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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64)화 (164/172)



<164>

“…….”

본궁 안으로 들어선 듀이는 말없이 눈을 찌푸렸다.

궁 내부에 렌샤의 마력이 가득 차 있었다. 불쾌하면서도 강력한 기운이었다. 이 공간 전부가 렌샤의 영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광전사인 듀이는 렌샤의 마력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이래서야 훈련받은 기사라고 해도 본궁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마수로 변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바깥에서도 이미 느꼈으나 직접 내부로 발을 들이니 더욱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서둘러야 해.’

듀이는 눈앞의 마수를 베어 넘기며 홀로 본궁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듀이의 미간이 또다시 구겨졌다.

단순하게 마수를 상대하는 것 이상으로 기분이 찝찝했다. 그를 비롯한 전투 인원들이 상대하고 있는 마수들이 예전에는 인간이었던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지하 감옥에 있던 죄수들도 있으나, 아무런 죄도 없는 평범한 자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말로는 다 설명하지 못할 끔찍한 참사였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오직 렌샤를 죽이는 것뿐. 듀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본궁 내부로 계속 진입하고 있을 때였다.

“키에에에엑-!”

뒤에서 최상급 마수 한 체가 그를 덮쳤다. 듀이가 가볍게 공격을 회피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마수였다.

“…레고트 발렌티스?”

“그르르르.”

“결국은 이렇게 되셨군요.”

듀이를 오랜 시간 노예로 부린 데다 네리아의 모든 것을 빼앗았던 도둑은 이제 인간의 이성을 잃고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감상에 빠지거나 레고트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찝찝한 기분도 그에게만은 예외였다. 발렌티스의 전 가주가 마수가 되었다, 그저 그뿐.

서걱-

듀이가 레고트를 베었다. 자비라고는 조금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듀이가 쓰러진 레고트의 사체를 발로 걷어차고는 다시 복도를 뛰어가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부터 나타나는 마수의 숫자는 아무리 베어도 여전히 끝이 없었지만, 그 무엇도 듀이의 발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여기군.’

그리고 어떤 방 앞에 도착했을 때, 듀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나무 문의 반대편에서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쾅-!

듀이가 문을 걷어찼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기다란 회색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렌샤, 그녀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듀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전사.”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까?”

듀이가 칼을 옆으로 휘두르자, 검날에 묻어 있던 마수의 피가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그는 검을 꽉 쥐고는 렌샤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눈앞의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운은 설마-

‘요정왕의 심장?’

세사르가 가지고 있던 물건과 비슷한 느낌이 렌샤의 심장에서 넘쳐나고 있었다.

듀이는 세사르와 잡담하듯 나눈 적이 있던 대화를 떠올렸다. 요정왕의 심장을 마법사의 심장에 박아 넣는다면 강한 마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인간의 신체로는 거대한 힘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죽게 될 거라고.

“당신, 내가 아니라도 죽겠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 전에 당신을 죽이면 되니까요. 광전사를 없애겠다는 목적은 이룰 수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나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도 그따위 인간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겁니까?”

“당신은 아닌가요?”

“…….”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렌샤의 말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듀이 또한 그의 주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릴 수 있지 않냐고.

“…틀리지 않습니다.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군요.”

목숨뿐일까. 듀이는 네리아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부를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녀도 다르지 않겠지.

듀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렌샤를 향해 검을 겨눴고, 렌사 역시도 그에게 반응하듯 마법을 시전했다.

“불타올라라.”

그녀를 중심으로 거대한 불덩이들이 떠올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태울 수 있을 법한 뜨거운 화염이었다.

이제부터는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전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봐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아까우니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요.”

렌샤가 고개를 까딱이자, 주변에 생성되어 있던 불덩이들이 동시에 듀이에게로 쏟아졌다.

‘…이건 맞으면 위험하겠군.’

마법사와의 전투는 처음이지만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본능으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듀이가 칼을 휘두르며 렌샤의 마법을 파훼시켰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

‘황제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나는 황궁의 정원을 가로지르며 표정을 굳혔다.

황제궁에는 폐하와 니나렛 황녀가 있다. 설마 두 사람에게 해를 가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란타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되었든, 란타나의 초대를 거절할 생각은 없지만.’

싸늘한 눈빛을 한 채로 본궁이 있는 방향을 지나치던 때였다.

“맙소사…….”

본궁 쪽의 하늘은 마치 벼락이 떨어지는 것처럼 번쩍거리고 있었고, 주변의 땅은 지진이라도 나는 것처럼 거세게 진동하고 있었다.

저쪽에는 듀이가 있다. 렌샤와의 전투로 인한 파장이 이 정도라고?

어차피 란타나가 있을 황제궁으로 가기 위해서는 본궁을 거쳐야 하기에, 나는 그레이 경과 세사르 두 사람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레이디 발렌티스!”

“위험하니 저쪽으로는 가시면 안 됩니다!”

본궁 근처의 풍경은 처음 봤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여전히 많은 숫자의 마수를 상대하고 있었다.

다만 아까와 달라진 부분이 한 가지 있다면, 황궁의 수석 마법사가 건물이 있는 방향 전체에 결계를 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석 마법사의 고유 마법인 절대 방어로써, 건물에서 벌어지는 듀이와 렌샤의 전투가 바깥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막은 것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절대 방어까지 사용하고 있는데도 이 정도의 파장이라고?

하기야, 듀이와 렌샤는 각자가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인재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서 전투가 조용히 끝날 리 없었다.

수석 마법사의 절대 방어가 없었다면, 두 사람의 싸움에 다른 사람들이 휘말리고 황궁 건물 전체가 진작에 무너졌을 게 분명했다.

나는 온몸으로 땀을 흘리고 있는 수석 마법사에게로 다가갔다.

“경! 괜찮으신 겁니까?”

“레이디 발렌티스가 아니십니까! 저는 괜찮지만, 듀이 경이 걱정이로군요. 결계를 치고 있는 저에게는 안에서 어마어마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살다 살다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에요, 저건.”

노년의 마법사가 불빛이 번쩍이는 건물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지만 정말 괜찮을 리가.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애써 감추며 그를 바라보았다.

보통 마법사들의 고유 마법은 비밀에 부쳐지지만, 수석 마법사의 경우에는 나이나 경력이 있어서인지 꽤 많은 정보가 공개되어 있었다. 그가 가진 고유 마법이라든가-

‘생명을 대가로 마력을 충당할 수 있는 특이 체질이라는 것도.’

그것이 눈앞의 남자가 다리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라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단시간에 많은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아마도.

“저는 살 만큼 살았습니다. 게다가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몸인 것을요.”

“…….”

말투는 가벼웠지만, 죽음을 각오한 그 시선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하는 거지? 나는 턱이 아릴 만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런데 레이디 발렌티스는 듀이 경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위험하니 안전한 장소에서 기다리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아뇨, 황제궁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황제궁이라면… 결계 때문에 지금은 본궁을 지나가지 못하실 겁니다. 위험하기도 하고, 조금 더 기다리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런가요?”

나는 수석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민에 잠겼다.

결계 때문에 본궁을 지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 같았다. 다른 쪽으로 멀리 돌아서 간다면 황제궁에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였다. 머리카락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감각이 느껴졌기에, 나는 다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머리카락에 꽂혀 있던 나비 머리핀이 떨어져 있었다.

“이런.”

듀이에게 받은 선물이다. 곧바로 허리를 숙이고 머리핀을 주워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머리핀의 나비 장식과 핀대가 분리되어 있었다.

“…….”

낙하 충격으로 장신구의 이음새가 떨어지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왜 하필 이런 때에?

‘저택으로 가져가서 고치겠지만.’

나는 눈을 찌푸리며 머리핀을 조심스럽게 주워 들었다. 본궁 안에서는 아직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

콰쾅-!

마력 폭발로 인한 잔해가 듀이의 몸을 덮쳤다. 연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회색 연기 사이로 은발의 기사가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듀이의 칼에서 뻗어 나온 검기가 날카롭게 렌샤를 공격했다. 그녀가 안구에 마력을 주입하여 동체 시력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눈으로 좇아갈 수도 없을 빠른 속도였다. 렌샤는 재빨리 실드 마법을 전개해 듀이의 공격을 막아 냈다.

쾅-!

또다시 두 사람이 격돌했고, 주변에는 시야를 가릴 만큼 짙은 먼지가 흩날렸다.

“당신, 괴물이군요.”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자신이 강한 만큼 상대방도 강했다.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1:1 전투에서 이 정도로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상대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리라고.

“다시 가겠습니다.”

듀이가 주변에서 달려드는 최상급 마수들을 피하며 날아올랐다. 대단하다. 광전사인 자신을 상대하고 있으면서도 마수를 만들어 내는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니. 솔직히, 이런 데서 죽기는 아까운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까운 것과 별개로 그녀는 죽어야만 한다. 듀이는 망설임 없이 렌샤의 목을 노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이 부딪치는 횟수가 늘어났다.

“큭, 제길……!”

처음은 둘의 공격력이 비등해 보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듀이의 공격이 렌샤의 실드 마법을 뚫고, 그녀의 몸을 베어 버린 것이었다.

“쿨럭.”

렌샤가 피를 토해 냈다. 졌다. 더는 일어설 수 있을 힘조차 없었다.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전사의 힘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다.

역시, 각성하기 전에 죽였어야 했어. 그녀가 과거의 일을 후회했지만 그래 봐야 지금의 상황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듀이가 렌샤에게 검을 겨눴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제 끝내도록 하지요. 당신의 충성심을 존중하여, 적어도 마지막은 편하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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