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왜라니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네리아 님이시라면, 후작가 이상의 명문가 출신 영식과 혼인하여 가문 간의 인맥을 탄탄히 하는 것이 저희 발렌티스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주가 되실 네리아 님께 필요한 배우자는 기사가 아니라 네리아 님을 외조해 줄 귀족 영식입니다. 적극적으로 사교 활동을 할 수 있는 분 말입니다.”
“맞습니다! 부디 저희 가문을 위해서라도 생각을 바꿔 주십시오!”
“대부인께서도 반대하실 겁니다!”
회의실 테이블 곳곳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기색으로 팔짱을 꼈다.
“그건 동의하지 못하겠어요. 우선 할머니는 제 결정을 반대하지 않으실 테고.”
“네리아 님!”
“다음으로, 저희 아버지는 권력이라고는 없는 시골 출신 하급 귀족인 어머니와 결혼하셨는데도 가문을 발전시키셨어요. 그런데 제 백부님은요? 백부님이야말로 좋은 가문 출신인 백모님과 혼인하셨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던가요?”
“그, 그거야…….”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듀이 경은 대륙의 모든 자들이 탐낼 만한 최고의 기사예요. 그런 듀이 경을 붙잡기 위해서는, 가주인 저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 아닌가요?”
“물론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듀이 경이라면 굳이 혼인이 아니더라도 네리아 님을 절대 배신하지 않을 텐데요.”
“저도 동의합니다. 듀이 경은 이미 발렌티스 가문에 충성하는 자이니, 네리아 님은 혼사를 통해 다른 가문과 연을 만드시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요? 굳이 혼인이 아니더라도 듀이 경이 저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라. 확실해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네리아 님은 듀이 경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믿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일은 확실히 해 두면 좋잖아요. 제 생각은 그래요.”
“그렇지만-!”
“그런데 경들은, 방금 발언에 책임질 수 있으시겠어요?”
“예?”
“듀이 경이 만약 다른 가문이나 국가에 스카우트라도 받아서 발렌티스 가문을 떠나기라도 하면, 그 일을 책임지실 수 있겠어요?”
“…….”
책임 소재를 들먹이면 어쩐지 부정하거나 회피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역시나 그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내가 반대한 자들의 이름을 외워 두겠다는 눈빛으로 가신들을 둘러보자, 사람들이 내 눈을 피했다.
“그렇죠? 욕심이에요, 욕심. 과하게 탐욕을 부리다가 손에 들고 있던 것까지 잃어버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죠.”
“하, 하지만 네리아 님.”
“아직도 반대하는 사람이 남아 있어요?”
“이건 귀족들 사이에 암암리에 오르내리고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뭔가요?”
“그… 네리아 님께서 황태제 전하와 혼인하여 황태제비가 될 확률이 유력하다는 소문이 수도 내에 퍼지고 있습니다.”
“…….”
“그런 기회가 올 때를 대비해서라도 네리아 님은 미혼으로 남아 계시는 게 좋지 않으실는지…….”
“아, 그 소문이요?”
나 역시 들은 바가 있기는 있다.
황태제와 디르케가 거의 공식적으로 적대 관계가 된 이후로, 자신의 딸을 황태제비로 만들려던 란타나 파벌 귀족들이 황태제와 선을 긋기 시작했다.
거기에 내가 레오니트와 가깝게 지내고 있으니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 것 같지만.
“황족이 된다는 건 커다란 영광이란 걸 알아요. 그런데 저는 황태제 전하와 그런 식으로 엮일 생각이 조금도 없어요.”
“어째서 그런 말씀을-!”
“발렌티스 가문은 제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이에요. 그러니 저는 이곳을 떠나기보다는 여기서 가문을 더 좋게 만들고 싶어요.”
기울어지는 가문을 다시 일으킨 나에게는 가신들의 입을 강제로 다물게 할 충분한 권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가 이기심의 발로가 아닌, 가문의 발전을 위한 의견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가신들을 찍어 누르기보다는 진심이 담긴 축하를 받고 싶었다. 그들과는 발렌티스를 이끌며 몇십 년을 더 부대낄 테니까.
“알겠습니다. 저는 네리아 님의 의견을 지지하겠습니다.”
“로이엔 경……!”
“네리아 님은 그동안 외롭게 자라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서는 가문의 이익을 따지기보다, 결혼 정도는 원하시는 분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시나 이곳에서 가장 먼저 내 편이 되어 준 가신 로이엔 경은, 이번에도 내 편이 되어 주었다.
“로이엔 경, 선수를 치다니! 네리아 님, 저는 끼어들지 못했을 뿐이지 아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베른 경까지.
두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남은 가신들은 서로를 돌아보기만 할 뿐, 항의의 말을 내뱉는 사람이 없었다. 개중에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반대하는 분이 있나요?”
“아닙니다. 저희도 네리아 님을 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고마워요.”
조금 전과는 다른 긍정적인 분위기가 들어섰다. 회의실 안에 마치 훈풍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
‘이제 듀이에게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나는 방으로 돌아가 듀이에게 받았던 나비 머리핀을 꺼내 머리카락에 꽂았다. 처음에는 자주 사용하다가도, 나중에는 닳기라도 할까 보석함에서 아끼던 것이었다.
나는 후욱,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쨌거나 청혼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운 배경과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 예쁜 꽃다발이 함께할 거라는 로망이 있다.
그렇지만 듀이가 강제로 북부로 차출될 위기에 처한 지금은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준비할 시간이 없다.
일 처리는 한시라도 빠른 편이 좋았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꽃병에 들어 있던 분홍색 장미꽃 한 송이를 꺼내 들었다.
‘청혼이 너무 소박하고 성의가 없는 것 같아서 아쉽지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다음에 시간이 여유로울 때 제대로 벌충하도록 해야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듀이가 있는 훈련장을 향해 걸어갔다.
한 발짝, 두 발짝.
같은 저택 내인데도, 어쩐지 주변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긴장돼.’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각종 생각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니, 결혼식은 약식으로 해야겠지? 대신 란타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자축의 의미로 다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야겠어. 부케는 클로이에게 주고.
그리고 아기는 적어도 두 명은 낳는 게 좋으려나? 그렇다면 이름은 어떻게 하지? 듀이와 내 이름을 따서 듀리아와 네이?
그리고 태어나는 아기들의 눈 색깔이나 머리카락 색깔은 어떻게 될까?
듀이가 지금은 은발이라도 예전 머리카락은 갈색이었으니, 아기도 갈색 머리로 태어나지 않을까?
그러면 주워 온 아기라서 부모님과 머리카락 색깔이 다르다고 놀려야지. 재미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인 훈련장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흠흠.”
이 너머에 듀이가 있다.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들고 있는 장미꽃을 손으로 꽉 쥐고서 훈련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니, 발을 들이려고 할 때였다.
“네리아 님?”
우연인지, 때마침 훈련장을 나서던 듀이와 마주쳤다.
갑작스러운 조우에 심장이 순간 내려앉는 줄 알았지만,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듀이?”
하지만 정작 듀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당사자인 듀이 역시 황명으로 북부 차출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괜찮아?”
“네리아 님, 저…….”
머뭇머뭇. 듀이의 입이 떨어졌다가 닫히면서도 정작 말이 나오지 않았다. 듀이는 그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에서야 드디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황궁에서 온 편지를 받았어요. 제가 다음 주부터 마수 토벌로 북부에 가야 한다고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들었어요. 파견을 미루기 위해 결혼을 해야 한다고요.”
왜인지 듀이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스승님은 저에게 들어온 혼담이 많으니, 아무와 결혼해도 괜찮을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듀이?”
“저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
“얼굴도 모르는 상대는 싫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억지, 네리아 님과 발렌티스 가문에 폐가 되겠지요?”
듀이는 차라리 단신으로 서궁으로 들어가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다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쓸쓸한 목소리였다.
“듀이, 결혼이 하기 싫은 거야? 아니면 얼굴도 모르는 영애와 결혼하는 게 싫다는 거야?”
“…후자 쪽이요.”
“그러면, 듀이.”
가져온 분홍색 장미 한 송이를 듀이에게 쓱 내밀었다.
“네리아 님?”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금색 눈동자가 깜빡이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 말을 꺼낸다면 듀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되어서.
아까는 청혼이 소박한 것 같아서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쯤이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나, 둘만 있으면 충분했다.
게다가 ‘듀이 발렌티스’라는 이름. 정말 잘 어울리잖아?
“나랑-”
“레이디 발렌티스, 여기에 계셨군요. 하녀에게 장소를 듣고 왔습니다.”
응?
설레는 마음으로 나와 결혼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였다. 마침이라고 하면 좋을지,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환청을 들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환청이라고 해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레오니트 황태제였기 때문이었다.
듀이에게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곳에는 정말로 레오니트가 서 있었다.
“당장 알려 드리고 싶은 소식이 있어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레이디 발렌티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할 때 오다니! 방해됐어! 민폐가 따로 없어! 물론, 황족 모독은 중죄이기 때문에 머리로 생각만 한 것이었다.
“혹시 바쁘신데 제가 방해가 되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전하. 다리스에 영광이 있기를. 어떤 소식을 말씀하시는지요?”
“방금 폐하와 협상을 끝내고 오는 길인데-”