걸요?”

맞아, 그랬지. 그녀는 이미 제 손으로 많은 사람을 죽인 바 있는 살인자였다. 게다가 란타나의 말처럼 검을 이용한 공방도 실제로 그녀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어느새 란타나의 검이 내 목에 닿았고,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기개는 좋아도 객기와 구분은 해야죠. 이걸로는 날 이길 수-”

“걸려들었군.”

그녀를 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은 검보다는 호신술에 더 자신이 있거든.

“잠깐-!”

어머니의 가르침을 잊은 적 없다. 중요한 건 무게중심이다.

나는 칼을 들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뒤, 기울어져 있는 그녀의 상체를 내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리고 마무리로는 다리걸기. 란타나의 몸이 휘청였고 그녀가 어엇, 하며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잡았어.”

나는 그런 란타나의 위로 올라타서는 그녀의 몸을 강하게 짓눌렀다. 란타나의 얼굴이 가까웠다.

“…….”

“…….”

대화는 없었다. 옆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더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벨라의 칼이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마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반지로는 작은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어.’

나는 마도구를 이용해 란타나를 다치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럴 작정으로 반지에 시동을 걸었을 때였다.

“아……?”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날아들었다. 문도 창문도 닫혀 있어 바람이 들어올 장소가 없었는데도.

무척이나 강한 풍압에 내 몸이 날아가다시피 하며 돌벽에 거세게 처박혔다. 방어하지 못했다. 나는 전신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으읏.”

“네리아 양.”

정면을 바라보니, 란타나가 어느새 바닥에서 일어나 드레스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었다.

“설마 마도구를 네리아 양만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나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란타나를 도전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그러면 한번 막아 볼래요?”

그 목소리와 동시에, 또다시 내 정면으로 바람이 날아들었다.

저걸 정면으로 맞았다가는 피가 아니라 내장을 입 밖으로 토하게 될지도. 나는 이번에는 서둘러 귀걸이를 잡았다. 그러자 내 앞으로 실드 마법이 펼쳐졌다.

거센 바람이 푸른색 방어막을 몇 번이나 쳐 냈다. 그 마찰에 무서울 정도의 소음이 내 고막을 두드렸다. 하지만 실드가 있는 이상은 안전-

“…거짓말.”

푸른색 방어막에 금이 생기며 실드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파삭. 어느새 귀에 걸려 있던 귀걸이가 조각조각 깨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란타나가 가진 마도구에 의해 내 실드 귀걸이가 파괴된 것이었다.

“으읏.”

나는 몸을 굴리며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방어막이 깨지는 동시에 바람 일부가 나에게 날아들었다.

“아악-!”

실드와 부딪치며 강도가 약해지기는 했으나 정면으로 공격을 맞았다. 죽을 것 같다. 쿨럭. 아까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의 피를 토해 냈다.

란타나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불쌍한 듯 혀를 찼다.

“좋은 걸 알려 줄게요. 네리아 양은 마법 도구로는 저를 이기지 못해요. 제 건 렌샤가 절 위해 직접 만들어 준 것이거든요. 렌샤의 실력은 네리아 양도 알고 있죠?”

“그게 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라고 했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몇 개의 불덩어리가 란타나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정면으로 실드를 펼쳐 여유롭게 내 공격을 막아 냈다. 불덩어리는 그녀에게 조금의 영향조차 줄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안 통해요.”

그건 글쎄.

나는 란타나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 내가 목표로 한 공격은 그녀 본인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남아서 숨어 있던 불덩어리 하나가 란타나의 뒤에 있던 커다란 옷장의 다리를 터트렸다.

기우뚱. 무겁고 거대한 옷장이 중심을 잃고 란타나를 덮치듯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피할 수 없는 위치였다.

“싸움에서는 지형까지 같이 이용하는 게 전술의 기본 아니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