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란타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찌푸리고 있었으나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일개 새가 특정한 장소에 증거물을 물어다가 숨겨 놓았으리라고. 이건 전서구가 편지를 전달하는 난이도와는 수준이 다른 일이었다.
‘미첼 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칼로스 역시도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틀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는지, 반쯤 토라진 얼굴이 되어 나에게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계획이 더 있었다면 저한테도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놀랐잖아요! 저도 엄마처럼 저 인간에게 살해당하는 줄 알았다고요!”
“그건 미안해요, 칼로스 양. 그렇지만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칼로스 양이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줬기 때문에 란타나 님과 그 시중인들을 속일 수 있었던 거예요.”
“그건 이해하지만…….”
뾰로통한 표정이 된 칼로스를 향해 미안함이 담긴 어조로 사과했다. 같은 편인 칼로스까지 속인 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칼로스의 연기에서 허술함이나 여유가 보였다가는, 란타나나 그녀의 측근들이 수상함을 느끼고 다른 곳을 경계했을 테니까.
“…알았어요. 결과가 좋으니 저도 됐어요. 그러면 네리아 님이 페르테를 숨긴 곳은 어딘가요? 아! 예전에 젠 님이나 렌 님,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했으니 렌 님인가요?”
“네, 맞아요.”
나는 회색 머리를 가진 시종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칼로스는 소거법에 따라서 렌을 떠올린 것 같지만 사실 내 목표는 처음부터 그. 아니, 그녀였다.
젠이 뛰어난 자객인 건 알지만 그래 봤자 우리 쪽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그러나 렌, 렌샤는 다르다.
세사르가 마탑 시절부터 천재라고 극찬한 마법 실력부터 인간을 마수로 만들어 부릴 수 있다고 추측되는 고유 마법의 존재까지.
렌샤는 수상한 점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아직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었던 위험인물이었다.
젠과 렌, 둘 중 하나에게 죄를 씌워야 한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애초에 세력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에 황제 폐하의 호위 마법사인 미첼 경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위험한 고유 마법을 가졌으며 스승님에게 살해당했다던 그들의 동기, 렌샤가 사실은 살아 있고 디르케의 시종이 되어 있다는 사실로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극비라는 미첼 경의 고유 마법을 우리 쪽이 알고 있는 건, 세사르가 마탑 시절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고 적당히 넘길 수 있었지.’
짧은 시간 동안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질까 걱정하며 바쁘게 지냈지만, 고생한 것이 아깝지 않을 만큼 성과는 확실했다.
“그랬군요, 네리아 양.”
란타나가 입을 열었다.
“칼로스는 처음부터 단지 우릴 속일 수단이었던 데다, 사람도 아닌 동물까지 이용했다고요? 저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나는 침대에 기대 있는 란타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정말 감쪽같이 당하고 말았네요! 역시, 저는 네리아 양과 같은 편이 되고 싶었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웃는다고?
죄를 뒤집어쓰게 된 것은 란타나 본인이 아니라 시종이니 꼬리만 자르면 된다고 생각해서 여유를 부리는 것 같지만, 과연 이번 일이 단순히 꼬리를 자르는 것만으로 끝날까?
“란타나 님.”
착각은 자유라고 생각하며 나도 그녀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예전에 ‘같은 편’이라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했었잖아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요.”
“아, 그런 적이 있었죠.”
란타나와 나. 두 사람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침실을 가득 메웠다.
“보고드립니다! 서궁의 시종인 렌의 개인실에서 페르테가 발견되었습니다-!”
“황궁 기사들이 시종 렌의 신병을 구속했고, 동시에 이 일을 곧장 황제 폐하께도 보고하여…….”
머지않아 침실의 문이 열렸고, 긴급하게 달려온 조사관들이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전해 주었다.
“…디르케? 레이디 발렌티스?”
그러나 한 번 터진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조사관들이 의아한 듯이 이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
다음 날.
고의로 마차 사고를 일으켜 란타나를 유산시킨 사건에 관한 공식적인 심문이 이루어졌다.
“꿇어라!”
황궁 기사가 범인으로 지목된 회색 머리의 시종을 강제로 대리석 바닥에 꿇렸다.
렌의 죄명은 황족 살해죄.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번 심문은 황제궁의 메인 홀에서 치러졌다.
렌이 엎드리듯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고, 가장 상석에 앉은 황제가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황제 폐하는 처음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충격으로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으나, 지금은 이성을 되찾았는지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폐하께 이번 사건의 조사 결과를 정식으로 보고드립니다.”
메인 홀의 왼쪽에서 조사관의 대표가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나는 황태제의 옆에 선 채로 조사관의 발표를 집중해서 들었지만, 내가 아는 것과 달라진 내용은 없었다. 결론 또한, 이번 사고의 원인인 페르테가 디르케의 시종인 렌의 방에서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폐하! 저는 절대 아닙니다! 제가 아기님을 해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억울합니다. 이건 누군가의 모함입니다!”
렌이 황제를 향해 이번 일이 누명임을 피력했다.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절박한 목소리였다.
“증거라고 해도 페르테가 제 처소에서 나왔다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저를 모함하고자 숨겨 둔 것이 분명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우기겠지.
예상한 바였기에 나는 옆에 있던 레오니트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렌을 사형대로 직행시킬 다른 증거물을 꺼낼 차례였다.
“모함이 아닙니다. 폐하께 이것을 제출하겠습니다.”
렌의 발언이 끝나자 레오니트가 상석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갔다. 손에는 편지 하나를 든 채였다.
“디르케의 시종이 페르테를 구하기 위해 불법 약물을 취급하는 암상인에게 보낸 자필 편지입니다. 이번 일을 자체적으로 조사하던 중에 발견한 것이지요.”
“편지? 편지라니요? 모르는 일입니다! 폐하! 저는 저런 편지를 쓴 적이 없습니다!”
“네놈은 움직이지 말거라!”
메인 홀은 조용해질 틈이 없었다. 고개를 쳐들고서 부정하는 렌과, 그런 렌을 다시 속박하는 기사들.
그러는 사이에 편지가 레오니트에게서 황제에게로 전해졌다. 황제 폐하는 손바닥 크기의 종이에 적힌 글자를 모두 읽은 후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내용이 사실인가?”
“아닙니다, 폐하! 저는 그런 편지를 쓴 적이 없습니다!”
렌이 분한 듯이 소리쳤다. 뭐, 가짜 증거물이 맞았으니, 적어도 이것만은 억울할 법도 했다.
저 편지는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렌의 필체를 따라서 작성하게 한 가짜니까.
레오니트와 나는 디르케 측이 페르테를 입수한 경로를 찾고 싶었지만, 단시간 내에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증거물을 꾸며 낸 것이다.
‘하지만 란타나의 수하들이 페르테를 가져온 건 맞잖아?’
비록 수단이 거짓이어도 사실까지 달라지는 일은 없었기에, 딱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누군가가 제 글씨를 흉내 내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리 주장할 것 같아, 제가 미리 황궁 소속의 필체 감정사를 불러 두었습니다. 폐하, 감정사의 입실을 허가해도 괜찮겠습니까?”
“허가한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어떤 남자가 메인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에게도 익숙한 얼굴로서, 과거 듀이의 재판 때 도움을 주었던 바로 그 필체 감정사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그래. 이 편지의 조작 여부가 궁금하군. 자네의 의견은 어떠한가?”
“폐하께 제 의견을 고하자면-”
감정사의 입술이 열렸다.
“이 편지는 저 시종 본인이 직접 쓴 것이 맞습니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저는 황궁 소속으로 20년을 넘게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거짓말이 분명하건만, 남자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레오니트와 모종의 시선을 교환했다. 이번 일을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서는 필체 감정사의 조력도 필요했지만, 그를 설득하는 일은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었다.
‘아무리 황태제 전하의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습니다! 이는 저의 신념이 걸린 일입니다. 폐하께 거짓을 보고할 수는 없습니다!’
‘경은 디르케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레오니트는 경악하며 입을 벌리는 그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디르케가 부리는 마법사가 인간을 마수로 만들 수 있다는 것부터, 그녀의 최대 세력인 레벤 후작이 영지에 있는 병력을 수도 가까이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사실까지.
‘단순히 거짓을 고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제국의 평화를 지키는 명예로운 일입니다.’
‘그,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하나 약속드리지요. 제가 제위에 오른다면, 경을 차기 아카데미 학장으로 올리겠습니다.’
‘…….’
거절하기에는 보상이 너무 컸고, 레오니트는 결국 그를 포섭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폐하, 이 편지는 시종이 쓴 것이 확실합니다. 이상입니다.”
“알겠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렌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해 갔다. 벗어날 수 없는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네의 이름이 렌이라고 했던가.”
그리고 쐐기를 박기 위해 레오니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족 살해는 3대를 사형에 처하는 흉악한 범죄다. 하지만 나는 그대가 독단적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
“이번 사건. 사실은 디르케가 명령한 것은 아닌가? 배 속의 아이가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말이지.”
“아, 아닙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 맞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예! 디르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 제가 실은 디르케에게 원한을 품고…….”
자칫하면 란타나까지 수렁에 빠질 수 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그녀의 충직한 수하는 란타나를 위해 혼자 죄를 뒤집어쓰는 방법을 선택했다.
“자백이 나왔군.”
더는 들을 이야기가 없다. 결국, 황제 폐하가 차가운 목소리로 선언했다.
사형. 당연한 결과였다.
“사형 집행은 다시 날을 잡을 것이니, 저 시종을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도록.”
“예, 명령 따르겠습니다!”
황족을 살해한 대역죄인을 정중하게 대할 필요는 없다. 기사들이 양옆에서 렌을 붙잡고는 거칠게 끌고 나갔다.
하지만 란타나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 때문일까. 렌에게서는 반항조차 없었다.
나는 제자리에 조용히 선 채로 렌이 끌려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만약 이번 일이 란타나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면,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으로 가는 사람은 내가 되었겠지.
그리고 사형 집행이 있기 전, 란타나가 은밀하게 나를 빼돌려 나를 마지막 제물로 삼았을 것이고.
나는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맞은편에 서 있는 란타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시녀의 부축을 받아 이번 심문에 참석했지만, 렌이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꼬리를 자르기 위해 시종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걸로는 안 끝나지.’
왜냐하면, 그녀가 저지른 잘못은 이것뿐만이 아니니까.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태제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는가? 무슨 일인가.”
“일전에 아네모네 궁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잊지 않으셨겠지요. 디르케가 별궁에 최상급 마수를 숨기고, 기사를 납치한 일 말입니다.”
레오니트의 발언에 메인 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분명 그런 일이 있었지.
황제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 일에 관한 처벌은 디르케가 출산을 마칠 때까지 ‘유예’하겠다고.
‘끝난 일이 아니라는 거지.’
폐하는 시종의 자백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 다만 란타나를 엮을 증거가 없기에 놔둔 것일 뿐.
이번에는 피해 갈 수 없을걸?
나는 맞은편에 선 란타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