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은 셀프입니다 (152)화 (152/172)



<152>

가게 내부에는 값비싼 옷을 입은 남자가 진열장에 전시된 액세서리를 천천히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남자의 정체는 루체테를 통해 섭외해 온 전문 인력으로, 오늘은 공갈 협박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있는 자였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칼로스의 호위 기사가 있는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두 남자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툭- 그러고는 두 사람이 부딪치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우리 쪽 사람이 충돌을 유도한 것이었다.

“아니, 이 사람이-! 보아하니 기사 같은데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겁니까?”

“이런, 실례를 했습니다.”

“당신이랑 부딪치는 바람에 장신구에 쓸려 내 옷이 찢어졌잖아요! 어떻게 보상할 겁니까? 눈이 달렸으면 똑바로 걸어 다녀야지!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방금 사과의 말씀도 드렸는데, 말이 심하신 것 같습니다.”

“이 옷은 서부에서만 극소량 생산되는 희귀 직물로 만든 것으로, 나도 어렵사리 원단을 구해 만든 옷인데 당신 같은 기사 나부랭이가 보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기사 나부랭이? 그쯤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모시는 주인이 누구인지나 알고 이렇게 건방지게 구는 겁니까?”

“누구? 누군데요? 당신이야말로 내가 누군 줄 알고-!”

두 사람의 언쟁으로 보석 상점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칼로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눈을 토끼처럼 뜨고 있었고, 가게의 점원들이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고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손님들에게 방해가-”

“당신이야말로 방해하지 마!”

“고객님,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중재 자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부디 이쪽으로.”

“크흠.”

남자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팔짱을 끼었고, 기사는 일이 성가시게 되었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는 칼로스에게 다가갔다.

“칼로스 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돌아올 테니, 개인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으시겠습니까?”

“그럴게요. 저도 계속 구경하느라 마침 다리가 아픈 참이었거든요.”

그리하여 이번 소동의 관련자들이 각각 점원을 따라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루체테의 사람과 기사는 1층의 가게 사무실로, 칼로스는 2층의 개별 휴게실로.

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사는 금방 돌아온다고 말했으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섭외한 남자는 워낙 화술이 대단한 자였기에, 최소한 30분은 붙잡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도 움직이도록 할까.’

나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고는 듀이와 함께 아닌 척 칼로스의 뒤를 따라갔다.

***

듀이의 역할은 만약을 대비하여 휴게실 안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듀이를 입구에 대기시켜 놓은 뒤, 칼로스가 있는 작은 휴게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죄송하지만 이미 사람 있어요. 다른 곳으로 가 주실- 어?”

칼로스는 가게 측이 마련해 준 간단한 다과를 먹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갸웃거렸다.

“낯이 익은데, 저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칼로스 양. 이렇게 하면 알 것 같죠?”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약을 들이켰다. 그러자 마법약의 약효가 곧장 사라지며, 갈색이었던 눈이 다시 분홍색으로 되돌아왔다.

“다, 당신은 네리아 발렌티스?”

“정답. 잠깐 앉아도 되죠?”

“아뇨, 안 돼요! 당신은 란타나 님의 적이잖아요?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당장 나가지 않으면 소리를 지를 거예요!”

“디르케의 적은 맞지만 칼로스 양의 적은 아닌걸요? 오히려.”

칼로스를 향해 빈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해칠 도구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칼로스 양이 꼭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해 주러 온 거죠. 들어도 손해 볼 일은 없을 텐데, 어때요?”

“…….”

그녀는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으나 거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칼로스의 맞은편에 재빠르게 착석해 자리를 잡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본론부터 말할게요. 란타나는 저뿐만이 아닌 당신에게도 적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손을 잡도록 해요.”

“다짜고짜 이간질인가요? 나보고 란타나 님을 배신하라고?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안 통해요. 란타나 님은 저에게 은인이시거든요.”

“은인? 그 인간이 은인?”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화를 내는 칼로스를 보며 웃었다.

“칼로스 양은 황제 폐하의 정부가 되는 게 꿈이죠? 그래서 저를 처음 만났을 때 경계했잖아요.”

“…….”

“그런데 왜 폐하의 정부가 되고 싶은 거예요?”

“왜냐고요?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당신 같은 타고난 귀족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죠! 배운 것 없는 평민 출신 여자가 출세할 방법은 그것뿐이거든요!”

“출세라는 건, 칼로스 양도 권력을 원한다는 거죠? 어째서 권력을 원하는 거예요?”

“아까부터 쓸데없는 소리만-”

“남부의 세틀렉 백작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 그걸 어떻게 당신이……!”

세틀렉 백작.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 칼로스의 얼굴이 새햐얗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뭐, 처음에 독기 품은 눈을 보면서 사연이 있겠다고는 예상했지만.’

란타나의 최측근인 시녀나 시종과 달리 칼로스는 죽일 목적으로 데려온 소녀였다. 그런 만큼 그녀의 뒤를 캐는 것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칼로스의 어머니가 세틀렉 백작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했지?’

진부한 이야기였다.

욕심 많은 배불뚝이 귀족이 아름다운 평민 여성을 강제로 취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성은 그를 거부했고, 이를 괘씸하게 여긴 귀족이 평민 여성을 죽여 버렸다는.

“내 뒷조사를 한 거예요?”

“네.”

“뻔뻔해!”

칼로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도대체 평소에는 어떻게 숨기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원한과 독기에 찬 눈동자였다.

“그리고 그걸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내 앞에서 그 죽일 놈의 이름을 태연하게 꺼낼 수 있어? 귀족들 눈에는 평민이 사람도 아닌 장난감 따위로 보이는 거죠? 그렇죠?”

“손을 잡자고 한 건 나니까, 사소한 무례는 눈감아 줄게요. 그런데 칼로스 양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 세틀렉 백작이 확실해요?”

“당연하지! 내가 봤다고! 내 어머니가 세틀렉 백작의 성에서 죽어 있었단 말이야! 심장을 칼에 찔린 채로!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의 시체를 보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신이 알아?”

“…….”

“어머니를 따라서 죽으려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란타나 님이에요. 내가 세틀렉 백작에게 복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요.”

그 절대적인 믿음이 담긴 눈이 오히려 안타까웠다. 기만당하는 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인지 알고 있으니까.

“…세틀렉 백작이 아니에요. 이런 말,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백작은 칼로스 양의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뭐라고요?”

“칼로스 양은 곧바로 란타나를 따라 수도로 왔기 때문에 모르겠죠. 백작은 칼로스 양 어머니의 시신을 가문의 묘지에 묻었어요. 그리고 열흘에 한 번씩은 꽃을 들고 찾아간다고 했어요. 보통 자신이 죽인 상대에게 그렇게까지 하나요?”

“거짓말, 그럴 리 없어! 그렇다면 내 어머니를 죽인 사람은 대체 누구라는 거야?”

“이미 힌트는 드렸어요. 제가 말했죠? 란타나는 당신에게도 적이라고요.”

“네?”

칼로스는 내 이야기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으나, 곧 이해하게 되었는지 더 심하게 얼굴을 구겼다.

“허, 헛소리 말아요! 란타나 님이 내 어머니를 왜 죽였다는 거야? 그분께는 그럴 이유가-”

“말하자면 제물이죠. 우선 이거부터 읽어요. 그러면 칼로스 양도 전부 알게 될 거예요.”

탁-

품속에서 두 번 접힌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아네모네 궁에서 얻은 책을 번역한 요약본이었다.

“내가 왜 이걸…….”

“시간이 지나면 칼로스 양의 호위 기사가 돌아올걸요? 늦기 전에 읽는 게 좋을 거예요.”

“당신,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칼로스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류를 낚아채서는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서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칼로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죠? 벨라 일족? 제물? 소원? 설마, 이런 소설을 믿으라고 가져온 건 아니죠?”

“칼로스 양은 자신이 폐하의 정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당연하죠! 저보다 예쁜 사람은 남부를 넘어 수도에서도 본 적이 없는걸요? 물론, 당신이나 란타나 님 두 명은 제외하고지만…….”

“끝부분은 칭찬 같으니까 고맙게 들을게요. 그런데 칼로스 양은 절대 정부가 될 수 없어요. 란타나가 미인 수집으로 데려온 사람, 당신이 처음이 아닌 건 알고 있죠? 그럼 그전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 그거야!”

“한번 잘 생각해 봐요.”

“…….”

“칼로스 양은 몇 살이에요?”

“…15살인데요.”

“그럼 2년도 남지 않았네요. 목숨이 붙어 있을 날이요.”

나는 이 세계의 네리아의 기억을 엿보았던 때를 회상했다.

란타나의 시녀가 네리아를 찾아온 날은 내가 17살이 되던 생일날이었다. 그리고 레고트 백부가 네리아를 저택에서 내쫓지 않은 이유도 란타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아마 벨라 일족이 제물이 되는 데에는 17살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을 거야.’

그러니 란타나는 17살 이상의 일족은 바로 죽여 버렸고, 나이가 어린 일족은 17살이 될 때까지 가까운 곳에 두고서 지켜본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저나 칼로스 양은 입장이 비슷해요. 어머니는 란타나에게 살해당했고, 딸인 우리는 나이가 될 때까지 살려 두고 있었던 거잖아요?”

“어… 네리아 님도 어머니가 안 계신 건가요?”

“네. 아버지도 없어요. 사고사를 위장해 살해당하셨거든요.”

“그, 그러셨군요. 몰랐어요……. 네리아 님은 지금까지 부모님께 사랑만 받고 자라신 것 같았거든요.”

그럴 목적은 아니었는데 칼로스의 기세가 눈에 띄게 수그러들었다. 아직 나를 전부 믿지는 못하겠지만, 둘 다 부모를 잃었다는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 그런데 잠깐, 여기에 나오는 칼 말인데요…….”

“벨라의 영혼이 갇혀 있다는 칼 말이죠?”

그때였다. 서류를 다시 읽고 있던 칼로스가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희미하게 떴다.

“저, 이렇게 생긴 칼을 서궁에서 우연히 본 적이 있어요. 손잡이에 100개의 보석이 박힌 단검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