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거짓-”
“거짓말이라고 하면 화낼 거야. 나는 진심이야.”
“아… 저, 저는…….”
듀이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상태가 되어서는 한참 동안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나 놀랐을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나는 듀이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런 식으로 20분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네리아 님.”
드디어 듀이가 입을 열었다. 새빨개진 얼굴색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네리아 님은 정말 저랑 결혼하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실 건가요?”
“그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네. 괜찮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말해 줘. 대화하는 것만으로 풀 수도 있는 쉬운 문제일 수도 있잖아?”
“…네리아 님은, 황태제 전하와 결혼하셔서 다음 대의 황후가 되실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그런 근거도 없는 뜬소문을 설마 듀이까지 믿는 건 아니지?”
“…디르케가.”
그놈의 황태제비 자리. 당사자인 나는 원하지도 않는데 얼마나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건지 솔직히 지겨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듀이가 마지막에 꺼낸 호칭에는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란타나의 이름이 왜 나와?
“디르케가 그렇게 말했어요. 제가 생각해도 네리아 님은 황후 자리에 적임일 것 같지 않냐고요.”
“설마… 황궁 회의가 끝나고 만났을 때를 말하는 거야? 디르케가 그런 소리를 했어?”
나는 한숨을 참으며 그날의 일을 회상했다.
란타나가 임신 사실을 발표했던 회의가 끝난 후. 그녀가 바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듀이에게 접근했던 일이 있었다.
‘듀이! 디르케가 왔다 간 걸 봤어. 아무 일 없었어? 뭐라고 시비를 걸지는 않았어?’
‘별일은 없었어요. 그냥, 저번 일이 미안했다면서요.’
그게 다인 줄 알았더니, 쓸데없는 수작질까지 했었군.
‘혹시 황태제 전하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귀가하고 있을 때, 듀이가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싶었더니.
‘이 망할 인간. 레오니트가 다음 대 황제가 되도록 지켜볼 생각도 없는 주제에.’
그런데도 란타나가 듀이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듀이가 나에게 거리감을 느끼도록 만들 목적이었겠지.
게다가 단순한 말 한마디뿐이다. 먹히든 먹히지 않든 그녀로서는 아무런 손해도 없는. 정말이지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오해 사기 싫으니까 다시 한번 말해 줄게. 황태제 전하와는 단순한 주군과 신하의 관계일 뿐이고, 나는 황태제비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어.”
“하지만 황후란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잖아요.”
“그래서?”
“저, 네리아 님이 저를 좋아한다고 말씀해 주셨을 때 기뻤어요. 너무 행복한 나머지 심장이 터져서 죽어 버리는 줄 알았어요.”
“반가운 우연이네. 나도 너한테 고백했을 때 비슷한 상태였거든. 그런데 뭐가 문제야?”
“…후회하실까 봐요.”
“…….”
“훗날에, 어릴 때의 감정에 판단을 그르쳐서 제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놓쳐 버렸다고. 네리아 님이 그렇게 후회하시는 날이 온다면.”
“…….”
“저는 죽고 싶어질 만큼 저 자신을 원망하게 될 거예요. 저는 네리아 님의 발목을 붙잡는 장애물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내 발목을 붙잡아?”
말도 안 되는 발언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 정말이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순진하기 짝이 없어.
“듀이.”
“…….”
“너는 왜 내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는 거야? 뭐,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한 발자국 걸어갔다. 그와 나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네가 디르케의 별궁으로 납치당했을 때 말이야. 그날 내가 무슨 심정으로 널 찾으러 갔는지 너는 모르지? 그래, 당연히 모를 거야. 알았으면 장애물이라는 말 따위는 절대 하지 못했을 테니까.”
한 발자국을 더 걸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을 조금만 뻗어도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내가 후회하는 건 너를 잃어버렸을 때, 그 외에는 없어. 이해했으면 날 후회하게 만들지 마.”
“네리아 님…….”
“설마 아직도 ‘저에게는 네리아 님의 반려가 될 자격이 없어요.’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그, 그건!”
정답이었는지, 듀이가 펄쩍 뛸 것 같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선수 치기를 잘했어.
“나 말이야. 아까 가문 회의가 있었을 때, 가신들 앞에서 듀이 경과 결혼하겠다고 말했거든? 그런데 네가 내 배우자로서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가신분들이요?”
“응. 그리고 할머니께는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분명 반대하지 않으실 거야. 장담할게. 할머니는 내 편이시거든.”
“…….”
“너에게 자격을 운운하는 사람은 듀이 너, 스스로뿐이야. 알겠어?”
“…알겠습니다.”
듀이는 드디어 마음속의 짐을 떨쳐 버릴 수 있었는지,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들고 있던 분홍색 장미꽃을 내밀었다. 아까는 전해 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럼 이거 받아 줄래? 지금은 겨우 꽃 한 송이뿐이지만, 디르케와의 일이 정리되면 나중에 다시 멋있게 청혼할 테니까-”
“아니요.”
부정하는 말에 순간적으로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듀이는 내가 내민 장미꽃을 소중하게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웃었다.
행복함에 행복함만을 덧붙인 햇살 같은 미소였기에, 바라보던 내가 순간적으로 넋을 잃을 정도였다.
“네리아 님.”
그리고 듀이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청혼. 다음에는 제가 하겠습니다.”
“…응.”
기뻤다.
어디선가 천사들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기대하고 있을게.”
내가 서 있는 곳은 분명 평범한 훈련장이었건만, 지금 이 순간은 이 장소가 동화 속의 공중 정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
다음 날.
어제 일로 너무 기분이 붕 뜬 나머지 침대에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일까. 거울을 보니 눈 밑이 거뭇해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눈빛이나 얼굴에서는 생기가 넘치는 것이 묘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어제부터 들떴던 마음이 아직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고.
‘청혼. 다음에는 제가 하겠습니다.’
귓가에 또다시 듀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소리 없는 비명을 내뱉었다.
듀이가 내 기사인 것도 같은 저택에서 함께 지내는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연인이라는 관계 하나가 더해진 것만으로 이렇게나 마음이 설렐 수 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청혼할걸.”
다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서는 어제 듀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네리아 님? 얼굴이, 얼굴이 너무 가까운 것 같습니다!’
‘왜? 여기서는 맹세의 키스를 해야 할 타이밍이지 않아? 어서 눈 감아.’
‘하지만 네리아 님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으셨고!’
‘어린애들도 뽀뽀 정도는 하거든?’
‘조만간 네리아 님이 성인이 되시는 생일이니, 그때……!’
‘쳇. 듀이는 너무 고지식해. 기사들은 다 그래?’
뭐. 나에게 고백을 들은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는데, 여기서 더 나아갔다가는 듀이의 정신이 위험해질 것 같아서 일단 물러서기는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그때라고 했지? 어디 두고 보자. 그렇게 벼르며 콧김을 내뿜고 있을 때였다.
“네리아 아가씨.”
문이 열리더니, 사샤가 작은 유리병 몇 개를 가지고 들어왔다.
“곧 번화가로 출발하실 시간이에요. 이건 눈 색깔을 바꾸는 약, 그리고 이건 머리카락 색깔을 바꾸는 약이에요.”
“고마워.”
나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어제 일은 기뻤지만,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까.
사샤에게 받은 약을 한 번에 들이켜자,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갈색으로 변했다. 길거리에서 자주 마주칠 법한 평범한 색깔이었다.
“그럼 다녀올게!”
간단하게 변장을 끝내고 방을 나섰다.
바깥에서는 듀이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는데, 그 역시 눈에 띄는 은발을 가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갈색으로 바꾼 채였다.
“안녕하세요, 듀이 발렌티스 경. 꼭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반가운 마음이 드는군요. 오늘 호위도 잘 부탁드리겠어요.”
“듀, 듀이 발렌티스요?”
아까까지만 해도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듀이는 내 기습 공격에 허를 찔린 얼굴이 되어 버렸다.
“결혼하면 같은 성을 쓰게 될 텐데, 미리 적응하면 좋지 않아?”
“하지만 아직은…….”
“듀이는 너무 보수적이야. 나는 어젯밤에 손자들 이름까지 이미 생각해 뒀단 말야. 음, 그런데 손자가 생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아이가 있어야 할 텐데,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지 알지?”
“…….”
듀이의 얼굴이 폭발하는 화산처럼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역시, 듀이를 놀리는 일이 제일 유쾌하다.
***
굳이 변장까지 하며 번화가를 방문한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바로, 란타나가 미녀 수집으로 데려온 칼로스 하스켈을 비밀리에 만나기 위해서였다.
‘적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적진의 내부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몹시 도움이 되지.’
라일라를 손쉽게 치워 버릴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직속 하녀인 베키를 내 편으로 포섭했기 때문이 아닌가.
레오니트가 가져다준 정보에 따르면, 남부 출신인 칼로스는 수도 적응을 이유로 일주일에 한 번씩 호위 기사와 함께 번화가로 외출을 나간다고 했다. 마침 그게 오늘이었고.
덕분에 다른 날을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나는 사냥감을 노리는 사자 같은 기세가 되어서는 번화가의 호화로운 보석 상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우선은 구경만 하고 필요하면 부르도록 할게요.”
나에게 붙은 점원을 떼어 낸 뒤, 조심스럽게 상점 안을 살펴보았다.
가게 내부에는 나나 듀이 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목표물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북쪽 방면에서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칼로스 하스켈이 진주 귀걸이를 구경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로스와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녀를 따라온 호위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자, 그렇다면.’
칼로스와 차분히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호위 기사를 치우는 것이 먼저겠지?
나는 씩 웃으며, 이 자리에 있는 또 다른 일행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