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황태제 전하! 이미 끝난 일을 지금 와서 들추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오니트의 기습 공격에 란타나 파벌 귀족들이 곧바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지, 표정에 당혹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이미 끝난 일이라니요? 폐하께서는 그 일을 출산 이후로 유예하겠다고만 하셨지, 없던 일로 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거늘, 설마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레벤 후작도 슬슬 은퇴를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 전하……!”
한순간 레벤 후작의 말문이 막혔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레오니트의 발언에 틀린 표현이 없다는 사실을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전하! 디르케는 유산으로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몸이 성치도 않은 자를 두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다리스 제국이 언제부터 범죄자의 편의를 봐줬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편의가 아니라… 애초에 지금은 그 사건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문제는 정식으로 날짜를 잡아 다시 천천히 토론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됩니다!”
“레벤 후작, 솔직하게 말해 보시지요. 대책을 세울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저희의 말뜻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굳이 처분을 미뤄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마침 고위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겸사겸사 해결하면 될 일이지요.”
레오니트가 란타나파 귀족들의 항의를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폐하, 디르케가 아네모네 별궁에서 저지른 죄들은 증거가 확실하게 남아 있는 일입니다. 아이도 없는 이상, 더는 처분을 유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디르케는 환자입니다. 적어도 몸을 회복할 때까지만이라도 시일을 주십시오!”
“…….”
황태제를 비롯한 귀족들이 황제 앞에서 각자의 주장을 피력했다. 황제는 메인 홀을 가득 채운 소음을 들으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듯 대답 없이 눈을 감을 뿐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 없는 얼굴 위로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폐하는 란타나를 사랑했으니까.’
마치 천사 같은 그 아름다운 얼굴이 이유이긴 했겠지만, 황제의 마음은 진심일 게 분명했다. 그는 란타나를 만난 이후로 그녀 이외의 다른 정부는커녕 황후조차 들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만큼 배신감도 더욱 크게 느꼈을 것이 당연했다.
란타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렇게나 기뻐했건만, 란타나 본인이 자신의 아이를 유산시켰고 동기라고 추측되는 이유가 황제 자신의 아이가 아니어서라니.
“폐하.”
어느덧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란타나가 메인 홀 중앙으로 걸어 나와 있었다. 그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는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란타나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 자리에서 디르케의 처분을 내리도록 하겠다.”
드디어 황제의 입이 열렸다.
나를 포함하여 이곳에 모인 모두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결정권자인 황제의 발언을 기다렸다.
“란타나는 훈련 중이던 제국의 기사를 납치하여 거짓으로 사망이라 위장했고, 토벌 대상인 마수를 사적으로 소유하기도 했다.”
메인 홀이 긴장감으로 채워졌다. 어쩐지 옆에서 숨을 참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란타나에게 그 죄를 물어, 디르케의 지위를 박탈하고 무기한의 감옥형을 내리겠다.”
결정이 내려졌다.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란타나를 붙잡고자 그녀에게 다가갔고, 메인 홀의 분위기는 여러 가지로 나누어졌다.
조용히 환호하는 자들과 경악하는 자들에 이어 폐하의 결정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자까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감옥에 갇히게 될 거라는 예상 정도는 했지만.’
무기형이라니. 이건 란타나에 대한 괘씸죄가 더해져서 내려진 결론임이 확실했다.
‘당신도 일이 이렇게 흘러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잘 가요. 사람이 과도한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나는 법이랍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기사에게 연행되는 모습을 유유히 지켜보았다.
***
란타나가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
레오니트의 입김 덕분에 잠깐이지만 그녀와 단둘이서 대화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배웅까지 와 주신 거예요?”
분해서 통곡이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체념인지 뭔지 그녀는 마지막까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상태였다.
“배웅이랄 것까지는 아니고, 마지막이니 이야기 정도는 해 보고 싶어서요. 란타나 님은 정말 반역이라도 벌일 생각이었나요? 직접 황제가 되고 싶어서요?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봤을 때만 해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렇게 보였나요? 난 네리아 양이 생각하는 것보다 목표가 큰 사람인데.”
란타나가 음, 하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황제가 되고 싶었다기보단, 특별히 대단치도 않은 사람이 귀족이랍시고 내 위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당신은 아니었나요?”
“……”
“네리아 양도 평민으로 지낸 시절이 있었잖아요. 무능하고 별것도 아닌 백부 가족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며 화나지 않았었나요? 저도 비슷하답니다.”
“그래서 가족을 죽이고 아무런 죄도 없는 일족을 찾아다니며 죽인 거예요? 그 저주나 다름없는 힘을 빌리기 위해서?”
“…….”
란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녀의 표정에서는 죄책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역시, 나는 평생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저런 인간을 이해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레이디 발렌티스. 이제 란타나를 감옥으로 들여보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경.”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기사가 란타나를 붙잡았다. 상대가 환자이기 때문인지 기사의 태도는 정중했으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곧, 그녀의 뒷모습이 감옥 안으로 사라졌다. 제국 최고의 미인이자 황제의 사랑받는 정부로서 유명세를 떨치던 것치고는, 초라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더니, 레오니트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는 황궁의 수석 마법사와 황제 폐하의 호위 마법사인 미첼 경이었다.
‘마침 잘됐어.’
나 역시 마법사인 그들에게 용건이 있었기에, 그쪽으로 다가가 레오니트에게 양해를 구하고서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두 분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 시종의 신병은 어떻게 되었는지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예, 물론입니다, 레이디.”
‘그 시종’이라면 렌, 혹은 렌샤를 가리키는 것이다. 미첼 경이 대답을 위해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이미 초록새로 도움을 받은 바가 있기에,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그 사람… 레이디께 처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정말 렌샤가 맞더군요. 죽은 게 아니었다니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지금도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심지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지? 성별을 위장하는 마법을 지금껏 들키지도 않고 완벽하게 시전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황궁 안에서 말이야. 재능이 대단해.”
노년의 할아버지, 수석 마법사가 자신의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순수한 감탄을 담아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황궁 마법사가 되었다면, 내 수석 마법사 자리를 진작에 뺏겼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실력자가 아직도 숨어 있었다니, 세상이 참 넓어. 안 그런가?”
“예, 마탑 시절부터 대단하기는 했습니다. 제 재능이 가짜라고 느껴질 정도였죠. 렌샤라면 언젠가는 대륙을 대표하는 마법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 아, 죄송합니다. 대화가 샛길로 빠져 버렸군요.”
렌샤에 대해 진지하게 떠들던 그들이 뒤늦게 본론을 깨닫고서는 입을 다물었다.
렌샤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세사르에게 이미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녀를 제대로 구속한 것이 맞는지 확인이 필요한 것이었다.
“렌샤에게 반항은 없던가요?”
“예. 근처에 황궁 마법사와 기사들이 깔려 있으니 반항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지금은 마력 구속구를 20개 가까이 채워 지하 감옥 최하층에 가둬 둔 상태이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렌샤의 사형일까지 경비를 세우기 위해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마법사 두 사람이 황태제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떴고, 남아 있던 레오니트가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두 사람에게는 감옥의 감시를 확실하게 해 두라고 일러둔 참이었습니다. 디르케가 감옥에 들어가기는 했어도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는 없지요.”
“역시 빈틈이 없으시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끝을 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레벤 후작이 훈련을 빌미로 병력을 수도 가까이에 옮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요.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는지.”
나는 레오니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괜한 가정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그대로 누명을 쓰고 란타나의 계획대로 일이 흘러갔으면, 수도에서는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도 남았을 테니까.
“아무튼 머리를 잡았으니 이제는 잔당을 소탕할 차례겠군요. 저는 레벤 후작을 비롯한 디르케의 수족들을 마저 정리하기 위해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축배는 그때를 위해 남겨 두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레오니트가 아직도 끝이 아니라며 웃음을 내뱉었다.
하기야, 나에게도 아직 끝이 아니기는 했다. 란타나를 마지막 제물로 삼아 일족의 저주를 없애겠다는 목표가 남아 있으니까.
방법이야 이미 정해져 있다.
우선은 벨라의 영혼이 갇혔다는 문제의 칼을 찾아, 지하 감옥에 있는 란타나의 신병을 빼돌려 처리하는 것.
부하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든가, 감옥에 갇힌 죄인을 빼돌려 살해하고는 자살로 위장하는 일은 제국에서 그렇게 드물지도 않았다.
‘자, 그럼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나도 부지런히 움직여 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려 서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