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어쨌거나 그건 페르테가 아니네요. 기사님들은 마저 살펴보시길.”
“…알겠습니다. 방금은 저희가 성급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발렌티스.”
“괜찮습니다. 후원까지 파 볼 정도로 꼼꼼하게 찾아보았는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면, 되레 제 결백이 증명되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
그 뒤로도 몇 시간이나 수색 작업이 이어졌지만, 당연하게도 발렌티스 저택에서는 그 어떤 수상한 물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는 그렇게 종료. 그랬기에 나는 기사들과 조사관들을 향해 당당하게 발언할 수 있었다.
“저는 서궁의 사람들이 의심스러워요. 동기가 존재하고, 말에 페르테를 먹일 수 있었던 건 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언급한 ‘동기’란 다른 것이 아니다. 란타나의 아이가 사실은 황제의 친자가 아니기에, 불륜의 증거물인 아이를 마차 사고를 위장하여 없앴다는 것.
기사도 내 말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 또한 그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궁 소속의 관련자들도 조사해 주세요. 저는 제 저택이 샅샅이 파헤쳐지고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옷까지 벗어야 했는데, 이 정도 건의는 할 자격이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아마 그쪽에도 조사관이 파견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기사가 나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모두 철수한다!”
그 명령에 황궁의 관계자들이 작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창문 너머를 향해 고개를 돌려, 황궁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자, 그렇다면 이제.’
차례가 넘어갔다.
나 하나를 잡겠답시고 고생해서 그런 일까지 벌여 주셨는데, 나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
도리를 아는 인간으로서 답례는 성의껏 해 줘야 마땅한 법. 다음은 나의 새로운 협력자인 칼로스가 활약해 줄 시간이었다.
‘유감스럽지만, 마차 사고와 유산의 책임을 지게 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희가 될 거거든.’
나는 당황스러움에 휩싸일 게 분명한 란타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
몇 시간 전, 서궁,
칼로스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복도를 서성거렸다.
며칠 전, 칼로스가 변장까지 해 가며 네리아 발렌티스를 비밀리에 만났을 때 그녀가 말했었다.
회임 축하 연회가 열리는 날.
란타나는 사고로 아이를 유산하게 될 것이며, 그 일의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기사들과 조사관들이 서궁으로 들이닥치게 될 것이라고.
‘설마- 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연회 당일.
정말로 사고가 발생했다. 란타나는 아이를 잃고 치료를 위해 다시 서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란타나의 방에는 지금도 계속 황궁의들이 드나들고 있었고, 서궁은 반쯤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전부, 네리아 발렌티스의 말대로였다.
‘그렇게 되면, 다음으로는…….’
지금은 란타나의 안정과 치료가 우선이었지만, 조만간 네리아의 이야기처럼 기사들과 조사관들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때가 되기 전에 칼로스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반드시 해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네리아 님이 날 믿겠다고 했어. 절대 실패할 수는 없어. 어차피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칼로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무렵이었다.
복도 끄트머리에서 칼로스가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란타나의 최측근 시녀, 젠이었다.
‘지금이야.’
칼로스의 모습이 삽시간에 변했다.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두 손은 오한이라 든 것처럼 덜덜.
연기라면 자신이 있었다. 정도 이상으로 예쁜 평민 여자아이가 보통 사람처럼 살기 위해서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되었으니까.
“칼로스 님! 괜찮으십니까?”
“젠 님…….”
스르륵- 칼로스의 몸이 벽을 따라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젠이 달려가 그런 소녀의 몸을 부축했다.
같은 시녀라도 칼로스는 장래에 황제의 정부가 되기 위해 란타나가 키우는 소녀다. 젠에게는 그런 칼로스를 보살필 책임이 있었다.
“얼굴색이 좋지 않아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요?”
“아뇨… 아픈 게 아니라 무섭고 걱정이 되어서요. 란타나 님의 아이가 죽었다니.”
칼로스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 그럼 란타나 님은 어떻게 되시는 거예요? 만약 란타나 님이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저는요……? 어쩌죠? 어떻게 하면 좋지요?”
“칼로스 님,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일단 쉬면서 진정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팔을 잡고 기대세요.”
젠이 칼로스를 달래며 부축했다.
젠은 원래 란타나의 곁을 지켜야 하지만, 어차피 그녀의 곁에는 황궁의들이 있었기에 잠깐 칼로스를 챙기는 건 문제가 안 되었다.
“여기 계신 걸 보니, 칼로스 님은 란타나 님께 가시려던 거지요?”
“네… 그런데 무섭기도 하고, 지금은 제가 함부로 찾아뵐 수도 없는 것 같아서요…….”
“그러셨군요. 조금만 기다리면 란타나 님을 뵐 수 있을 거예요. 칼로스 님의 방은 여기서 머니, 일단은 제 방으로 모실게요.”
젠의 손에서 열쇠가 빛나며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 그와 동시에 칼로스의 눈동자도 번뜩였다.
그러나 둘의 위치상, 젠은 그 모습을 눈치챌 수 없었기에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칼로스를 자신의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울었더니 목이 말라요.”
“금방 따뜻한 우유를 가져다 드릴 테니 소파에 앉아 계세요.”
“죄송해요, 젠 님. 란타나 님이 아프셔서 바쁘실 텐데 저까지…….”
“그런 말씀 마세요. 칼로스 님을 편하게 모시는 게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젠이 다정하게 말하고는 마실 것을 가져오기 위해 방을 벗어났다.
달칵, 문이 닫혔고 그 직후에 칼로스가 멀쩡해진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한 눈동자를 한 채였다.
“어디다 숨기는 게 좋으려나?”
칼로스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페르테’라는 이름을 가진, 보라색을 띠고 있는 식물이었다.
이 페르테를 젠의 방에 숨겨 놓는 것. 그것이 바로 칼로스가 맡은 역할이었다.
‘네리아 님, 저는 뭘 하면 되죠?’
‘이거 받아요. 페르테라는 식물이에요. 디르케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이름이 젠과 렌이었죠? 칼로스는 이걸, 그 두 사람 중 하나의 방에 넣어 놓으면 돼요.’
‘젠 님이나 렌 님이요?’
‘네. 일반 시녀나 시종은 안 돼요. 디르케의 최측근인 둘 중 하나여야만 해요. 할 수 있겠어요? 그것만 가능하다면, 뒷일은 제가 전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음…….’
남의 방에 몰래 물건을 숨겨 두기. 어차피 같은 서궁에 살고 있으니 쉬운 일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까지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젠과 렌. 두 사람의 방은 항상 잠겨 있었고, 허락 없이 칼로스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으니까. 열쇠를 훔치는 일도 불가능했다.
‘렌 님은 어렵겠지만, 같은 여자인 젠 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랬기에 칼로스는 젠의 방에 들어갈 수 있게끔 작은 연극을 꾸몄다. 란타나를 찾아가려는 듯이, 복도를 서성이며 젠이 나타났을 때 힘든 척 몸을 휘청거린 것이었다.
젠의 방은 란타나의 방과 가까웠지만, 칼로스의 방은 층이 다르다.
젠은 힘들어 보이는 사람을 멀리 있는 다른 방까지 당장 돌려보내기보다는, 근처에 있는 자신의 방에 데려가서 달랠 확률이 높았다.
그리하여 작전 실행의 결과가 이것. 젠의 방에 당당하게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여기가 좋겠어.”
칼로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무거운 옷장 아래에 페르테를 넣어 두었다.
젠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본격적인 수색 작업이 이루어지면 조사관에게 발각될 것이 확실했다.
칼로스가 악의에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며칠 전에 네리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계속 생각해봤는데요. 그 인간, 제가 죽여 버리면 안 되나요? 전 어머니의 복수를 해야 해요. 그 인간의 목을 따고 저도 죽을 거예요.’
‘안 돼요.’
‘왜요? 복수에 손을 더럽혀선 안 된다, 그따위의 말을 하려거든-’
‘란타나는 제가 죽일 거예요.’
‘네?’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칼로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에게 목표가 생겼거든요.’
네리아는 담담한 말투로 그녀의 계획을 입에 담았다.
요정의 영혼이 갇힌 단검으로 란타나를 죽여 100명의 제물을 채운 후, 벨라 일족과 엮인 저주를 없애달라는 소원을 빌 것이라고.
‘…….’
칼로스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어째서 자신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네리아에게 처음으로 벨라 일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칼로스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은 어머니를 되살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네리아에게서 한순간에 스쳐 지나간 쓸쓸한 표정을 보며 그런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외톨이가 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의 눈빛이기 때문이었다. 가족을 잃은 비극을 겪은 건 자신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전부 요정의 저주 때문이잖아.’
그저, 이따위 장난질에 자신처럼 가족을 잃는 사람이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걸 위해서라면 네리아에게 뭐든 협조할 수 있어. 칼로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처음 앉아 있었던 소파에 착석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변해 있었고, 얼마 후 젠이 마실 것을 들고서 돌아왔다.
“칼로스 님, 따뜻한 우유를 가져왔어요. 세상에, 아직도 손이 차갑네요. 어서 드세요.”
“고마워요, 젠 님.”
이제 뒷일은 네리아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니 너도 란타나랑 같이 죽어 버려. 지옥에나 떨어져 버려.
칼로스가 눈앞의 여자를 저주하면서도, 표정만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우유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궁 앞에 도착했더니, 그곳에는 조금 전의 발렌티스 저택처럼 강도 높은 수색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발자국을 더 내딛자, 당연하게도 입구를 지키던 기사에게 제지당했다.
“레이디 발렌티스. 죄송하지만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사고를 당하신 란타나 님께 이걸 드리고 싶거든요. 저희 마법약 제조실에서 만든 특제 기력 회복 약이에요. 효과를 보려면 당장 드시는 게 좋을 거라서.”
이럴 줄 알고 핑곗거리를 가져왔지. 나는 들고 있던 작은 봉투를 기사의 눈앞에 흔들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을 디르케의 회복을 위해서라는 듯이. 게다가 란타나라면, 내 방문 요청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터였다.
“중간에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는 게 찜찜해서 제가 직접 가져다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수색 중이라도 책임자의 허가만 받을 수 있다면 기사의 동행하에 잠깐 출입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고 들었거든요. 안 될까요? 허락받지 못한다면, 저도 더는 바쁘신 분들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일단 여쭤는 보겠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가 안쪽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 돌아와서는 허락이 말을 내뱉었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답변이었다.
“저희 단장님과 디르케 모두 허가하셨습니다. 대신 혹시 모를 불미스러운 일을 방지할 수 있도록, 기사 2명이 디르케가 쉬고 계신 곳까지 동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경.”
미안한 마음을 담아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기사와 조사관들을 귀찮게 만들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마차 사고의 증거물은 서궁 안에서 발견될 터였고, 이제 란타나는 디르케라는 지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될 텐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이 많았지만, 마지막 마무리 정도는 란타나의 얼굴을 보며 짓고 싶었다.
‘미리 인사할게요. 잘 가요.’
나는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가리며 기사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