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
“…왜 웃는 거죠?”
듀이가 렌샤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자 날카로운 칼끝이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 하지만 렌샤는 당장 목숨을 잃게 된 상황이 되었는데도 킥킥거리며 웃음을 내뱉고 있었다.
체념으로 정신을 놓은 건가. 듀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렌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다행이어서요. 저만 혼자 죽는 게 아니라서.”
“무슨 소립니까?”
듀이가 눈을 찌푸렸다. 상황상, 혼자 죽는 게 아니라는 말은 듀이까지 함께 죽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승자는 듀이였고 렌샤는 더는 전투를 이어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분명 눈앞의 마법사가 반격할 여지 같은 건 없을 텐데.
“…당신, 설마.”
듀이가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렌샤의 상체 부근에서 심상치 않은 에너지가 느껴지고 있었다.
“심장에 박혀 있는 그걸로 자폭이라도 할 생각입니까?”
“네.”
그녀는 광전사가 이곳을 살아서 나가게 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최후의 방법이 존재했다. 바로 에너지의 집약체인 ‘요정왕의 심장’을 터트리는 것.
광전사가 이곳으로 도착하기 전에 이미 장치를 끝내 두었다.
렌샤가 살해를 당했을 때나, 혹은 언제라도 자신의 의지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러니 듀이의 죽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정왕의 심장이 터지면 지금 이곳을 중심으로 수도의 절반 이상이 완전히 날아가게 될 거예요.”
“그게 무슨-”
“그러니 당신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도망치거나, 아니면 폭발을 막는 것. 참고로 폭발을 막는다면 그 반작용 때문에 아무리 광전사인 당신이라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거예요.”
렌샤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반대로 이곳에서 도망쳐 살아남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당신이 이대로 회피한다면, 저 바깥에 있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폭발에 휩쓸려 죽게 될 거예요.”
“…….”
“그건 싫겠지요?”
“우습군요. 당신은 폭발을 일으키지 못할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바깥에는 디르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요정왕의 심장이 터진다면 당신이 충성하는 그 여자도 똑같이 죽게 될 것이 아닙니까?”
듀이가 렌샤의 이야기에 담긴 오류를 냉정하게 지적했다.
정확한 의견이기는 했다. 렌샤는 란타나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했고, 그런 그녀가 란타나가 위험에 빠지도록 놔둘 리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란타나 님은 괜찮습니다.”
렌샤가 그렇게 단언했다. 란타나를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미 안전한 곳에 계세요. 처음부터 그런 계획이었거든요.”
“안전한 곳이라니…….”
순간, 듀이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장소가 한 군데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
네리아와의 수업 도중에 들은 적이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은 메테오가 떨어져도 무사한 곳이라고. 그렇다면 렌샤는 정말로-
“이런 미친-!”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어디 한번 힘내서 막아 보세요.”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렌샤가 자신의 심장이 터지는 감각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란타나 님…….’
광전사에게 이겨서 란타나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직전까지 그녀의 곁에서 머물고 싶었다.
렌샤는 자신의 마지막 바람을 이루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 대신 란타나의 소원이 무사히 이루어지면 되니까.
‘저는 란타나 님께 필요한 존재였나요? 부디 제가 란타나 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사라지는 의식 속으로 렌샤가 담담하게 속삭였다.
“제길-!”
렌샤의 숨이 끊어지던 무렵.
듀이는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푸른색이던 요정왕의 심장이 검붉게 변해 있었다. 마치 타오르는 용암의 모습 같았다. 폭발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조건 막아야 한다!’
도망친다고?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들도 그걸 알기에 이따위 계획을 꾸민 거겠지만.
고민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듀이는 양손으로 검을 치켜올리고는 요정왕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다.
“…젠장.”
뜨겁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한 파장이 느껴졌다.
광전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전사였지만, 요정왕의 심장은 인간이 아닌 존재가 몸에 품고 있던 것이었다. 듀이는 폭발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렌샤의 이야기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에너지가 폭발한다면 수도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것이 확실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다면 이 참사를 막을 수도 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발상이야?’
교활하다. 듀이 하나를 없애기 위해 수도의 모든 인간을 인질로 잡은 것이었다. 네리아 역시도.
“으으윽…….”
요정왕의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에 듀이의 손이 잿더미처럼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아프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손에서 팔로, 상체에 이어 하체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잿더미처럼 변하는 부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절대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네리아의 기사이며 그녀의 긍지였으니까. 듀이는 어떻게 해서든 네리아를 무사히 지켜야만 했다.
“젠장-!”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바깥에는 네리아가 있다. 듀이가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폭발을 막은 이후여야 했다.
‘견뎌야 해.’
듀이는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았다.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조금만, 조금만 더.’
듀이가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모든 힘을 끌어 올려 요정왕의 심장으로 쏟아부었다.
어느덧, 터질 듯이 날뛰던 에너지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제는 시력까지 거의 잃어버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뒤.
진동이 완전히 사라졌고, 요정왕의 심장이 모든 힘을 잃고 평범한 돌처럼 변했다. 폭발을 막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네리아는, 수도는 안전하다.
“네리아 님, 저 성공했어요.”
듀이가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만 곧 죽게 될 것 같다.
듀이는 자신의 생명력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힘을 막아 낸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하지만 목숨이 아깝지는 않았다. 네리아를 위해서라면 영혼조차 버릴 수 있는데, 이깟 목숨이 뭐가 아쉬울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듀이가 이렇게 죽어도 네리아에게는 아직 란타나와의 싸움이 남아 있다는 것.
‘마지막까지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네리아 님은 강하니까. 란타나 따위의 인간에게 질 리가 없었다.
“네리아 님.”
눈이 감기며 의식이 멀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서 네리아의 환상이 보였다.
“보고 싶어요.”
스스로를 희생한 것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네리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쉬웠다.
‘널 좋아해. 듀이, 너를 좋아하니까 결혼하자고 한 거야. 이번에는 다른 목적 같은 거 없어.’
어쩐지 귓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뻤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행복한 나머지, 다음 날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버려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신도 네리아 님을 좋아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좋아한다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있다고. 네리아 님은 자신의 인생에 펼쳐진 기적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 역시 아쉽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듀이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깰 수 없는, 아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사, 사라졌습니다! 그 죄수 마법사의 마력이 사라졌습니다!”
“힘이 사라져요? 그 말씀은 듀이 경이 이겼다는 의미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마력이 아예 감지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죄수 마법사가 사망한 것 같습니다!”
“오, 세상에!”
수석 마법사가 내뱉은 말에, 본궁 밖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역시 듀이 경이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전설처럼 역사서에나 나오던 바로 그 광전사가 아니십니까!”
당연하지!
그깟 마법사가 뭐라고? 나는 듀이에게 쏟아지는 사람들의 찬사를 들으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듀이라면 해낼 줄 알았으니까.
렌샤가 만든 마수들은 아직도 황궁 곳곳에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었다는 건, 적어도 마수가 더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이 밝은 표정이 되어서는 잔당처럼 남은 마수들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저희는 듀이에게 가죠!”
이제 남은 건 란타나를 잡는 것뿐이다.
다른 길을 우회하여 황제궁으로 갈 생각이었건만, 부서진 나비 머리핀이 괜히 신경 쓰여 본궁을 떠나지 못하던 차였다.
‘차라리 잘됐어.’
듀이와 함께 란타나를 찾아가면 된… 아니다. 그렇게나 심하게 싸우느라 체력이 떨어졌을 테니 쉬게 하는 게 나으려나?
‘뭐, 결정은 나중에 해도 돼.’
어쨌거나 일단은 듀이를 다시 만나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기쁜 마음이 되어서는 본궁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건물 내부로 막 발을 들이려던 때였다.
“레, 레이디 발렌티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먼저 본궁 안으로 들어갔던 기사가 몹시도 당황한 모습이 되어서는 나를 만류했다.
“아직 안쪽이 위험한가요? 하지만 제 호위가 동행하니 괜찮습니다. 듀이를, 아니. 듀이 경에게 갈 거거든요.”
“저기, 레이디. 그러니까…….”
“경?”
숫기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기사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슬슬 답답해지려는 것 같아 나는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다음은 무엇이지요?”
“그러니까, 듀이 경이…….”
“듀이 경이 왜요?”
“…….”
“듀이가 많이 다쳤나요?”
“…….”
기사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내 질문이 이어질수록, 그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오열할 것처럼 변할 뿐이었다.
“경? 말씀을 하세요.”
“…….”
기사는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못했다. 뭐야? 대체 뭔데? 그 심상치 않은 반응에 정체 모를 불안함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비켜 주세요.”
더는 기다릴 수 없다. 나는 내 앞을 막은 기사를 밀쳤다. 그러자 건장한 성인 남자인 그가 힘없이 밀려났다.
“…….”
뭐야, 진짜 기분 나쁘게. 나는 짜증을 숨기지 않고 본궁의 복도를 쾅쾅 소리가 나도록 걸었다.
듀이가 있을 장소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전투 흔적이 가장 짙게 남은 위치를 찾으면 되는 데다, 이미 근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 레이디 발렌티스?”
문 입구에 있던 기사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아까 전에 만났던 기사와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들어가지 마십시-”
“방해하지 말고 비켜요!”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예의를 잊지 않는 사람인데도. 나는 나조차도 자각하지 못하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발 조금 뒤에-”
“비키라고 했잖아요-!”
이번에도 기사를 밀쳐 버리고는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레이디 발렌티스.”
방 안에는 기사와 마법사 몇 명이 모여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대화 소리로 차 있던 이곳은, 그들이 나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침묵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왜 저래! 진짜 기분 나쁘다고!’
나는 와락 표정을 구기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
바닥에 새까맣게 변해 버린 무언가가 쓰러져 있었다. 모습을 분간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형태만 겨우 남아 있는 무언가였다.
“…듀이?”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마치 잿더미 같은 형태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한 걸음, 그리고 한 걸음을 더.
모습이 바뀌었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듀이였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듀이가 저렇게 심각한 모습이 되었을 리 없잖아? 하지만 이성과 달리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건 듀이라고. 듀이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고.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검은 형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그의 몸을 흔들었다.
“듀이. 일어나, 나 왔어.”
“…….”
“듀이!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아직 할 일이 남았단 말야. 아! 혹시 많이 피곤한 거야? 이번에는 내가 다녀올 테니까 듀이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
“왜 대답이 없어? 목소리가 안 나와? 아니면 잠들었어?”
“…….”
“듀이.”
“네리아 아가씨.”
“그레이 아저씨? 왜요?”
“이제 그만하십시오.”
“뭘 그만해요?”
“듀이는… 듀이는 죽었습니다.”
“…….”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그레이 경의 입에서 결국 흘러나왔다.
“아니에요. 듀이는 광전사에요. 대륙에서 가장 강하다는 기사가 죽었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듀이의 가슴에 귀를 가까이 가져대 대었다.
“…….”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듀이의 심장이 멈춰 있었다.
“듀이가 죽었어요?”
“네. …네, 아가씨.”
“…….”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은 정말이지 힘든 하루였다.
칼로스가 죽었다. 그것만으로도 견디기가 힘들었는데, 이제는 듀이마저 내 곁을 떠나 버렸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이런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듀이.”
나는 또다시 듀이의 심장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심장마저 함께 멈춰 버린 것 같았다.
“네리아 님! 정신 차리십시오!”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앉아 있던 내 어깨를 누군가가 흔들었다. 세사르였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 벨라의 칼 말입니다. 마지막 희생양을 채워 소원을 빌면,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