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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54)화 (154/172)



<154>

‘그리고 다음으로는.’

나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서는 초대장 하나를 찾아냈다.

중립파인 헤론 후작 부인이 주최하는 티 파티의 초대장으로, 디르케의 회임 축하 연회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되도록 참석해 달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당부가 아니더라도, 헤론 부인과는 황태후 폐하의 시녀 일을 계기로 친분을 쌓은 바 있었기에 불참할 생각은 없었다.

바쁘다고 해서 사교계 활동에 아예 소홀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티 파티 참석 준비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찾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헤론 후작가의 저택.

초대객들이 모두 도착하자, 주최자인 헤론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말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티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테이블에는 황태제나 디르케의 파벌과 관계없이 고위급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수도 중립파의 대표이자 사교계에서도 두루두루 발이 넓은 헤론 후작 부인이기에 한 장소에 모을 수 있었던 인원들이었다.

“오늘 티 파티의 목적은 저희 수도 귀족의 친목을 위함도 있지만, 곧 있을 디르케의 회임 축하 연회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예요.”

“연회는 전부 궁내부에서 준비할 텐데, 굳이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있나요?”

헤론 부인의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뾰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황태제파 귀족 중 하나였는데, 헤론 부인을 공격하기보다는 디르케의 연회 때문에 모였다는 사실을 빈정거린 것이었다.

“물론 연회는 궁내부에서 준비할 거예요. 저희가 논의할 문제는, 연회에 가져갈 선물에 관한 것이랍니다. 여기, 디르케에게 받은 선물 리스트가 있어요.”

“선물 리스트요?”

“황족도 아닌 평민 출신 디르케가 그런 걸 만들었다고요?”

황태제파 귀족들에게서 나온 비꼬는 말투에, 헤론 부인이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연회의 주인공이 축하연에서 받을 ‘선물 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란타나의 모함으로 사형당한 황후가 시작한 행동이었다.

황족의 생일 연회 등이 개최될 때, 귀족들은 서로 쓸데없이 선물로 기 싸움을 벌이고는 했다.

예를 들면 경쟁자 귀족이 보석을 준비했을 경우, 일부러 비교되게끔 종류는 같으나 그보다 품질이 더 좋은 보석을 선물하는 식이었다.

황후는 이런 식으로 선물 하나에 치열한 정보전과 견제가 오가는 것에 피로를 느꼈고, 그리하여 아예 선물의 종류가 겹치지 않도록 리스트를 만든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디르케를 황족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어요.”

“황족이 맞으시지 않나요? 디르케의 출신은 평민이어도, 그분의 배에 있는 아기님은 엄연한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족이시잖아요?”

“맞아요. 이건 회임 축하연. 황제 폐하의 후사를 축하하는 자리 아니겠어요?”

“글쎄요, 황제 폐하의 후사인 건 확실하고요? 저는 출산일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테이블 위에서 파벌들 사이에 견제의 발언들이 오갔다.

그러나 티 파티의 주최자인 헤론 부인은 딱히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중립파라는 이유로 이런 역할을 맡은 것 같지만, 자신이 내켜서 한 일은 아니라는 듯이.

아마도 여기에는 넌지시 황제 폐하의 입김이 닿은 게 아니었을까.

“그런데 선물 리스트라니! 역시 디르케의 배려심은 훌륭하군요. 덕분에 선물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아플 시간을 덜었어요.”

“헤론 부인, 리스트를 볼 수 있을까요? 네, 고마워요! 어디… 저는 이걸로 하겠어요. 사파이어로 만든 목걸이로요.”

“저는 이걸로 할게요. 아기용 흔들 침대와 침구 세트를요.”

그러는 사이에 한쪽에서는 디르케가 작성한 리스트가 돌고 있었다.

선물 준비에 적극적인 쪽은 디르케 파벌 귀족들이었기에, 리스트는 그들의 손을 먼저 거친 뒤에 황태제파 쪽으로 넘어왔다.

“자, 다음은 레이디 발렌티스가 고르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부인.”

나는 옆자리에 앉은 귀족 부인에게 종이를 넘겨받았다. 이미 여러 사람을 거친 리스트였기에, 남아 있는 선물의 종류는 적은 편이었다.

말이라든가, 임산부에게 좋은 식자재나 체력 회복에 좋은 약 등.

나 역시 디르케에게 선물까지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축하 연회에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하나는 골라야 했다.

뭐가 좋으려나.

리스트의 아래쪽에 있는 ‘체력 회복에 좋은 약’ 등이 마치 마법약 사업을 운영하는 나를 겨냥하는 것 같았으나, 란타나에게 선물로 먹을 것을 줄 생각은 없다.

황후 폐하와 레오니트의 친모가 란타나에게 케이크를 보냈다가 결과적으로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음식이나 약에 독약을 넣어 란타나를 유산시켰다는 누명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고를 선물은 바로.

“저는 말로 하겠습니다. 마시장을 찾아서, 디르케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닮은 흑마를 준비해야겠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오른쪽에 앉은 부인에게 리스트를 넘겼다.

***

티 파티가 끝난 뒤, 발렌티스 저택으로 귀가하는 동안 마차의 맞은편에 앉은 듀이를 향해 질문했다.

“듀이, 안 자고 버틸 수 있는 날이 며칠 정도 돼?”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 달은 멀쩡할 것 같습니다. 각성한 이후로는 수면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거든요.”

“그래? 체력이 대단하네. 안 자도 멀쩡하다면, 결혼하고 금방 아기가 생길지도 모르겠어.”

“네, 네, 네, 네, 네, 네리아 님?”

진지하게 대답하던 듀이는, 또다시 기습 공격을 받고는 안절부절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네네네네네네리아? 내 이름이 갈수록 길어지는 것 같지 않아?”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 네리아 님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후계자를 만드는 건 귀족의 의무잖아? 이론은 진작 독파했고, 남은 건 실습뿐이야. 발렌티스 가문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린 하루빨리 아기를-”

“으아, 아! 창문 밖에 새가-!”

듀이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치며 내 목소리를 지워 버렸다. 나는 큰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닦아 냈다.

“농담이야. 아무튼 당분간은 다른 때보다 더 저택의 경비에 신경 써야 할 것 같거든. 부탁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네리아 님의 농담만 아니라면…….”

“그렇지만 재밌는데.”

나는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의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 듀이. 마부에게 말 좀 전해 줄래? 저택으로 가기 전에 마법약 제조실에 들렀으면 좋겠다고 말야.”

“세사르 님을 만나시려는 건가요?”

“아니, 이번에는 약이 필요해서. 머리랑 눈 색깔을 바꾸는 약이 많이 있어야 할 것 같거든.”

***

보름의 시간이 흘러, 디르케의 회임 축하 연회 당일이 되었다.

장소는 황궁의 메인 홀이 아닌 황가 소유의 야외 대정원이 되었는데, 이는 디르케의 희망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임신 초기에는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고자 바깥에 나갈 수 없었기에, 안정기가 된 지금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레이디 네리아 발렌티스와 듀이 경이 입장하십니다.”

대정원 입구에서 시종이 외치자, 나는 듀이의 팔짱을 끼고서 정원 안으로 발을 옮겼다.

이번 연회는 건국제 이후로 처음 있는 대규모 파티였기 때문일까, 안쪽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도착한 상태였다.

“보름 동안 꽤 바빴지.”

나는 대정원 내부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듀이가 가져다준 주스를 마시며 괜히 투덜거렸다.

선물이 부실하다는 트집을 잡히지 않고자, 은발의 기사님과 함께 새벽까지 마시장을 돌며 고가의 명마를 구해 왔다.

게다가 란타나 측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칼로스와의 연락 창구를 만드는 일까지. 분주한 가운데 신경을 예민하게 세워야 하는 날들이었다.

“앞으로는 여유가 생길 거예요. 주스 더 가져다 드릴까요?”

“아냐, 됐어.”

한 잔이면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깨끗하게 비워진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들고 있던 말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보통은 선물을 연회장으로 가져오지만, 말은 크기가 커서 황궁까지 다시 가져가기에 번거롭다는 문제가 있다.

그랬기에 흑마는 어제 서궁으로 먼저 보내고, 오늘은 대신 인형을 가져온 것이었다.

“네리아 양!”

연회가 시작될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보내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멀리서 아는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클로이 양.”

“약혼 소식 들었어요. 축하해요! 옆에 계신 듀이 경도요.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그동안 네리아 양이 듀이 경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만 유독 표정이 달라졌거든요.”

“제가 그랬었나요?”

“저희 사이에 모를 수가 없죠!”

그랬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옆에 서 있던 듀이의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기쁜 것도, 수줍은 것 같기도 했다.

“결혼식 때 부케는 어떻게 할 거예요? 전 아직 결혼 계획이 없지만, 네리아 양의 부케를 다른 영애에게 양보할 순 없어요.”

“걱정 마요, 클로이 양. 이미 클로이 양에게 주겠다고 결혼식 계획을 다 세워 놨거든요.”

“역시, 내 친구예요!”

클로이와 함께 즐겁게 수다를 나누는 동안, 듀이는 언제 결혼식 계획이 세워졌냐는 듯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네리아 양은 명마를 선물로 보냈다면서요? 아깝게 왜 그랬어요. 저희 가문은 적당히 체면만 세울 정도의 금액으로만 준비했거든요.”

“뭐, 어쩔 수 없었어요. 값을 치르면서 아깝긴 했지만요.”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클로이까지 옆에 앉아 본격적으로 대화의 문이 열리려던 때, 마침 시종이 커다란 목소리로 황족의 입장을 알렸다.

“저는 부모님이 계신 쪽으로 가야겠어요. 네리아 양, 이따 봐요.”

“알겠어요. 나중에 만나요.”

클로이가 자리로 돌아갔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던 귀족들도 황족을 맞이하기 위해 입을 닫고 거의 동시에 기립했다.

황제는 밝은 얼굴이 되어서는 상석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니나렛이 쫄랑쫄랑 걸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의아한 점이 있다면, 오늘의 주인공인 란타나가 황제와 함께 입장하지 않은 것일까.

“디르케는 준비할 것이 많다고 하여 나보다 늦게 출발하게 되었네. 연회 시작까지는 시간이 더 있으니 모두 편하게 있도록 하게.”

황제 폐하 또한 귀족들의 의문을 알고 있다는 듯, 해답을 내주었다.

그렇지만 일개 정부가 황제보다 늦게 입장하는 것도 용인이 된다는 건가. 디르케와 어렵게 생긴 아이에 관한 총애가 대단할 정도였다.

황제 폐하의 말씀도 있었기에, 대정원은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듀이, 니나렛 전하께 인사드리러 갈래? 그런데 황녀님이 툴툴거리실 수도 있어. 며칠 전 예법 수업 때 약혼했다고 말씀드리니까, 전하께서 ‘선생님이랑 결혼하는 사람은 나야!’ 하면서 엉엉 우셨거든.”

“…왠지 황녀님께 혼날 것 같아서 무서운데요.”

“괜찮아. 나랑 결혼하는 이상, 이겨 내야 할 문제야.”

“알겠습니다.”

듀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니나렛은 뾰로통한 얼굴로 내가 있는 쪽을 노려보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애써 웃음을 참고는 듀이와 함께 자리를 옮기려던 때였다.

“폐하! 폐하-! 긴급 상황입니다!”

대정원의 입구가 갑작스레 시끄러워지더니, 기사 한 명이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황족이나 최고위급 귀족들이 모인 장소이건만, 기사는 그에 개의치도 않은 채 뛰고 있었다. 그와 부딪친 값비싼 장식물이 넘어질 정도였다.

“폐, 폐하. 폐하. 디르케께서-”

“경, 말을 하게. 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는 건가?”

“디르케께서, 디르케께서 오시는 동안 마차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황궁의의 말로는, 사고로 아이가 유산된 것 같다고…….”

“뭐라고? 그 말이 사실인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방금까지 소란스럽던 대정원이 찬물을 맞기라도 한 듯 얼어붙었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충격을 받아 의자에 반쯤 쓰러진 사이에, 어째서인지 대정원으로 들이닥친 기사들이 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네리아 발렌티스. 마차 사고의 용의자로 잠깐 모시겠습니다.”

“용의자라고요? 제가요?”

내가 죄인이라도 되는 듯이, 정확히 나를 지명하는 기사를 향해 되물었다.

역시, 조용히 지나가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했지?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는 없었기에, 입가에 떠오르려는 비웃음은 조용히 숨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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