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지하 감옥의 또 다른 어딘가.
레고트 발렌티스는 야윈 몸을 벽에 기댄 채, 오늘도 조카인 네리아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다.
건방진 것, 망할 것, 죽일 것,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네깟 것이 감히 발렌티스 가문의 적법한 가주였던 나를 이런 꼴로 만들어?
감옥을 나가기만 한다면 반드시 제 조카에게 복수하리라. 평생을 고귀한 귀족으로 살았던 레고트 발렌티스가 고되기 짝이 없는 감옥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견딜 수 있다’라는 표현이 잘 지낸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었다. 감옥 안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과 다르게 흘렀고, 레고트는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도 모른 채 방금까지만 해도 어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감옥 안에서 누가 크게 싸우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지진?”
바깥에서 들리는 어마어마한 소음에 레고트가 철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10여 분 전부터인가, 감옥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설마 이대로 죽는 건가?
레고트가 본능적인 공포심에 뒷걸음질 치며 벽에 몸을 갖다 붙이고 있을 때였다.
뚜벅뚜벅.
복도에서부터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지금의 소동과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걸음이었다. 레고트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2~3명이 될 것인데, 간수가 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감옥 안이 위험해졌기 때문에 자신을 구해 주러 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철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 레고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고 말았다.
“라, 란타나 님?”
입으로 내뱉고도 믿을 수 없어 그가 자신의 눈을 거세게 비볐다. 란타나가 그녀의 시중인인 렌과 젠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란타나 님이 왜 이런 곳에 계신 거지?’
의문이 들었지만, 의아함은 곧 사라지고 기쁨이 마음속을 잠식했다.
나를 꺼내 주러 오셨구나! 그녀에게 충성한 지난날들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레고트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란타나 님! 접니다! 저, 레고트 발렌티스입니다!”
“어머, 발렌티스 백작이 아닌가요? 이런 곳에 계셨군요?”
“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래고트 발렌티스. 이 한 몸 다 바쳐 앞으로도 란타나 님께 충성을-”
“렌샤. 이것도 작업하세요.”
“알겠습니다, 란타나 님.”
“란타나 님? 작업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 어어?”
꺼내 주러 온 게 아니었어? 레고트가 창살을 붙잡은 채 무심코 고개를 숙이던 때였다.
“어어? 이, 이게 뭐야? 내 손이!”
레고트의 손이 마치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렇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란타나는 결코 레고트를 도우러 온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용을 당한 것이라고.
“무, 무슨 짓이냐! 이 죽일 놈들! 나를 원래대로 되돌려놓지 못-!”
무언가 끔찍한 짓을 당하고 있다.
차라리 조카인 네리아가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나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신체가 점점 변해 가며 결국은 완전한 마수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레고트는 더는 인간의 사고를 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마수로 만든 렌샤의 명령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감옥 바깥으로 나가, 만나는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라고.
“그으으으-!”
인간이었던 마수가 울음소리를 내며 밖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더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한때는 한 가문의 가주로서 권력을 휘두르던 자의 비참하고도 끔찍한 말로였다.
“감옥은 불편하지만, 재물로 쓸 수 있는 재료가 많은 점은 마음에 드는군요. 안 그런가요?”
란타나가 마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미 감옥 안의 수감자들 대부분을 마수로 만들어 바깥으로 내보낸 상태였다.
아마도, 황궁은 지금 혼란에 빠져 아수라장이 되었겠지.
“이제 서궁으로 갈까요? 우선은 칼을 먼저 찾아와야겠어요.”
네리아 양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칼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란타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렌샤와 젠이 그런 란타나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
발렌티스 저택에 전령이 찾아온 것은, 내가 휴식을 취하며 잠깐 눈을 붙였을 때의 일이었다.
“긴급 사항입니다! 레이디 발렌티스는 어디에 계십니까? 당장 불러와 주십시오! 긴급한 일입니다!”
“경! 긴급 상황이라니요?”
저택을 찾은 손님이 그만큼 시끄럽게 소란을 벌이고 있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가는 것이 당연했다.
쉬는 것을 방해받았지만 화가 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전령으로 온 기사의 얼굴이, 정말로 심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황궁에 상급 마수와 최상급 마수가 들끓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황궁에 마수가요?”
“예! 마수들이 황궁 밖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지금 황궁 기사단과 황궁 마법사 전원이 나섰지만, 마수의 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수습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발렌티스 가문의 기사를 파견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듀이 경은 계시는지요?”
“…있습니다. 곧장 준비시켜 황궁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발렌티스! 특히 듀이 경의 협력을 반드시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다른 귀족 가문으로도 가야 하므로 실례지만 이만 나가겠습니다!”
전령은 그렇게 말을 끝내고는 헐레벌떡 바깥을 향해 달려갔다.
“아가씨, 방금 말 전혀 믿기지 않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대충 알 것 같기는 해. 비비는 저택의 기사들을 전원 소집시키고, 사샤는 내 방에서 그 팔찌를 가져오도록 해!”
“네, 아가씨!”
하녀들에게 역할을 지시하고는 로비에 멍하게 서서 이마를 짚고 있었더니, 이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듀이와 세사르가 내 옆으로 달려오듯 다가왔다.
“네리아 님! 마수라면 설마?”
“네, 그 설마가 맞을 거예요. 란타나와 렌샤의 짓이겠죠.”
나는 세사르의 말에 두통을 느끼며 대답했다.
솔직히 진심으로 놀랐다. 하지만 지금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였다. 전령에게 자세한 전말까지는 듣지 못했으나,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렌샤에게는 마수를 만들어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와 일을 벌였음이 확실했다.
‘징그러운 것들.’
그렇게나 감시에 만전을 기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지만! 그렇지만……!”
세사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아연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첼에게 듣기로, 렌샤에게 채워 둔 마력 구속구가 20개가 넘는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세기의 천재인 렌샤라도 그 정도 숫자의 구속구를 자력으로 풀 수는 없었을 텐데요? 저처럼 요정왕의 심장을 가져 능력을 향상시키지 않는 이상은… 음?”
“세사르 님?”
“네리아 님, 혹시 요정왕의 심장이 하나가 더 존재합니까?”
“네? 그건 저도 잘…….”
요정왕의 심장이 내가 가진 것 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니.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가능성 정도는 열어 둘 필요가 있었다.
“렌샤는 원래도 괴물같이 대단했는데, 요정왕의 심장까지 가졌다면… 생각하기도 무섭습니다.”
나는 세사르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라고 했다.
란타나는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혀 정상적으로는 제 위치를 되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아예 내전을 일으켜 판을 뒤집겠다는 건가.
“…마지막 발악이라고 하죠.”
질긴 인간 같으니라고.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심부름을 보냈던 하녀들이 다시 돌아왔다.
“아가씨! 대문 앞에 저희 가문의 기사님들을 전부 불렀습니다.”
“아가씨, 말씀하신 팔찌를 가져왔어요! 여기!”
“다들 수고했어.”
상황이 급하니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황궁에 있을 니나렛과 칼로스가 위험할 수도 있다. 한시라도 빨리 구하러 갈 필요가 있었다.
“네리아 님.”
듀이가 내 앞에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수라고 해도 지금의 저에게는 벌레나 마찬가지인 생물일 뿐입니다. 마수도, 렌샤도 금방 정리하고 올 테니 저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역시, 듀이는 믿음직스럽다.
하기야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예전 세계에서 만났던 힐더 할슈리트 경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많고 위험한 전쟁터를 전전하고도 그의 얼굴에는 실낱같이 작은 생채기조차 없었다. 광전사는 그만큼 강한 존재였다.
“당연히 널 믿어. 하지만 황궁으로 가는 건 나도 함께야.”
“네리아 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절대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아뇨, 가야 해요. 란타나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녀와 나의 목적은 같다. 바로 서로의 목숨. 그러니 이건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상황이 정리되기를 하릴없이 기다리기보다는, 나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도 생각이 있으니까요. 대신 세사르 님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부탁이요?”
“네. 시간이 부족하겠지만 반드시 해 주셔야 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사샤에게 전달받았던 투박한 모양새의 팔찌를 세사르에게 건넸다.
***
서궁에는 사람이 없었다.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렌샤가 만든 마수들이 서궁에 남은 사람들을 전부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저는 이제 젠과 움직일 테니, 렌샤는 본궁으로 돌아가서 황궁 기사와 마법사를 상대하도록 해요. 슬슬 손님맞이를 해야 하잖아요?”
“알겠습니다.”
렌샤가 호위용 마수들을 남겨 둔 채 본궁으로 떠났고, 란타나는 젠과 함께 서궁을 걷기 시작했다.
주변이 고요했다. 매일같이 봐 왔던 풍경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딱히 감상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저, 필요한 물건을 찾기만 할 뿐.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한 후.
“다행히 조사관들도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군요. 뭐어, 가져갔을 거라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했지만요.”
란타나가 아무것도 없는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렌샤가 마법으로 감춰 놓았던 비밀 장치를 열자, 그 안에서 화려한 모양새의 단검이 나타났다.
지금은 99개의 보석만이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조금 뒤에는 마지막 100개째의 보석이 채워질 터였다.
그러니 기다림도 즐겁다. 란타나가 단검을 손에 쥔 채,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왔던 길을 다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젠?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란타나 님, 저기에.”
갑자기 멈춰선 젠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주황색의 무언가가 작은 테이블 아래에 최대한 몸을 감추며 숨어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듣고 보니 란타나의 눈에도 보였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칼로스 양로군요! 아직 살아 있었다니,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
반갑게 인사하는 란타나를 보며, 칼로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젠장, 들켰어.
칼로스가 목에 걸고 있던 로켓 목걸이를 손으로 꽉 쥐었다. 벨라 일족을 죽일 수 있는, 코르로 만든 약이 담겨 있는 목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