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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57)화 (157/172)



<157>

란타나의 침실은, 서궁의 소란스럽던 다른 방들과는 달리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란타나는 흰색 침대 위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었다. 수척해 보이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바깥의 소동과 자신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네리아 양! 바쁠 텐데 이렇게 병문안을 와 줘서 고마워요!”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소식을 듣고 란타나 님에 대한 걱정으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어요.”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요. 자면서 휴식을 취했더니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답니다! 게다가 저에게 줄 회복약까지 가져오셨다고요?”

“네, 란타나 님. 저희 가문에서 운영하는 마법약 제조실에서 만든 약이에요. 정성껏 만들어 효과가 무척 좋거든요. 근처에 계신 시녀분께 전달하면 되겠지요?”

나는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가져온 유리병을 꺼냈다.

“여기-”

그러나 약은 시녀에게 도착하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쨍그랑- 하는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깨진 유리병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바닥을 어둡게 적셨다.

“맙소사. 실수로 손이 미끄러졌네요.”

나는 비웃음을 지은 채, 전혀 실수가 아니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당연했다. 약은 서궁으로 들어올 핑계로 가져온 것이지, 진짜 그녀에게 먹일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걸 먹고 독이 들었던 척, 란타나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이걸 드리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건데… 죄송해요, 란타나 님.”

“괜찮아요. 저는 네리아 양의 마음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젠은 잠깐 와서 유리병 파편을 치워 줄래요?”

“바로 정리하겠습니다.”

어지럽혀졌던 바닥이 갈색 머리의 시녀에 의해 깨끗하게 치워졌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하게 지켜보다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시녀분께도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이해해 주실 거죠? 그것도 그럴 것이, 그쪽이 모시는 분 때문에 제가 고생이 많았잖아요.”

“…….”

뼈가 들어 있는 발언이었다. 오늘 저택을 수색당한 일부터, 넓은 의미로는 그동안 란타나로 인해 벌어졌던 모든 일을 의미하는.

시녀인 젠은 듣지 못한 척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신 란타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젠은 이해해 줄 거예요. 그런데 네리아 양, 고생이 많았다고 말하는 것 치고는 즐거워 보이는데요?”

“제가 그렇게 보였나요?”

“네, 무척이요.”

란타나는 그렇게 대답한 뒤, 그녀의 시녀를 가까이 오게 했다.

“젠. 네리아 양에게 드릴 차와 다과를 가져와 줘요.”

“알겠습니다, 란타나 님.”

“그리고-”

란타나와 젠 사이에 대화가 더 오갔지만, 목소리가 작아 나에게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후로 이동한 젠의 말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바깥으로 나간 것을 보니, 그들에게 잠깐 자리를 비켜 달라는 이야기를 전한 것 같았다.

“차는 마시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앞으로는 여유도 없으실 텐데, 괜한 번거로운 지시를 하셨어요.”

“그렇지만 네리아 양이 절 만나러 서궁까지 와 주셨는데, 손님 대접에 소홀할 수 있겠어요?”

남아 있던 나와 그녀가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다과를 들고 온 사람은 방금 나갔던 젠이 아니었다.

‘칼로스?’

주황색 머리카락의 소녀를 보며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칼로스 또한 나를 평범한 손님처럼 대하며 근처에 있던 간이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제가 아까 말했었죠? 네리아 양, 고생했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즐거워 보인다고요.”

달칵달칵, 접시가 간이 테이블에 올려지는 소리 위로 란타나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그런데 그 이유가 혹시 이것 때문인가요?”

란타나가 베개 아래서 무언가를 꺼냈다. 헝겊에 싸여 있는 페르테였다. 며칠 전에 내가 칼로스에게 주었던 물건이 분명한.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쳐다보아도, 그녀가 들고 있는 물건의 모습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한순간에 공기가 변했다.

칼로스의 눈동자에서도 ‘그걸 왜 란타나가 가지고 있어?’라는 의문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페르테. 마차 사고의 증거물로 칼로스가 젠의 방에 가져다 놓은 것 말이에요.”

…란타나가 그걸 알고 있었다고?

소리 없는 경악이 침실 안을 가득 메웠다. 접시를 옮기고 있던 칼로스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라, 란타나 님? 제가 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정말요? 칼로스 양이 페르테를 젠의 옷장 아래에 넣어 놨잖아요. 왜 모르는 척하는 거예요?”

들켰다.

칼로스가 들고 있던 디저트 접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둘이서 사이좋게 날 곤란하게 만들 계획이었잖아요. 제가 두 사람이 손잡은 걸 모를 줄 알았나요?”

“…….”

“…….”

살얼음 같은 분위기 속에서 웃고 있는 사람은 란타나 혼자뿐이었다.

확실한 건, 이제 와서 발뺌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려 넣은 미소를 지은 채 평정을 가장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칼로스가 고급 보석 상점에 갔는데, 기사가 시비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네리아 양, 세상에 우연이란 건 잘 없거든요.”

“…….”

“그래서 그날부터 칼로스를 감시하게 했었죠. 두 사람이 저 몰래 만난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답니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네리야 양은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잖아요. 제가 젠을 시켜 발렌티스 저택에 이걸 가져다 두게 한 건 맞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네리아 양이 이 함정을 역으로 이용할 거라는 가능성까지도요.”

“…….”

“분명, 네리아 양은 마차 사고의 증거물인 페르테를 제 쪽으로 보내 저희 측이 벌을 받게 만들 텐데, 서궁으로 침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렇다면 남은 건?”

“…….”

“서궁의 내부자인 칼로스뿐이죠. 어때요, 네리아 양? 제 추리에서 틀린 부분이 있나요?”

틀린 부분? 없다.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이 교활한 뱀 같으니라고.

“젠의 방에 페르테를 숨겨 제 시녀에게 죄를 씌울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실패했네요!”

“…네, 정말 아쉽게 되었어요.”

“증거물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을 테니, 이 일은 네리아 양에게도 저희 쪽에도 타격이 되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겠군요.”

란타나가 후후 웃었다. 그러고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칼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칼로스는 어쩌죠?”

“…….”

“저는 배신자를 살려 둘 생각이 없거든요. 칼로스 양, 왜 그랬나요? 정말 서운하답니다. 제가 칼로스 양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란타나의 시선을 받은 칼로스의 몸이 덜덜 떨렸다. 연기일 수가 없는 공포에 의한 떨림이었다.

“…주, 죽일 거면 죽여요. 어차피 나는 엄마가 죽었을 때 같이 죽으려고 했던 몸이에요.”

“잠깐, 포기가 너무 빠르지 않아요? 칼로스 양이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거든요!”

“그게 뭔가요?”

“이 페르테를 들고 나가서, 밖에 있는 기사와 조사관들에게 증언하는 거예요. ‘네리아 발렌티스가 나를 협박하여 이걸 서궁에 숨겨 놓으라고 지시했다.’라고요. 거짓말은 아니잖아요?”

“…….”

“그렇게만 하면 칼로스 양을 용서해 주도록 할게요. 거기에 보상으로 귀족 작위를 내려 줄 생각도 있답니다! 어떤가요, 제 제안이?”

칼로스를 이용해서 나를 범인으로 만들겠다고? 근처에서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요. 순진한 칼로스를 네리아 발렌티스가 이용한 것뿐인걸요. 네리아 양이 아니었다면, 칼로스가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할 일은 없었을 텐데.”

“저는…….”

졸지에 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하지만 칼로스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고 구걸할 생각은 없다. 나는 생각에 잠긴 소녀를 고요한 눈동자로 지켜보았다.

“저는.”

드디어 고민을 끝낸 걸까. 칼로스가 고개를 들어 란타나의 시선을 마주했다. 확실하게 결정을 내린 눈빛이었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너 같은 악마랑 손을 잡지는 않아.”

“그래요? 현명한 결정은 아니로군요.”

“애초에 내가 이따위 처지가 된 건, 네리아 님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죽여! 이 망할 인간. 내가 죽어서도 널 저주할 거니까 어디 한번 죽여 보라고!”

“칼로스 양, 진정해요!”

나는 흥분으로 날뛰며 란타나에게 달려드는 칼로스를 붙잡아야 했다.

“칼로스 양이 죽을 일은 없을 거니까, 진정하도록 해요!”

“칼로스가 죽을 일이 없을 거라고요? 네리아 양,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거야.”

나는 여전히 날뛰고 있는 칼로스를 달래며 웃었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담긴 진짜 미소였다.

“란타나 님을 믿었으니까요. 제가 칼로스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진작에 눈치챘을 거라고,”

“…뭐라고요?”

“네리아 님?”

칼로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란타나 님이 아네모네 궁에서 저한테 편지를 주셨잖아요. 레오니트 전하의 약점이 되는 편지 말이에요. 그건, 제가 황태제와 같은 편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물을 주신 거 아니었나요?”

“…….”

“황태제 전하와 한편이 되었다는 사실은 가신들도 모르는 비밀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일까지 알고 계신 란타나 님이 제가 칼로스와 손을 잡았다는 간단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요.”

란타나는 레고트 백부 일가와는 다르다. 어느새 흥분을 잠재운 칼로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의아한 듯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네리아 님? 그걸 알고 계셨으면 왜 저한테 페르테를 숨기라고 지시하셨던 거예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쉽게 말하면 그거에요. 양동작전?”

“야, 양동작전이요?”

“네. ‘제가 역으로 함정을 판다.’ 그 사실을 란타나 님이 눈치챘을 테니, 칼로스 양에게 그런 부탁을 한 거예요. 그리고 저는 칼로스 양이 의심을 받아 경계의 대상이 된 동안, 별개로 다른 곳에 페르테를 숨겨 둔 거죠.”

“그러면 제가 가져다 놓은 페르테는 저 인간에게 들키게 될 거라고,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고요?”

“맞아요. 그러니 머지않아 제가 서궁에 심어 놓은 페르테가 발견될 거예요. 우리의 계획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네리아 양, 페르테를 어디에 어떻게 숨겨 뒀다는 건가요?”

나와 칼로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란타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의심에 차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동안 서궁에 침입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제 부하들은 네리아 양의 생각보다 무능하지 않답니다.”

“맞아요. ‘사람’은 침입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서궁에 페르테를 숨겨 둔 건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연히 궁금할 테니, 대답 정도는 해 줘야겠지. 나는 며칠 전, 세사르와 나눈 바 있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쨌거나 미첼이 고개 숙여 사과하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돕겠다고 하더군요. 네리아 님, 혹시 미첼을 부려 먹을 일이 있으면 제게 말씀하시죠!’

‘네, 기억해 두고 있을게요.’

황제의 호위 마법사인 미첼 경은 고유 마법으로 패밀리어인 초록새를 제 의지대로 부릴 수 있다.

세사르를 통해 미첼 경에게 초록새를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람의 말을 아주, 아주 잘 따르는 새가 있거든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새……?”

어느새, 란타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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