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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셀프입니다 (153)화 (153/172)



<153>

“…칼로스 양? 그 칼을 본 적이 있다고요? 정말요?”

“네. 생김새가 특이해서인지 아직 기억에 남아 있어요. 음, 그러니까 그 단검이 말인데요.”

칼로스가 할 말을 정리하려는 듯이 잠시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손잡이에 보석 100개가 박혀 있다고 했죠? 처음 봤을 때는 분명 흰색 보석이 2개, 나머지가 붉은색이었어요. 그래서 저 칼을 만들 때 붉은색 보석이 부족했던 걸까,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칼로스 양?”

“몇 달 뒤에 보았을 때는 흰색 보석이 1개뿐이었어요. 나머지 99개는 붉은색이었고요. 이상하죠? 바꿀 거면 둘 다 바꾸지, 왜 하나를 남겨 둔 건지……. 그런데 네리아 님이 주신 글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

“…….”

칼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머릿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임이 확실했다.

붉은색 보석의 숫자는 제물로 희생된 일족의 수와 같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란타나가 숫자를 전부 채우기까지 남은 희생양이 1명뿐이라는 거야……?’

오싹- 등골이 서늘해졌다. 란타나는 이미 목표인 100명을 전부 확보했다는 말이 되니까.

만약 내가 그녀와 같은 편이 되었다면 남은 1명의 희생양은 칼로스가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칼로스가 17살이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고 내가 란타나의 제안을 거부한 이상, 그녀가 노리는 사냥감은 바로-

‘나겠군.’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심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란타나에게 끌려가게 될지도. 안전을 위해서라도 듀이와는 절대 멀어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 란타나 님이 정말 우리 엄마를 죽였다는 거야? 그분이 나한테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한편, 칼로스는 반쯤 넋을 놓은 채 양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오갈 데 없이 흔들리는 동공이 그녀가 느끼고 있을 혼란을 짐작게 했다.

“란타나 님이, 란타나 님이…….”

“…….”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진심으로 신뢰하며 따랐던 자가 사실은 제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마저 죽일 작정으로 데려왔다니. 믿기지 않겠지만, 이건 칼로스 본인이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용서 못 해.”

어느새 칼로스의 눈이 분노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용서 못 해. 죽일 거야.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우리 엄마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칼로스 양, 화내는 건 좋지만 울지는 말아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으면, 호위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할 거니까요.”

“…알겠어요.”

얼핏 냉정하게 들릴 발언이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슬프지만 현실은 현실이었고, 괜한 위로는 쓸데없이 눈물을 뽑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칼로스 역시 내 말을 이해한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참았다.

“제가 뭘 하면 되나요?”

“칼로스 양의 역할은 필요할 때 알려 주도록 할게요. 우선은 저와 손을 잡겠다는 말로도 충분해요. 그런데 혹시 그 단검 말인데요, 본 적이 있다면 란타나가 모르게 빼돌릴 수는 없을까요?”

“솔직히 그건 자신이 없어요. 란타나 그 사람의 방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거든요…….”

칼로스의 목소리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하기야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란타나가 허술하게 보관할 리는 없을 테니, 훈련받은 자객도 아닌 칼로스가 훔치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저기, 그런데 네리아 님.”

“네?”

“99명을 채웠고 남은 게 1명뿐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제가 그 칼로 그 여자를 죽여서 희생자 100명을 채우게 된다면, 소원을 빌어 저희 어머니를 되살릴 수도-”

“…….”

“아뇨,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칼로스가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린 건지, 무언가를 참기라도 하는 듯이 눈을 꼭 감았다.

착한 소녀였다.

확실히, 일족 100명을 제물로 소원을 빈다면 죽은 사람조차 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걸로 이룰 수 있는 소원은 한 가지뿐. 란타나를 죽인다고 해도 되살릴 수 있는 사람은 1명밖에 안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부모님을 잃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니, 칼로스는 자신의 어머니만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버린 것이다. 사람인 이상 욕심이 나는 게 당연할 텐데도.

나는 손을 뻗어 칼로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는 힐끔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그녀의 호위 기사가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협력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제 쪽에서 연락을 보낼게요. 당연하지만, 칼로스 양이 저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 주세요. 란타나와 그쪽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이요. 알겠죠?”

“네. 걱정하지 마세요.”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는 비밀 유지가 필수다. 칼로스의 기사에게 들키지 않고 휴게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칼로스 양.”

칼로스는 울지 않았지만, 아직도 붉어져 있는 눈이나 딱딱해진 표정이 신경 쓰였다.

혼자 휴게실에 머무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서궁의 기사가 추측할 만한 빌미를 남겨선 안 되었다.

칼로스의 기분 전환을 위해 짧은 잡담이라도 해야겠군. 그렇게 결정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칼로스 하스켈이라는 이름은 란타나가 지어 준 거죠? 칼로스 양의 본명은 뭔가요?”

“본명이요?”

본명 정도야 뒷조사로 이미 알고 있지만, 어차피 이 대화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니까.

전혀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려서인지 칼로스의 표정도 아까보다 풀어진 것 같았다.

“‘메리’예요. 메리골드 꽃에서 따온 이름이거든요.”

“메리골드의 메리?”

그랬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 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러자 칼로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왜, 왜 그런 반응이에요? 제 이름이 이상해요?”

“그게 아니라 잘 어울려서요. 사실 칼로스 양을 처음 봤을 때, 주황색 머리에 눈이나 드레스는 녹색이어서인지 메리골드 꽃이 생각났었거든요. 잘 지은 이름이에요.”

“그, 그렇죠? 저희 어머니가 지어 주신 이름이거든요……!”

그녀가 활짝 웃었다. 지금껏 처음 보는 소녀다운 미소였다.

***

집무실에 앉아 팔걸이를 두드렸다. 칼로스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건 좋은 수확이었다.

물론 그녀는 란타나 측의 주요 인력이 아니었기에 고급 정보까지 빼돌리는 건 불가능했지만, 서궁의 내부자를 포섭한 일은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란타나가 이미 99명의 희생자를 채웠다는 것. 그건 확실히 중요한 정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

나는 말없이 자비에의 번역서를 읽어 내려갔다. 여기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바로, 일족들이 벨라의 영혼이 갇힌 칼을 어떻게든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전부 실패했고, 칼을 없앨 방법이 없었다는 것.

소원을 이루어 주는 칼의 존재는 저주 그 자체였다.

저주의 고리를 끊고 가까운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칼을 없애고 싶었을 텐데, 방법이 없다니.

그렇지만 칼로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란타나를 없앤 뒤, 100명을 전부 채워 ‘문제의 칼과 함께 이 모든 저주를 없애 달라’는 소원을 빌면 되지 않을까? 라고.

하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이 방법을 쓰지 못한 이유는 알 것 같다.

칼이나 저주를 없애고 싶은 사람은 그것만을 위해 타인을 죽이고 싶지 않았을 테고, 이기심으로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소원에 욕심을 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어와요.”

“네리아 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마법사의 얼굴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세사르 님. 그런데 오늘따라 표정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렇습니까? 사실 오늘 제 마탑 동기인 미첼을 만났거든요.”

“미첼? 미첼 경이라면 혹시 황제 폐하의 호위 마법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리아 님도 미첼을 아십니까? 하기야 황제 폐하의 호위면 제국에서도 유명하겠죠.”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리가 없지.

듀이의 기사 시험 때였던가. 미첼 경에게는 계획적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패밀리어인 초록새를 이용해서였다.

“그런데 미첼 경이 세사르 님과 동기였군요?”

“네. 제 동기들은 대부분이 저를 괴롭히는 쓰레기였지만 미첼은 그나마 괜찮은 놈이었거든요.”

세사르가 가볍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세사르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오늘 오전 미첼 경이 마법약 제조실로 그를 찾아왔었다고.

미첼은 마탑 시절에 동기들의 괴롭힘을 적극적으로 막아 주지 못한 일을 세사르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저로서는 절 괴롭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고마웠지만요. 어쨌거나 미첼이 고개 숙여 사과하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돕겠다고 하더군요. 네리아 님, 혹시 미첼을 부려 먹을 일이 있으면 제게 말씀하시죠!”

“네, 기억해 두고 있을게요.”

아는 사람이어서일까, 둘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다고 폐하의 호위 마법사를 진짜 부려 먹을 순 없겠지만.

“그런데 오늘은 어떤 일로 찾으셨습니까?”

“코르를 이용해 약을 만들고 싶은데요.”

“코르라면 네리아 님이 못 드시는 채소잖아요? 알레르기 약을 다시 만드시려는 건가요?”

“아뇨, 반대예요. 코르를 농축시켜 알약으로 만드는 거예요.”

책에 따르면, 벨라 일족은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코르를 독약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타인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처음 봤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란타나가 마지막으로 나를 죽이면 게임이 끝나 버린다. 코르를 농축한 알약은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일을 대비해서 만들게 한 것이다.

‘휴대용으로 상비약처럼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거지.’

약을 쓸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만약에라도 란타나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적어도 희생양은 되지 않게 스스로 죽겠다고.

게다가 코르는 벨라 일족에게나 위험하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흔히 먹을 수 있는 채소였다.

황궁에 독약을 휴대하고 다녔다가 타인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암살 목적이 아니겠냐는 의심을 사겠지만, 코르는 그런 문제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네요.”

세사르는 내일 당장이라도 만들어 오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황궁의 궁내부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란타나의 회임을 축하하고자, 얼마 후에 궁내부 주재로 성대한 연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폐하께서 란타나의 부탁을 두 번이나 거절하셨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사랑하는 디르케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의도겠지만.

‘기대되는군.’

어쩐지 조용히 지나가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조소하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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