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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62)화 (162/172)



<162>

황궁은 지옥이었다.

그것이 궁 안으로 들어온 직후, 처음 들었던 생각이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마수들과 이를 상대하는 기사와 마법사.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와 멀리 있어도 분명히 느껴지는 비릿한 피 냄새들.

생과 사가 오가는 현장이었다. 전령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듣기는 했지만, 이 참사를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고작 단 1명의 인간이 혼자서 이런 지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니. 목격하지 못했다면 나조차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일이었다.

‘이 미친 인간 같으니라고.’

란타나가 그런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죄 없는 사람이 수없이 죽어 나가도 상관이 없다는 건가?

그녀에 관한 본능적인 혐오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레이디 발렌티스! 듀이 경!”

우선 가문에서 데려온 기사들에게 전투에 협력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더니, 근처에서 남자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기사단의 참모 중 하나였던가, 황궁 기사단 내에서도 지위가 상당히 높은 자였다.

“빠르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듀이 경을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급하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요? 폐하와 니나렛 전하, 황태제 전하는 무사하신가요?”

“황태제 전하께서는 기사들과 함께 전투에 직접 참여하셨고, 폐하와 황녀 전하는 황제궁의 집무실로 피신하셨습니다.”

황제의 집무실이라면 다리스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건국 시절부터 최고의 마법사들이 시전한 실드 마법이 축적되어 있기에, 하늘에서 메테오가 떨어져도 다리스 황제의 집무실만은 무사할 거라는 이야기는 유명했으니까.

“황족분들이 무사하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다른 상황은요?”

“좋지 않습니다. 서궁의 그 회색 머리 죄수가 말이지요.”

남자가 어둡게 흐려진 얼굴로 본궁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사람을 재료로 사용하여 계속 마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상급이나 최상급만 생겨나 상대하기도 힘든데, 없애는 족족 새로운 마수가 생겨나니 도저히 끝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려면 그 렌샤라는 마법사를 없애야 할 텐데…….”

“맞습니다. 모두가 그 죄수를 붙잡기 위해서 본궁 안으로 진입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 마법사의 사정거리 안에 들면 마수로 변해 버리기에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지요.”

남자가 고개를 돌려 듀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듀이 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전사이신 경이라면 그 해괴한 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도 마법사를 없앨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예, 저는 물론-”

듀이가 남자의 말에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키에에엑-!”

“그르르르릉-!”

갑작스럽게 주변에서 최상급으로 보이는 마수 3체가 튀어나왔다. 마수들은 나를 비롯한 사람들을 덮치고자 빠르게 뛰어왔지만.

서걱-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듀이의 검 끝에서 마수의 머리가 동시에 분리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듀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상태였다. 묘기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대단한 실력에 기사단의 남자도 희망을 발견한 듯, 그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저는 물론 가능합니다.”

“역시 경이십니다!”

“네리아 님.”

듀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네리아 님이 위험하시지 않도록 마수들을 최대한 없애고, 본궁으로 들어가서 렌샤를 제거할게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응. 조심해서 다녀와.”

“스승님과 세사르 님, 네리아 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거라!”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듀이가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로 본궁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나와 내 호위를 맡은 그레이 경, 세사르가 되었다.

“네리아 님,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란타나를 잡으러 갈 거예요.”

란타나는 렌샤와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 렌샤가 있는 본궁은 최전방이었고, 그렇게 위험한 장소에 란타나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아마도 서궁에 있겠죠.”

벨라의 영혼이 갇힌 그 단검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서궁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러면 서궁으로 출발하지요!”

“잠깐만요, 그 전에 먼저 들를 데가 있어요.”

***

호위를 맡은 두 사람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니나렛이 거주하는 황녀궁이었다.

그러나 주인인 니나렛이 피신한 데다 근처를 돌아다니는 마수들 때문인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레이 경과 세사르가 주변에 있는 마수들을 해치우는 동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바로, 마도구들이 보관된 금고였다.

“잠금 해체 암호가 분명-”

금고를 몇 번 조작하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 안에는, 귀족들은 황가의 허락 없이는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도 없는 귀한 마도구들이 종류별로 들어 있었다.

“이건 공격용, 그리고 이건 방어용이고…….”

“네리아 아가씨! 찾으셨습니까?”

“네. 두 분도 필요한 만큼 가져가도록 하세요.”

“화, 황가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도 정말 괜찮은 것인지.”

“비상 상황이잖아요. 그리고 황녀 전하께 허락은 이미 받은걸요?”

‘선생님이 필요하면 언제든 써!’하고 금고 해체 방법을 알려 준 사람이 니나렛이었다. 귀염둥이 꼬마는 나에게만은 아끼는 것이 없었다.

“네리아 님, 이것보다는 저게 더 방어 효율이 높을 겁니다.”

“그래요?”

나는 전문가라면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세사르의 도움을 받으며 무장을 끝냈다.

급한 상황에서도 굳이 황녀궁을 찾은 이유는 란타나와의 싸움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믿을 만한 호위가 둘이나 붙어 있지만, 란타나가 노리는 것은 내 목숨이었다. 나 스스로도 나를 지킬 수 있는 도구들이 필요했다.

“이제 진짜 출발해요.”

칼로스는 무사히 대피했을까? 마음이 급했다. 나는 서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숨이 차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

서궁.

칼로스는 이런 상황에서 웃고 있는 란타나를 보며 공포심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황궁 안에서 갑자기 마수들이 발생하다니. 가장 어린 칼로스는 어른들의 배려로 안전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마수들과 싸우다가 전부 사망하고 말았다.

건물 밖을 돌아다니는 마수들 때문에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다가 겨우 다른 사람이 나타났나 싶었는데 그게 란타나였다니!

최악이었다. 칼로스는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끔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숨겼으나, 뛰어난 자객인 젠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칼로스 양, 불편할 텐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이제 나오는 게 어떤가요?”

“…….”

칼로스가 란타나를 노려보며 작은 테이블을 빠져나왔다.

“아직 칼로스 양이 서궁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요!”

“뭐가 잘됐다는 거야? 날 어떻게 할 셈이야? 죽이기라도 할 거야?”

어차피 란타나의 입장에서 칼로스는 배신자였다. 살려 둘 리가 없겠지. 하지만 곱게 죽지는 않겠어. 칼로스가 그렇게 마음먹으며 란타나를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란타나는 죽음을 각오한 칼로스의 모습을 보면서도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죽일 생각은 없어요! 칼로스 양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인질로 말이죠.”

“인질?”

“네.”

란타나의 눈이 빛났다. 칼로스를 만나다니 뜻밖의 수확이었다.

요정왕의 심장을 제 심장에 박아넣은 렌샤는 인간을 초월한 수준으로 강했지만, 상대가 광전사라면 1:1로 싸워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니 칼로스를 인질로 쓰는 것이다. 네리아 발렌티스는 얼핏 과감해 보여도 인정에 약한 부분이 있으니까.

그것이 그녀의 약점이었다. 칼로스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면, 네리아와 듀이를 마음대로 흔들 수 있을 것임이 확실했다.

“당신이란 인간은…….”

칼로스가 란타나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끔찍한 인간이었다.

‘날 인질로 삼는다고?’

그게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아?

칼로스가 시선을 내리자, 로켓 목걸이가 보였다. 가운데에 박힌 선명한 녹색 에메랄드 보석이 엄마의 눈 색깔과 똑같아서 예쁘다고 생각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받아 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약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칼로스 양,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순순히 따라올래요?”

“…알았어요, 그럴게요.”

칼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목이 말라서 그런데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차라도 한 잔 마실 수는 없을까요? 당신… 날 인질로 이용한 뒤에 살려 둘 생각이 없을 거 아니에요. 죽기 전에 목은 축여 두고 싶어요.”

“칼로스 양이 역할을 잘해 준다면 충분히 살려 줄 용의가 있어요! 하지만 차를 마시고 싶다면 그 정도 시간은 기다려 줄게요.”

“고맙… 아니, 고맙다고 할 상황이 아니잖아?”

칼로스가 일부러 화가 난 듯이 말을 꾸며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허락해 줄 줄 알았다. 란타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여유가 가득했다.

칼로스는 주방으로 이동하여 뜨거운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실 것과 란타나에게 줄 것까지 2잔이었다.

등 뒤에서 젠이 이쪽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칼로스의 사소한 움직임까지 전부 주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칼로스가 조심스레 목걸이 안에서 코르로 만든 약 하나를 꺼냈다. 벨라 일족이 이걸 먹으면 죽게 된다고 했다.

칼로스가 긴장으로 침을 삼키고는 잔 하나에 약을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약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코르 냄새를 숨기기 위해 향이 강한 찻잎을 꺼냈다.

곧, 뜨거운 차 2잔이 완성되었다.

칼로스가 트레이를 들고는 란타나가 있는 장소를 향해 되돌아갔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칼로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탁-

유리 위로 트레이를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저만 마시기는 죄송해서 란타나 님이 드실 것도 같이 가져왔어요.”

칼로스가 그렇게 말하며, 가져온 차 한 잔을 란타나가 있는 방향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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